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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석(莎臺石), 집안(통구)의 장군총, 서울 석촌동 고분, 그리고 경상북도 경주 고분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2.09.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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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사대석(莎臺石)은 왕릉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둘레에 세운 돌을 말한다. 봉분 하부를 석물로 감싸고 있어 봉분의 사토(沙土)를 구조적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사대석을 소개했다.

 

집안(통구)의 장군총, 서울 석촌동 고분의 사대석을 소개했고, 이제 경상도 경주의 사대석을 소개한다.

 

역사전문 유튜버 Sumin Park2019년에 게시한 유튜브 영상 [13. 경주고분의 변화와 대륙신라 (feat.십이지신)]https://www.youtube.com/watch?v=bCvMzOfPBNw 에서

신라고분의 변화를 소개했다.

바로 [갑석]을 추가시켜 봉분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한 겁니다. 또한 이전 무덤에서 무덤을 두른 호석으로 괘석을 썼지만, 이 단계로 접어들면 [벽돌모양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썼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세모 모양의 받침석]까지 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모 모양의 받침석]이 사대석이다. Sumin Park은 이근직 교수의 신라왕릉연구를 많이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근직 교수는 2012년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경주의 고분의 주인공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나아가서 신라왕릉은 7기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한반도 경주가 언제부터 신라의 수도 서울이었는지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실 금관이 발견된 황남대총 등의 주인이 신라의 왕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언할 수 없는 형편이다.

 

"현재의 김유신묘는 제35대 경덕왕릉이며, 서악고분군 앞쪽 김인문묘야말로 실제의 김유신묘다. (중략)

오릉(五陵)은 박혁거세 무덤이 아니라 실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이며 제4대 탈해왕릉·6대 지마왕릉·8대 아달라왕릉은 통일신라시대 횡혈식석실분이고, 13대 미추왕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17대 나물왕릉은 7세기 무렵 횡혈식석실분이며 이들은 왕릉이 아니다." ("신라왕릉 중 진짜는 7기뿐..김유신묘는 경덕왕릉연합뉴스 2012-02-20)

 

압록강 중류 통구(집안)의 소위 장군총1만여기 이상의 고분 추정 건축물, 많이 훼손되었지만 290여기 이상의 무덤이 있었다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 그리고 경상북도 경주의 그 많은 고분 중에 사대석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조선부터 고리(고구려)까지 한반도 전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통일신라 시대 겨우 몇 몇의 왕이 한반도 경주에 도읍했으며 고조선, 고리(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 주무대는 차이나 대륙 황하, 양자강 유역 나아가서 차이나 대륙 전부였다고 할 것인가?

 

다음 호에서는 차이나 황하 서쪽 서안 의 고분군이 통구(집안)의 피라미드 고분군과 닮아 있음을 살펴 볼 예정이다.

유튜브 영상 [13. 경주고분의 변화와 대륙신라] 등에서 캡쳐 편집
유튜브 영상 [13. 경주고분의 변화와 대륙신라] 등에서 캡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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