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8월 15일 자 기사에서 역사 유튜버 수민 박이 21번째로 2022년 2월 8일 업로드한 “역대 한중일 일식(日蝕) 최적관측지 분석 #3편” 결과를 요약했다. 주나라부터 전한까지인 기원전 8년 전까지, 주나라 41개· 노나라 33개· 전한 시대 43개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는 집안(통구) 일대이고, 후한까지인 기원후 220년까지 일식 기록 57개 최적 관측지는 차이나 북경(베이징)일대로 나타났다. 이는 1) 집안(통구)일대의 발달된 문명을 유지하던 민족들이 지배층으로 차이나 황하 유역으로 이동하였거나, 2) 차이나 황하 유역
필자는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이 후대에 가필되거나 지워진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지난 2개의 시리즈, [볼수록 이상한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과 [백제,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신라 당나라 연합군) 전투는 한반도에서 있었나? 중국 대륙에서 있었나?] 에서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사군의 명칭은 없으며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이 네 개의 군이 되었고 [‘爲四郡’,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후략)] 다섯 제후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사기] 가 나오고 약 200년 후 편찬된
지난 글에서 “사대석(莎臺石)은 왕릉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둘레에 세운 돌을 말한다. 봉분 하부를 석물로 감싸고 있어 봉분의 사토(沙土)를 구조적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사대석을 소개했다. 집안(통구)의 장군총, 서울 석촌동 고분의 사대석을 소개했고, 이제 경상도 경주의 사대석을 소개한다. 역사전문 유튜버 Sumin Park은 2019년에 게시한 유튜브 영상 [13. 경주고분의 변화와 대륙신라 (feat.십이지신)]https://www.youtube.com/watch?v=bCvMzOfPBNw 에서신라고분의 변화를 소
“사대석(莎臺石)은 왕릉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둘레에 세운 돌을 말한다. 봉분 하부를 석물로 감싸고 있어 봉분의 사토(沙土)를 구조적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중략) 조선 초기에는 사대석을 사용하였으나,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부터 석실과 사대석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대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가지고 봉분 주변을 감싸는 왕릉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禮曹啓 世祖大王 以 園陵石室 有害 無益 遺命 勿用 石室 及 莎臺石 今於光陵已 遵遺敎 請 於英陵 亦 依光陵制度 從之(『예종실록』 1년 1월 3일)“
토포포엠? 무식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또 먹물들이 고상한 척, 배운 척, 현학적인 척, '있어빌리티'를 시전하려고 만들어낸 단어인가 보다하고 책장을 넘기니 쭉 지명들이 펼쳐지고 각각의 장소에 화사한 드로잉,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이 금세 환하게 풀렸다. 방랑벽이 있는 필자 입장에서는 내가 가본 장소부터 읽고 싶다. 서울에 사니 2부 '사라진 섬'부터 만나보았다.이 책은 기행문이 아니다. 장소를 소개하고 거기에 얽혀 있는 스토리를 풀어주는 안내서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부
압록강 중류 강변의 집안(통구)에는 구석기 유적부터 기원후 1천년 경까지의 유적이 남아 있다. 유명한 광개토태왕비가 있다. 이는 천천히 살펴 본다. 우선 장군총이라 불리는 유적을 보자. 차이나는 장군총을 고리(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부일강단사학은( 부일(附日) 즉 일본에 부역한다는 의미) 차이나와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편에서 살펴 보았듯 장군총은 의문 투성이다. 1) 장군총 일대에서 고리 장수왕의 유물은 단 하나도 나온 것이 없다. 이는 경주의 무덤에서 어느 왕의 유물은 하나도 나온 것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정치인, 박정희와 김대중은 우리 현대사에 빛과 그림자를 함께 남겼다.이미 고인이 된 두 정치인은 남겨진 사회와 후손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박정희는 경제 성장을 통해 한국을 가난에서 구해낸 인물로,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로 한국을 독재에구 해낸 인물로.이 둘은 1968년 1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하례식에서 대통령과 야당의원으로 잠시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류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과거 만남 이후 반세기 만에 두 고인을 가상으로 만나
압록강 중류 강변의 집안(통구)에는 구석기 유적부터 기원후 1천년 경까지의 유적이 남아 있다고 평가된다. 1만여개의 무덤을 일일이 분류하기도 힘들다. 눈길을 끄는 두 개의 유적이 있다. 하나는 유명한 광개토태왕비다. 이는 천천히 살펴 본다. 우선 장군총이라 불리는 유적을 보자. 차이나는 장군총을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래는 ‘나무위키 장군총’을 옮긴 것이다. 장군총은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장군총을 비롯, 배총 2기, (필자 주 1) 주위의 무덤. 기단부 상부에 고인돌이 있다) 추정 제사시설 1기, 배수구 1기,
신석기 시대라 함은 돌을 갈아 만든 석기 (마제 석기)와 질그릇(토기)을 도구로 사용하여 식량 생산 단계에 이른 시대를 말한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아프리카는 기원전 1만 5천년 이전에 차이나는 기원전 6천년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원전 1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터키 동남쪽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의 초기 사원은 신석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백과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천문학과 연결되는 거석을 세웠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는 힘들어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이집트의 피라
역사천재 후박(後朴) 유튜버 수민 박이 21번째로 2022년 2월 8일 업로드한 “역대 한중일 일식(日蝕) 최적관측지 분석 #3편”을 보자. 결과만 보면1) 주(周)나라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일식 기록 41개를 분석하니 최적 관측지 중 중심지역이 집안(통구)일대로 나타났다. 2) 노(魯)나라 (기원전 998년 이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일식 기록 33개를 분석하니 최적 관측지 중 중심지역이 집안(통구)과 한반도 일대로 나타났다. 3) 전한 (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까지) 일식 기록 43개를 분
동북아 고대사에서 참 이해가 안 되는 몇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집안 유적이다. 한반도 춘천시 중도 유적과 비슷한 점이 너무나 많다. 바닷가가 가깝지 않고 아주 깊은 산속의 강 주위에 넓은 경작지가 있는 곳에서 시작된 유적이라는 점이다. 한국 교과서는 집안유적은 고리(고구려)의 유적이고 고리(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압록강 한 가운데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곳을 차이나 왕조가 왜 공격해 오는 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안 유적은 고리(고구려) 만의 유적이 아니라, 한민족
‘북쪽은 차이나 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인 한반도가 한민족의 역사 무대라고 가르치면서 학문권력을 유지해온 부일강단사학! 친일사학은 일제 혹은 일본에 친하다는 말로 슬슬 바뀌어, 일제와 일제에 빌붙은 ‘역사팔이’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해 놓았는지 모르게 될 우려가 있어, 부일(附日) 즉 일본에 부역한다는 의미로 부일강단사학이라 부른다. 부역(附逆)은 전시에 적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부일강단사학이 애써 외면하는 자연과학이 있다. 천문학이다. 1960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천체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창범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