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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사건, 농구 천재 김영일의 의문의 죽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7.2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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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
김영일은 1m88cm의 센터로는 작은 키였지만, 작은 키를 명석한 두뇌 플레이로 커버
그는 왜 하필 기차 길 옆에서 사망 한 것일까? 그리고 자살일까 타살일까?

1976년, 한국 농구계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19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10년 가까이, 1m88cm의 작은 키로 한국 남자농구 대표 팀 부동의 센터로 활약했었던 고 김영일 씨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김영일은 전국의 최고 수재들만 모인 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갔고, 경기고등학교에서도 수영, 수구, 빙상,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하면서 취미로 농구를 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도 일반 학생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당당히 실력으로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김영일은 한국을 대표 할 만 한 스포츠 가족의 일원이었다.

아버지 김성간씨는 1930년대 전 조선 팀과 연희전문 축구팀의 센터포드와 주장을 겸했고, 어머니 김연경씨도 이화여전에서 탁구선수를 했다. 김영일이 2남2녀 중 장남인데 누나 영실과 여동생 영옥은 수영, 남동생 영백도 농구 선수 생활을 했다.

김영일은 이화여대에서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장영희씨와 결혼, 완벽한 스포츠 일가를 이뤘었다.

아마 생존해 있었다면 농구계에서 가장 성공한 고려대학교 출신 김영기 씨와 모든 면에서 쌍벽을 이뤘을 것이다.

김영일은 1m88cm의 센터로는 작은 키였지만, 작은 키를 명석한 두뇌 플레이로 커버했다. 재치 있는 피벗 플레이와 지능적인 위치 선정으로 리바운드도 잘 해 아시아 최고의 센터로 군림했었다.

1969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사상 처음 아시아를 제패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6회 대회 결승전에서 장신 이스라엘을 꺾고 2연패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국 팀의 주전 센터이자 주장이었다.

이스라엘 팀은 평균 신장이 우리나라 센터 김영일 보다도 2cm나 더 큰 1m90cm이었다. 신동파, 이인표, 김인건, 유희영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함께 했지만, 골밑에서 상대팀의 2m가 훨씬 넘는 장신 센터를 막아주는 김영일이 없었다면 아시아 정상은 어려웠다.

 

김영일은 1976년 5월23일 전라남도 광주시 동성동 극락강변 철길 변사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34살의 아까운 나이에 농구계를 떠났다.

김 씨는 정확히 1976년 5월23일 23일 새벽 6시 경 극락강변 철길 옆 목초지 부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 씨는 사고가 나기 나흘 전인 5월19일부터 광주에서 열리고 있던 제31회 종별농구선수권대회에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한국은행 남자농구팀을 출전시키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김 씨의 사체는 머리 부분이 벗겨지고 오른쪽 두개골 여러 군데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그리고 허리와 엉덩이 부분에도 찰과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있었다.

경찰은 사고당일인 23일 오전, 광주 유덕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했는데, 경찰은 처음에는 그의 사망원인을 자살이나 사고사 보다는 타살로 추정하고 있었다.

경찰이 본 타살증거로는,

첫째 김 씨의 소지품인 옷과 가방이 시체 옆에서 흩어지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둘째 다른 장소에서 죽여서 옮겨다 놓은 것처럼 사체가 고스란히 엎어져 있었다.

셋째 김 씨의 몸에서 기차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추락하지 않았다.

김 씨의 변사체가 발견된 지점은 광주역에서 송정리역 방향으로 6km쯤 떨어진 곳인데 당시만 해도 인적이 드문 철교 부근이었는데, 김 씨는 철길에서 3m 쯤 떨어진 곳에 숨져 있었다.

김 씨는 사망당시 짙은 회색 트레이닝 윗도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시계, 반지, 가방 그리고 현금 3만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김 씨를 부검한 부검의는 머리 부상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23일 새벽 4시부터 5시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을 했다.

그런데 광주역 당국에 의하면 김 씨가 숙소를 빠져나온 새벽부터 사망 추정시간까지 약 3~4시간 동안 광주에서 출발해 목포 방향으로, 극락강변을 지난 기차는 4시6분 광주 발 보통급행과 5시25분 광주 발 급행 등 2개의 열차 뿐 이었다.

두 대 모두 서울행이 아니라 목포행으로 김 씨가 술에 취해 서울행으로 잘못알고 목포행 기차를 잘못 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김 씨가 사고 나기 불과 3개월 전까지 한국은행 광주지점에 1년3개월간 근무를 했다는 점으로 미뤄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김 씨는 왜 하필 기차 길 옆에서 사망 한 것일까? 그리고 자살일까 타살일까?

당시 체육부 기자들은 변사사건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장검증을 한 형사들과 수사본부장의 발표를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타살에 무게를 뒀던 수사관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살 또는 사고사로 심증을 굳혀 갔던 것이다.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 사이에서는 “수사관들이 범인을 잡지 못할 것 같으니까 자살로 몰고 가는 모양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도록 독려하자”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농구인들 사이에서 타살에 비중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김영일 씨가 아무리 술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에 극락강변 철길에 갈 이유가 없다. 더구나 통행금지가 있는데 새벽 2시에 숙소를 나와 어떻게 거기까지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사고 또는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영일 씨가 숙소를 나와 극락강변 철길까지 가는 동안 방범대원이 목격을 했고, 주머니 속에 있던 3만원도 그대로 있다. 만일 누가 살해 했다면 강도 사건으로 위장을 하기위해서라도 돈은 가져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살에 대해서는 반문하지 못했다.

사고 무렵인 70년대 중반, 한국 성인 남자 농구는 김 씨가 감독을 맡았던 한국은행과 박한 신현수의 산업은행 그리고 신동파의 기업은행이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3팀 가운데 신동파가 소속되어 있던 기업은행의 전력이 약간 앞서 있었지만, 대회가 열릴 때 마다 우승팀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김 씨가 한국은행 팀 감독을 맡은 뒤 데뷔전인 제31회 종별농구선수권대회 첫 경기에서 가장 약한 팀 전매청에게 83대90으로 패했다. 전매청에는 불세출의 가드 유희영이 있었지만 그 밖의 선수들이 무명이어서 항상 최하위에 머물렀던 팀이었다.

김 씨는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이 정신력이 헤이해서 패했다고 판단, 심하게 꾸짖었다. 결국 그 대회는 유희형 만이 유일한 국가대표인 전매청이 팀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고, 한국은행은 최하위로 처졌다.

대회가 끝난 후 김 씨와 코칭 스텝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광주시내의 호텔과 술집을 전전하면서 3차까지 술을 마셨다.

김 씨는 숙소에 돌아와서도 한국은행 팀 선수들에게“이 상태로는 더 이상 팀을 맡을 수 없다. 내가 팀을 떠나겠다”며 선수들이 극구 말리는 데도 한사코 뿌리치며 숙소를 빠져나갔다.

그 때가 사망 추정시간 2~3시간 전인 새벽 2시경이었다.

사건 발생 후 수사본부를 설치했었던 광주 유덕 파출소와 관할 경찰서에는 김영일 씨의 사망을 미제사건이 아니라 단지 열차에 의한 변사사건으로 처리했다.

1969년 농구대표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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