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이 후대에 가필되거나 지워진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지난 2개의 시리즈, [볼수록 이상한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과 [백제,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신라 당나라 연합군) 전투는 한반도에서 있었나? 중국 대륙에서 있었나?] 에서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사군의 명칭은 없으며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이 네 개의 군이 되었고 [‘爲四郡’,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후략)] 다섯 제후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사기] 가 나오고 약 200년 후 편찬된 [한서 조선전]은 낙랑·진번·임둔·현도 사군의 명칭을 처음 써 넣었고 [사기 조선열전]과 글자 몇 자 밖에 틀리지 않아
[한서 조선전]에 낙랑·진번·임둔·현도 4군을 써 넣으면서 [사기]에 [위사군爲四郡’]을 써 넣었을 것임을 논증한 바 있다.
[후한서 조선열전]이 삼국지보다 빨리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후한서]는 대략 430년경에 쓰여졌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진수가 285년경에 처음 쓰고 배송지가 450년 경 보충하였으므로 동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한서]까지는 ‘조선(열)전’으로 ‘조선’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후한서, 삼국지]부터는 ‘조선’이 아니라 ‘동이’로 쓰여졌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본다.
[후한서동이열전] 은 서(론)· 부여· 읍루· 동옥저· 고구려· 예· 한· 찬자평 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6국가 (및/혹은 민족)는 ‘동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신라가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1) 당시 백제, 신라는 위나라 근처에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서]는 차이나 황하 이북 특히 태행산맥 서쪽에서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는 위나라의 역사서임으로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거나 특별한 연관이 있는 나라만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2) 당시 백제, 신라는 위나라 근처에 있었는데 중요하지 않아 책을 쓴 진수, 배송지가 고의적으로 써 넣지 않았다.
이제 [후한서동이열전]을 보자.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국 국사편찬위원회가 무료로 공개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살펴 보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는 [예]전에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참조한 책이 모두 1966년 이전의 책으로 조선말기의 정약용, 일제 시대 일본인 학자, 그리고 부일역사학자 이병도의 책과 글을 인용하여 주를 달아 놓았다.
1976년 이병도가 쓴 책 ≪參考文獻≫ 李丙燾,「後方行列社會의 夫餘·沃沮 및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이 제일 최근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광복후 77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국사학계는 일본제국주의가 만주 침략을 위해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북쪽은 차이나의 식민지,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는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예]전을 보자.
濊는 북쪽으로는 高句驪· 沃沮와, 남쪽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朝鮮의 지역이다.
濊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1) ‘[옛] 朝鮮’에서 [옛] 은 삭제되어야 한다. 한국사람으로서 조선과 고조선을 구분못하는 사람은 없다.
2) 고구려와 구려는 같은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3) 예, 옥저, (고)구려는 모두 조선의 땅이다. 지금 조선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 옥저, (고)구려 만이 조선의 영토라는 말은 아니다.
4) 중요한 것은 위치다.
① 濊는 북쪽으로는 高句驪· 沃沮와
② 남쪽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③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④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5) [예]가 한반도에 있었던, 차이나 황하 유역에 있었던 동서남북으로 정확히 비정된다. [예]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역사책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차이나 황하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해석되는 역사 기록은 차고 넘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주석(설명)을 달아놓았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저자가 단 것인지, 원래 차이나 판본 [위서 동이전]에 달려 있던 주석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이에 비교하여 표로 정리해 보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음을 ‘불변의 진리’로 고수하기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예] 전 첫머리에
註 099 다음으로 【集解】 라는 이름으로 주석(설명)을 달고 있다.
【集解】 는 [사기집해]인데 대략 5세기말 6세기 초 남조 송나라 때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아들 배인裵駰의 『집해集解』를 말해 왔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라.
【集解】 다음에
“심흠한이 말하기를 ’ 일통지에는 조선강원도를 [예] 나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심흠한은 19세기 말 청나라 때 사람이며 일통지는 청나라 일통지로 추정된다.
5,6세기 [집해] 책 탈을 쓰고 19세기 일통지를 왜 꺼내어 설명하는가? 이유는 명확하다. 한반도 강원도 강릉에 [예]나라가 ‘있어서’가 아니라’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濊 註 099 【集解】沈欽韓曰, 一統志, 朝鮮江原道治江陵府, 在國城東面, 本濊貊地. 漢爲臨屯境.
원문 |
원문번역 |
주석(설명) |
주석번역 |
濊 [註 099]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註 100], 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
濊 [註 099] 濊 [註 100]는 북쪽으로는 高句驪·沃沮와, 남쪽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朝鮮의 지역이다. |
【集解】[沈欽韓曰, 一統志, 朝鮮江原道治江陵府, 在國城東面, 本濊貊地. 漢爲臨屯境.] |
(집해)심흠한이 말하기를 (청나라) 일통지에서는 (‘예’나라는) 조선강원도강릉부 성의 동쪽에 있고 본래 예맥의 땅이다. 한나라 때는 임둔의 경계이다. 비판) 【集解】라는 타이틀을 쓰고는 【集解】와는 관계없는 ‘심흠한’이라는 청나라 때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일통지에서 (권위를 내세우면서) [예나라]가 한반도 강릉에 있었다고 우기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 [註 101]. |
일찍이 武王이 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註 101]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뒷부분 번역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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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 準 [校勘 079], 自稱王.
漢初大亂 [註 102]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
而自王朝鮮,傳國至孫右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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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註 103]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
1) 【集解】惠棟曰, 魏略云準, 朝鮮王否之子.
2) 【集解】[惠棟曰, 魏略云, 準立二十餘年, 而陳·項起, 天下亂.]
3) 【集解】[惠棟曰, 衛滿見前注, 魏略云, 滿詣準降,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遂還攻準也.]
4) 【集解】[惠棟曰, 顔籀云, 滿死傳子, 子死傳孫. 右渠者, 其孫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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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혜동이 말하기를 “[위략]에서 조선왕 부否 의 아들이라고 말함.”
2) 漢初大亂 : 秦·漢交替期인 8년간의 혼란기
3), 4) 혜동이 말하기를 (이하 생략) |
濊 [註 099]
濊 [註 100]는 북쪽으로는 高句驪·沃沮와, 남쪽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周] 武王이 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註 101] 기자는 [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八條의 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婦人들은 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註 102]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註 103]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 濊 [註 098]
濊 [註 099] 【集解】[沈欽韓曰, 一統志, 朝鮮江原道治江陵府, 在國城東面, 本濊貊地. 漢爲臨屯境.]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註 100], 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 前書曰, 箕子敎以八條者, 相殺者以當時償殺, 相傷者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音義曰: 「八條不具見也.」 ]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 [註 101].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 準 [校勘 079], 自稱王. 【集解】[惠棟曰, 魏略云準, 朝鮮王否之子.
漢初大亂 [註 102], 【集解】[惠棟曰, 魏略云, 準立二十餘年, 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集解】[惠棟曰, 衛滿見前注, 魏略云, 滿詣準降,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遂還攻準也.]
傳國至孫右渠. 【集解】[惠棟曰, 顔籀云, 滿死傳子, 子死傳孫. 右渠者, 其孫名也.]
주99
濊 : 濊는 沃沮의 南쪽에 위치하여 舊七縣 중의 華麗·邪頭味·東暆·不而 등을 포함한 社會였으나 後漢 末期에 高句麗에 服屬되었다. 이 濊의 위치는 그 南界가 江原道 南端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이를 平康·淮陽(春川 以北) 附近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丙燾,「後方行列社會의 夫餘·沃沮 및 東濊」pp. 228~230)
<참조>
『三國志』濊傳 註 2)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 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濊貊族에 관한 硏究」)
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李丙燾,「後方行列社會의 夫餘·沃沮 및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