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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 ]

김홍성 시인
  • 입력 2020.06.1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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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그 때 이후로 어디든 룽따가 펄럭이는 마을에 가면 빨래 줄에서 힘없이 너울대던 흰 기저귀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룽따 風馬

 

설산 칸첸중가를 처음 봤던 그 날 아침에 다르질링에서의 첫 산책을 나섰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백 미터쯤 걸었을 때 다리가 휘청거렸다. 운무는 몇 걸음 앞이 안 보일 만큼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까, 이대로 더 걸어볼까, 망설일 때 운무 속 저만치 밝으레한 불빛이 퍼져 나오는 창문이 보였다. 불빛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옮겼다.


불켜진 창이 있는 건물은 식당을 겸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반가웠다. 들어가서 아침도 먹고 쉬고 싶었다. 현관문을 당겼다가 흠칫 놀랐다. 식당 안에는 뜻밖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교사 부부의 인솔로 트레킹을 하러 온 영국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위층에서 자고 내려온 영국 학생들의 주문이 밀려 있어서 나는 겨우 밀크 티 한잔과 오믈렛을 먹었다. 그래도 든든했다. 배를 불려서가 아니라 운무가 점령한 다르질링에 나 말고도 다른 여행자들이 수두룩하다는 데서 위안을 얻었다. 식당을 나섰다. 운무 속에서 보였다 말았다 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티브이 타워 쪽으로 씩씩하게 걸었다.  

 

티브이 타워 언덕에는 크게 네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걸어온 길, 즉 유스호스텔을 거쳐 병영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하나는 다르질링에 도착한 첫날 버스터미널에서 지프를 타고 올라온 길이며, 다른 하나는 미륵불을 모신 티벳 곰파가 있는 굼 마을을 거쳐 칼림퐁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르질링의 중심인 초라스타 광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밀려오는 운무를 헤치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지만 그 골목이 조만간 광장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다만 슬슬 걷기에 가장 만만한 길이라고 여겨졌을 뿐이다.

 

골목 왼쪽은 제법 번듯한 주택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곡으로 떨어지는 오른쪽 비탈에는 가난의 땟국이 줄줄 흐르는 빈민가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게딱지같은 판잣집들의 지붕 위에는 장대 끝에 매단 흰 깃발들이 그들 불교도들의 자존심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어떤 깃발에는 티베트 불교의 한 상징물인 룽따가 뚜렷이 인쇄되어 있었다. 흰 깃발들도 자세히 보면 햇빛과 바람과 운무에 의해 탈색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룽은 바람을 뜻하고 따는 말을 뜻하는데, 펄럭이는 깃발의 모습이 바람을 향해 앞발을 쳐든 말 같다는 데서 깃발 자체를 룽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골목의 룽따들을 보자니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의 빨랫줄에 널어놓은 흰 아기 기저귀들이 연상 되었다. 첫 인상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그 때 이후로 어디든 룽따가 펄럭이는 마을에 가면 빨래 줄에서 힘없이 너울대던 흰 기저귀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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