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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18 ]보리수

김홍성
  • 입력 2020.07.10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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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하는 그는, 아무리 그라고 불러도 결국 나일 수밖에 없는 그는, 어느새 현수교를 건너고 있었다. 어느새 산장에 도착하여 붉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잔명에 반짝이는 실리콜라의 시린 물살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푸른 목숨을 마시고 있었다.

 

온 길을 되짚어서, 그러니까 실리콜라 강을 거슬러서, 끝없이 이어지는 서글픈 상념에 잠겨서, 흙먼지 이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는 중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따라 오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 오던 사람은 상념 속에 스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이제는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년이, 이제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는데, 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보였다. 실리콜라를 따라 일본 청년들과 함께 내려올 때는 미처 못 본 제법 커다란 나무였다. 멀리서는 나목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시든지 오래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들이 여린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하트' 모양의 잎사귀 끝이 올챙이 꼬리처럼 가늘고 길었다.

 

우리나라의 서낭당 당나무처럼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나무였다. 드러난 뿌리 위에는 타다 남은 향과 양초가 있었고, 둥치와 가지에는 실타래나 헝겊이 걸려 있었다. 객지에 나간 식구가 탈 없이 돌아오기를 빌고,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고, 좋은 신랑을 만나 오순도순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흔적이었다.

 

그 나무의 이름은 피팔Peepal, 싯다르타 Siddhatha Gautama가 그 나무 밑에 앉아 보리도를 이루었다하여 보리수라고도 부르는 나무였다. 보리수 밑은 해충이나 독사가 꼬이지 않고, 그늘이 넓으며, 밤이슬을 막아 주어서 수행자들이 거처하기 좋은 곳이라고 들었다.

 

배낭에 기대어 쭉 뻗은 두 다리의 연장선 저 멀리 실리콜라 강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글픈 상념이 가라앉고 고요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대로 낮잠 한숨 푹 자도 좋았으련만 아리따운 처녀 펨 도마네가 빚은 붉은 술이 떠올랐다. 다시 오면 한 달을 머물어도 돈을 안 받겠다던 룸부네 집은 멀고 높았지만 펨 도마네 산장은 멀지 않았다.

 

 

어느 날 술을 한 번 입에 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지칠 때까지 계속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나의 병이었다. 일주일 내내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마신 적도 있었다. 캘커타의 마리아 호텔에서는 보름이 넘도록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 마셨다.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서 해장을 하고 있으면 술 좋아하는 여행자들이 하나 둘 술병을 들고 옥상으로 모여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술은 동틀 때까지 이어졌다.

 

캘커타를 떠나고, 다르질링의 유스호스텔에서 알리멘트로 숙소를 옮기고, 결국 트레킹을 떠나게 된 근본 이유는 동포 여행자들과 그런 술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데 있었다. 그러나 술 없이는 여행 또한 일상처럼 경직되거나 진부해지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마시는 술에는 그런 모순이 있고 왜곡이 있었다.

 

술 좋아하는 그는, 아무리 그라고 불러도 결국 나일 수밖에 없는 그는, 어느새 현수교를 건너고 있었다. 어느새 산장에 도착하여 붉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잔명에 반짝이는 실리콜라의 시린 물살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푸른 목숨을 마시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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