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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6 ] 알리멘트의 식탁

김홍성
  • 입력 2020.06.2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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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냥 눌러 앉아 식당 카운터 옆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오래된 비망록들을 들추곤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나라 여행자들의 육필 기록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날마다 운무 속을 돌아다니다가도 밥 때가 되면 알리멘트에 가서 밥을 먹었다. 점심은 길거리에서 군것질로 때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저녁은 알리멘트의 식탁에 앉아 제대로 먹었다.

 

알리멘트는 유스호스텔의 부속 식당과는 달리 차림이 다양했고 맛도 그만하면 좋았다.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왔다. 또한 타파 구릉과 그의 부인과 어린 딸 모두가 친절했다.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옛날 팝송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냥 눌러 앉아 식당 카운터 옆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오래된 비망록들을 들추곤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나라 여행자들의 육필 기록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만화도 있었고, 우스갯소리도 있었으며 자못 심각한 구절도 있었다. 또한 각종 여행 정보와 감상이 자세히 적혀 있기도 했다.

 

맥주를 한 병 시켜놓고 비망록을 들추다가 귀에 익은 옛날 팝송이 들리면 잠시 추억에 잠기는 알리멘트에서의 저녁 시간은 푸근했다. 알리멘트의 주인 타파 구릉은 나보다 대여섯 살 많기는 했지만 감상적인 팝송이 풍미하던 60년대 말에 영국군 용병이었던지라 어딘지 모르게 정서가 통했다. 내가 맥주를 시키면, 혹은 맥주를 시키지 않고 있어도 손님이 뜸할 때면 어느 결에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곤 했다.

 

숙소를 아예 알리멘트의 위층으로 옮길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알리멘트의 방들은 유스호스텔의 합숙방에 이미 익숙해진 내게는 비좁았으며, 드나드는 손님이 많아 부산스러웠다. 거긴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보살펴 준 락바 라마와 유스호스텔의 합숙방을 떠날 수 없었다.

 

유스호스텔에는 운무가 있고 쓸쓸함이 있었다. 벽난로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혼자 잠드는 쓸쓸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양철배 속에 쭈그리고 앉아 촛불을 쬐며 해무(海霧) 속을 떠다닌다는 공상을 끝내기도 싫었다.

 

그렇게 2월이 다 가고 3월이 왔다. 일기장의 31일 페이지에는 '새벽부터 오전 내내 설산 칸첸중가가 보였음. 오후부터 다시 운무'라고 적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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