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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0 ] 일기장

김홍성
  • 입력 2020.07.22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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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불안과 회한, 아무리 마셔도 목이 타는 술로 나날이 망가지면서도 일기장을 장만했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아끼고 자중자애하며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홀리 축제의 소동을 피해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고 났을 때 양철배와 일기장이 눈에 뜨였다. 트레킹을 떠나면서 알리멘트에 맡겼다가 찾아온 짐 속에 있었던 장난감들이 언제 책상에 올라갔는지 생각이 안 났다. 어쨌든 혼자 조용히 할 일을 찾았다.

 

캘커타에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다르질링에 도착하여 어느 날 불현듯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불과 보름 쯤 전의 기록인데도 아주 오래 된 것 같았다. 다르질링의 운무 속에서 전생처럼 떠오른 기억의 일면들은 그렇다 치고, 쓰다만 유서 같은 편지 한 토막은 남의 글 같아서 여러 번 찬찬이 읽었다.

 

병이 들어 앓고 있었고, 너무 고독했으므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절박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페이지를 뜯어내 버렸다.

 

과거에도 한동안 일기를 쓰곤 했다. 물론 찢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끝내 붙들고 있었던 일기장들은 출국 전에 모조리 태웠다. 가져올 수도 없고 남겨 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캘커타의 길거리 서점에서 2 백 페이지 분량의 단행본 같은 노트를 발견했을 때 다시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일기장들을 모조리 태우고 떠난 지 보름도 안 됐을 때였다.

 

위스키 한두 병 값을 주고 구입했지만 쓸 말이 없었다. 마시고 자고 마시고 잤다고 쓸 수 없었다. 마시는 틈틈이 구라를 쳤다혹은 노가리를 깠다고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일기장을 장만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라는 인간이 영 몹쓸 인간이 되지 않은 이유는 늘 일기장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불안과 회한, 아무리 마셔도 목이 타는 술로 나날이 망가지면서도 일기장을 장만했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아끼고 자중자애하며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 일정을 날짜별로 간략히 메모했다. 트레킹 이후 취생몽사 커플과의 만남, 실리콜라의 펨 도마에게 한 거짓말도 적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한 변명,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말자, 만취할 때까지 마시지는 말자는 다짐도 새겨 넣었다.

 

일기장을 덮고 수평선 위에 뭉게구름이 떠 있는 일기장 표지 위에 양철배를 올려놓았다. 시킴에 갈 때는 둘 다 반드시 데려가 주마 ……. 라고 일기장과 양철배에게 말했다. 일기장은 양철배의 닻이고 선착장이었다. 창 밖에는 또 운무가 몰려와 있었다. 이 날 취생몽사 커플은 밤늦게 돌아왔다. 일부러 나가 보지 않았다. < 계속 > 

ⓒ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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