[미디어피아] 황인성 기자= 최근 서울경마공원에서 활동하는 말 관리사 잇따라 숨진 사건에 대해 서울경마장조교사협회가 이례적으로 입장자료를 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일부분만을 부각한 언론보도가 오해 소지가 있어 사건의 전말 공개를 통해 해명하고자 위함이다. “A씨 죽음, 조교사 질책 및 업무 연관성 보기엔 무리···최근 가정불화로 이혼 진행 중”“유족 요청에 따라 외부 유출 자제···회사 관련 일부분만 공개”“업무량 과도란 언론보도, 잘못된 것”서울경마장조교사협회(이하 ‘협회’)는 7일 오후 입장자료를 통해 지난달 21일 숨진 채
“밑에 네 친구가 왔다.”“친구?”“주정뱅이 말이야. 내가 뭐랬어. 숙소를 가르쳐 주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안 가르쳐 줬어. 어떻게 여길 알았을까……. 어쨌든, 있다고 했어?”“아니, 있나 없나 본다고 했어. 그 친구는 벌써 한잔했더군. 술 냄새가 역해.”“체크인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어야지.”“네가 알려줬다고 생각했지. 젠장.”“방에 없다고 해 줘. 미안.” 쓰던 일기를 마저 쓰려고 볼펜을 들었으나 상념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흔들었다. 주로 술 생각이었다. 한 시간 쯤 버티
비탈길을 에돌아 학교 마당으로 내려섰다. 미쉘은 거기 있었다. 인부들이 페인트칠 하는 벽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무슨 모임에 다녀 온 듯 했다. “김!”미쉘이 반갑게 웃었다. 면도를 했는지 얼굴이 말쑥했다. 미쉘이 함께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젊은 여자는 친정에 갔다던 미쉘의 아내 강가. 눈초리에 의심과 짜증을 달고 있었다. 체구가 큰 서양 남자는 미쉘의 형 요한. 형제라지만 둘이 너무 달랐다. 미쉘이 사근사근하고 순진해 보인다면 요한은 거칠고 야비해 보였다. 배다른 형제일지도
홀리 축제의 소동을 피해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고 났을 때 양철배와 일기장이 눈에 뜨였다. 트레킹을 떠나면서 알리멘트에 맡겼다가 찾아온 짐 속에 있었던 장난감들이 언제 책상에 올라갔는지 생각이 안 났다. 어쨌든 혼자 조용히 할 일을 찾았다. 캘커타에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다르질링에 도착하여 어느 날 불현듯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불과 보름 쯤 전의 기록인데도 아주 오래 된 것 같았다. 다르질링의 운무 속에서 전생처럼 떠오른 기억의 일면들은 그렇다 치고, 쓰다만 유서 같은 편지 한 토막은 남의 글 같아서 여러
1976년, 한국 농구계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19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10년 가까이, 1m88cm의 작은 키로 한국 남자농구 대표 팀 부동의 센터로 활약했었던 고 김영일 씨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김영일은 전국의 최고 수재들만 모인 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갔고, 경기고등학교에서도 수영, 수구, 빙상,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하면서 취미로 농구를 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도 일반 학생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당당히 실력으로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본격
애틋한 새소리에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눈 뜨면 바로 일어나 걷던 수개월 동안의 버릇이 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다. 아직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에 이르렀을 때 태권도 도복을 입고 맨발로 달리는 소대 규모의 군인들을 보았다. 트레킹 전에는 못 본 풍경이었다. 사원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에 자리 잡고 줄지어 앉아 구걸하는 걸인들도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오직 운무만 보면서 운무 속을 산책했기 때문에 미처 못 봤을 것이다. 사원이 있는 야산을 우회하는 도로를 걷다가 긴 의자와 철봉이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쪽, 그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일에 차질을 빚는다. 시킴 입경 허가증이 나오는 데는 1주일 쯤 걸린다고 들었는데 막상 수속을 해 보니 절차가 번거롭긴 해도 몇 시간 만에 허가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오후에 바로 시킴으로 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목을 잡은 것은 침낭이었다. 빨래는 날씨만 좋으면 저녁에라도 찾을 수 있지만 침낭은 최소한 사흘은 걸린다고 했다. 드라이클리닝은 그 세탁소에서 하는 게 아니라 전문 업소에 의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르질링을 떠나고 싶어서 허가증을 손에 쥐자마자 세탁소에 가보니 침낭은 이미 전문 업
다르질링은 여행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예상한 그대로 알리멘트에는 빈 방이 없었다. 유스호스텔에는 있겠지 싶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티브이타워 인근에서 숙소를 찾으러 다녔다. 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 방이 하나 비어 있었다. 방 다섯 개가 잇달아 있는 아래층 맨 끝 방이었다. 한쪽 콧방울에 금싸라기 장신구를 붙인 몽골계 여주인이 방문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놓고 문 옆으로 비켜섰다. 직접 열고 들어가 보라는 뜻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놓인 나무 침대 위에는 솜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고 침대 밑에는 값싼 카펫을 깔아 놓았다. 통로 쪽으로 낸
마을 어귀가 보였다. 운무 속에서 나타난 마을은 이승 같기도 하고 저승 같기도 했다. 드문드문 사람들도 나타났다. 쟁기 비슷한 농기구를 수선하는 젊은 남자, 자느라고 목이 꺾인 애를 업고서 뜨개질 하는 여자, 기도 바퀴를 돌리며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가는 노인. 제각기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불쑥 나타난 털북숭이 개조차 나그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 유계에 발을 딛지 않았나 싶어서 오소소 소름이 돋을 때,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과연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
온 길을 되짚어서, 그러니까 실리콜라 강을 거슬러서, 끝없이 이어지는 서글픈 상념에 잠겨서, 흙먼지 이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는 중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따라 오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 오던 사람은 상념 속에 스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이제는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년이, 이제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는데, 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보였다. 실리콜라를 따라 일본 청년들과
아침 6시. 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불었다. 체왕 롯지 앞의 룽따는 곧 찢어질듯이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고원은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언덕 위에서 히말라야가 펼쳐져 있을법한 북쪽을 바라봤지만 히말라야 쪽에는 두꺼운 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구름 위로 해가 솟고 금빛 햇살이 마을 골목을 비출 때 쯤 멀리서 뎅그렁 뎅그렁 쇠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소들이 허연 입김을 뿜으며 올라왔다. 이 소들은 고산의 소 야크와 저지대의 물소의 교배종인 ‘조’인데 등에 땔감을 잔뜩 짊어졌다. 체왕 호텔 부엌에서는 벌써 아침 준비하는 연기가
죽어 가는 붕어가 더러운 웅덩이의 수면 위로 떠오르듯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때 새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새소리였다. 애틋하고 귀여웠다. 잘 들어보니 한 마리가 우는 게 아니고 두 마리가 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나무 가지에 앉아서 혹은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오르며 운다는 것도 알았다. 종달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푸른 보리밭을 짓누른 끝없이 푸른 하늘이 떠올랐고 눈이 저절로 떠졌다. 폐유와 해조류가 뒤덮여 빛을 차단한 컴컴한 수면, 즉 합숙방 천장이 거기 있었다. 깨진 유리창과 그 창턱
날마다 운무 속을 돌아다니다가도 밥 때가 되면 알리멘트에 가서 밥을 먹었다. 점심은 길거리에서 군것질로 때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저녁은 알리멘트의 식탁에 앉아 제대로 먹었다. 알리멘트는 유스호스텔의 부속 식당과는 달리 차림이 다양했고 맛도 그만하면 좋았다.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왔다. 또한 타파 구릉과 그의 부인과 어린 딸 모두가 친절했다.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옛날 팝송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냥 눌러 앉아 식당 카운터 옆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오래된 비망록들을 들추곤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나라 여행자들의
룽따 風馬 설산 칸첸중가를 처음 봤던 그 날 아침에 다르질링에서의 첫 산책을 나섰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백 미터쯤 걸었을 때 다리가 휘청거렸다. 운무는 몇 걸음 앞이 안 보일 만큼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까, 이대로 더 걸어볼까, 망설일 때 운무 속 저만치 밝으레한 불빛이 퍼져 나오는 창문이 보였다. 불빛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옮겼다.불켜진 창이 있는 건물은 식당을 겸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반가웠다. 들어가서 아침도 먹고 쉬고 싶었다. 현관문을 당겼다가 흠칫 놀랐다. 식당 안에는 뜻밖에도
다르질링산비탈 도로는 운무에 잠겨 있었다. 버스가 산굽이를 하나씩 돌 때마다 운무는 점점 짙어져서 눈앞의 길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운전사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깜박 깜빡 잠들다 깨곤 했다. 한 번 씩 잠에서 깰 때마다 운무는 더욱 짙어졌다. 버스의 노란 전조등이 휘젓는 푸른 운무 속에서 우중충한 집들이 나타났다. 칙칙한 색깔의 두꺼운 옷을 입은 야윈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다가는 다시 운무만 보였다.눈을 감으면, 수 십 년 전 다도해 뱃길이 출렁출렁 다가오기도 했다.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보였던 하얀 바다, 저 멀리
성수동의 한 병원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문을 닫고 인력난을 호소하는 대구에 손을 보태기 위해 내려갔다. 청도 대남병원에는 신혼 5개월 차의 간호사가 9시간 동안 정신병동에서 환자를 간호하고 곧장 숙소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격리되는 강행군을 불사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남편으로 대학 병원 가정의학과의 한 의사 역시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야지"라며 덤덤하게 경북에 내려갈 신발 끈을 동여맸다. 지난 3일에는 임관과 동시에 60기 간호장교 75명 전원이 대구로 향했다. 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최전선으
고 문중원 기수의 자살과 관련한 민주노총과 한국마사회의 협상이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국민들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경마를 즐기는 경마팬들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풍경에 어리둥절 하고 있다.나는 기자생활을 포함하여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경마와 인연을 맺으며 생활했다. 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니 민주노총도 잘알고 한국마사회도 잘안다. 그래서 민주노총과 한국마사회의 갈등에 끼어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자칫 글을 잘못 쓸 경우 어느 한쪽에 치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코카서스산맥 깊숙한 품에 자리한 메스티아로 가는 유일한 길이 오전까지 내린 폭설로 길이 막혔다. 크고 작은 눈사태와 무거운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도로를 가로막았다. 여기에 월동장비도 갖추지 않은 차량들까지 한데 뒤엉켜 메스티아로 가는 길이 요원해 보였다. 조지아 스키 취재를 도와주고 있는 가이드 데이빗이 구다우리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유는 하나다. 나에게 조지아 스키 투어의 영감을 준 곳이 바로 메스티아기 때문이다. 출국 전 만난 조지아 대사님도 메스티아
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기영노 기자의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의 콩트’를 연재합니다. 100%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기영노 콩트는 축구, 테니스, 야구 등 각 스포츠 규칙을 콩트 형식을 빌려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는 연재입니다. 기영노 기자는 월간 , , 에서 스포츠 전문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야구가 야단법석』, 『재미있는 스포츠 이야기』 등 30여 권이 있습니다. - 편집자 주지난 2월 1일부터 호주의 블랙 타운에서
이렇게 시즌이 끝나는 걸까? 2월 15일 센다이공항에 내려 이와테현으로 가는 고속도로 풍경은 절망스러웠다. 2월이면 온통 새하얗던 산과 들이 너무 평온했다. 당장 모내기를 해도 좋을 만큼 봄빛이 물씬했다. 늦은 저녁 게토 고겐(Geto Kogen) 스키장 아래에 있는 세미온천에 닿았을 때는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비 예보는 내일까지 이어졌다. ‘눈의 왕(King of Snow)’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게토 고겐 스키장. 얼마나 오래 동안 ‘트리런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스키를 타려고 갈망했던가! 그런데 끝내 날씨가 도와주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