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불가론 왕자 이련까지 전투에 참여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전쟁불가론이 불거져 나왔다. 이미 보릿고개를 넘어서서 군량미 보급에 큰 지장은 없었으나, 한 달이나 지속되는 가뭄으로 가을걷이할 농작물들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에 말라죽을 판이었다. 더더구나 출전을 앞두고 연일 맹훈련을 거듭하는 군사들 사이에서도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고 있었다.편전에는 대신들이 모여 있었고, 국상 명림수부가 대왕 사유 앞에 부복하여 아뢰었다.“폐하! 지금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한 달 이상 계
2. 바람의 순리 동부의 군사 1천을 이끌고 국내성에 당도한 두충은 일단 성의 동문 밖에 군막을 쳤다. 그리고 그곳 들판에서 군사들을 조련시키던 어느 날 밤, 그는 갑옷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옆에는 말구종으로 따라온 사기가 있었다. 사기는 기마부대 소속으로 기마대장 해평의 수하가 되었으나, 그가 스스로 두충에게 찾아와 간절히 이번 출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바람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평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두충을 보고 사기가 물었다.“어디를 가시려고요?”“성내에 좀 다녀올 일이 있다.”“그러면 소
1. 화농성 종기 국내성은 출정을 며칠 앞두고 어떤 미묘한 긴장감과 믿기지 않는 호승심으로 들떠 있었다. 이미 지방의 동서남북 각 부에서 보낸 군사와 말갈족을 합하여 1만, 전국에서 모병하여 훈련시킨 군사와 국내성 중앙군인 경군과 숙위군에서 차출한 병력 1만 5천 등 도합 2만 5천의 병력이었다. 또한 원정 도중 평양성에서 5천의 군사를 차출하여 총 3만의 대군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 중 전국에서 모병한 장정들은 전쟁 경험이 없어 두려움에 떨었고, 변방을 지키던 군사들과 말갈병은 사기가 충천하여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출진 명령이 떨
7. 충정 하대곤의 예상대로 국내성 사자가 책성을 다녀갔다. 고구려 변방을 지키는 각 성에도 동시에 사자들이 대왕의 군대 동원령을 가지고 떠났다고 했다. 한 달 안에 가려 뽑은 군사를 국내성으로 보내라는 어명이었다. 군대의 규모는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이는 각 성에서 어떤 성의를 보이는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하대곤은 고민 끝에 보병 1천의 군사를 보내기로 했다. 기병도 보내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해평을 기마대장으로 삼아야 하는데 보병 전체를 지휘하는 두충까지 두 장수가 빠지게 되면 책성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래서
6. 밀사 해는 서산의 등고선 끝자락에 올라앉아 곧 그 너머로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운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노을빛은 초록의 들판을 검붉은 빛깔로 수놓았고, 그 노을을 등지고 말을 탄 검은 그림자가 책성의 성문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말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 위의 사내가 크게 서두르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주변 산세와 잘 어울려 제법 높다랗게 지붕을 이고 있는 성문은 자못 중량감이 느껴졌다. 좌우로 이어진 석성의 높이는 두세 길은 좋이 되어 보여, 들판 멀리서도 성안이 잘 들여다보이
5. 큰 보물, 작은 보물 책성으로 돌아온 두충은 곧 동부욕살 하대곤과 독대했다.“그래, 서찰은 제대로 전했느냐?”“네, 장군! 대사자 어른께서도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갖고 계신 듯했습니다. 별도 인편으로 서찰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별도로?”하대곤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상대방의 말에 의심이 들 때면 간혹 그의 표정 속에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서찰을 받아오려 했으나, 대사자 어른께서 소인을 아직 믿지 못하는 것 같았사옵니다.”“흐음, 딴은 그렇겠군!”하대곤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실눈을 뜨고 한동안 깊은
4. 거래의 법칙 다음 날 늦은 아침에 두충은 장터 마당으로 나가 전날 초피를 팔아 챙긴 은화를 모두 털어 고급 비단을 샀다. 뒤따라온 사기는 두루마리로 된 원단을 말 위에 실었다.“이걸 어디로 가져가시려는지…?”사기가 은근히 물었다.“넌 알 것 없다. 말이나 끌고 따라오너라.”두충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서 놀고 있었다.왕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그 중 솟을대문이 높다랗게 올려다 보이는 집 앞에 당도한 두충은 기침을 크게 한 번 한 뒤 점잖게 소리쳤다.“이리 오너라!”문을
3. 엿듣는 자 두충과 석정은 금세 의기투합을 이루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사기는 그 곁에 옹색하게 쪼그리고 있다가, 지루함을 참지 못한 듯 평상 귀퉁이에 앉아 끄덕끄덕 졸았다. 그는 가끔 꿈속에서 잠꼬대를 하는 듯 웅얼거리기까지 했지만, 사실은 총기 있게 귀를 바짝 세운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그래 스님은 언제부터 불자가 되셨소?”두충이 무릎을 바싹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허허 헛! 내가 원래 역마살이 있어서, 열대여섯 살부터 집에 붙어 있질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저 중원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는 클래식 음악 전공자로는 드물게 역사와 음악의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고 널리 알리는데 매진하는 연주자다. 서울시 홍보대사로 봉직하면서 음악으로 서울의 방방곡곡을 알리고 소개하는데 일조했으며 생활 곳곳에 클래식의 향기를 심으며 상처와 치유의 메신저로서 귀감이 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은 행동으로까지 이어져 독도에 가서 자신의 편곡한 곡을 연주하는 등 필설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왕성한 에너지를 가진 예술인이다. 훈민정음 탑 건립을 위해 각계각층에서 모인 인사들 중에 음악인 바이올리니스트 여근
2. 괴승 대사자 우신의 집 근처 골목에 몸을 숨긴 삿갓 쓴 사내는 대문을 바라보며 두충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벌써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해가 지자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떴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쪽 하늘에도 달이 둥실 떠올라 길바닥을 훤히 비추었다. 두충은 우신의 집을 나서면서 조심스레 좌우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말을 타고 천천히 큰 거리로 나섰다. 삿갓 쓴 사내는 그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재바른 걸음으로 뒤를 쫓았다.그러나 큰 거리로 나서
‘정보’로 부(富)를 창출하는 리더십 처음 장건이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56~141년)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서역을 다녀온 것을 ‘제1차 서역착공(西域鑿空)’이라고 한다. 착공은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뚫는다’는 의미다. 가지 않은 길은 뚫으면, 그 길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문명교류’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장건은 ‘제1차 서역착공’ 이후 다시 무제의 명을 받아 제2차 서역착공을 수행한다. 그는 먼저 제1차 서역착공을 다녀와서 무제에게 자신이 두루 거쳐 온 서역 여러 나라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1. 초피 장사꾼 말 잔등에 짐을 잔뜩 실은 사내가 국내성 시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초피로 된 벙거지에 짐승가죽으로 옷을 해 입은 그는, 그 차림새만으로도 금세 초피 장사꾼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말에 싣고 온 짐도 모두 초피였다. 태백산과 개마고원 일대에서 나는 초피는 짐승의 가죽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치고 있었다. 초피는 담비가죽으로, 날씨가 추운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다.시장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미천왕 시절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했을 때에는 발해만을 통하여 큰 배들이 압록강 중류까지 닿았으므로, 당시엔
6. 무언의 약속 들판에는 파릇한 풀들이 한창 돋아나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저 먼 곳에선 풀냄새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한 뼘쯤 자라난 초록 들판을 말 두 마리가 달리고 있었다.나란히 달리는 말 위에는 남녀가 각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 질러 강가에 닿자 두 사람은 말을 멈추었다. 왕자 이련과 연화였다.“이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이 나온단 말이지요? 태백산 정상에 천지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정상에 그런 큰 호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이
5. 애증 하대곤으로부터 친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해평은 고구려 대왕 사유와 왕자 이련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가촌에서 처음 대왕을 알현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그때 분명 대왕 사유는 해평을 보고 낯이 많이 익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대왕은 왕제 무를 쏙 빼어 닮은 해평을 보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왕은 해평에게 대부가 되고, 왕자 이련은 사촌동생이 되는 셈이었다.‘너는 고구려의 피를 이어받았다. 장차 고구려를 위해 네 한 몸 바칠 수 있겠느냐?’해평은 동부욕살 하대곤을 만나기 위해
신뢰(信賴)와 인고(忍苦)의 리더십한무제(漢武帝) 때만 해도 서역은 멀고 먼 이방(異邦)이었다. 거리도 멀고 고산지대와 사막이 가로 막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큰 장벽은 흉노(匈奴)였다. 흉노는 두만선우(頭萬單于)와 묵돌선우(冒頓單于)를 거쳐 노상선우(老上單于)가 지배할 때였다.두만선우가 서북방의 흉노족을 결집해 세력을 키우자, 진시황은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장자였던 묵돌은 두만선우가 후처의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려고 하자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가 되었다. 묵돌선우는 흉노 세력을 더욱 결집해 동북쪽의 동호(東胡
4. 야심 고구려 동부의 본성인 책성으로 돌아온 이후, 동부욕살 하대곤의 심사는 사뭇 뒤틀려 있었다. 종제 하대용이 그렇게 표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대용은 딸 연화를 왕자 이련과 맺어주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었다.‘괘씸한 놈!’하대곤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대용은 연화의 배필로 해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식으로 혼사가 오간 적은 없지만, 하대곤과 구두로 그런 이야기를 나눈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평이나 연화도 어른들 사이에 은연중에 그런 말이 오간 적이 있다는 사실
3. 무술도장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검은색 장삼을 걸친 을두미가 정자 그늘에서 깃털 부채를 든 채 서 있었다. 더운 날씨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냥 멋으로 부채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가끔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숲속 공터에서 무술 훈련을 하는 장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허리에 검은 띠를 두른 흰옷 입은 장정들이 질서정연한 가운데 마치 백조들의 군무처럼 춤을 연상시키는 무술 동작을 보여주었다. 연화와 추수가 앞에 나와 무술 시범을 보이면 장정들은 그 동작에 따라 움직였다.그때 왕자 이련이 무술도장의 정자를 향해 걸어왔다
불교를 전파한 최초의 인도통일 군주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강을 눈앞에 두고 휘하 장수들의 말대로 인도 원정을 도중에 포기했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로 하여금 인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당시 젊은 모험가였던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리더십에서 남다른 감동을 받았다.후에 찬드라굽타는 펀자브 지역에서 그리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반란군을 이끌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헬라스 제국 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의 군대를 크게
2. 굶주린 모정 천제를 끝낸 대왕 사유는 일단 동부욕살 하대곤에 대한 의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의 아들 해평의 무술 실력을 높이 평가해, 앞으로 고구려를 이끌어갈 장재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더구나 말을 1천 두 이상 기르는 종재 하대용과 여러 차례 담화를 주고받으면서, 그가 말을 기르는 것이 앞으로 고구려 군사력을 키우는데 보탬이 되게 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적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군사들을 이끌고 하가촌을 떠나 다시 국내성으로 가면서 대왕은 하대용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하 대인, 왕자가 이곳에 머
1. 불안의 씨앗 숲속 별채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었다. 아미(蛾眉) 같은 초승달이 소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나무 그늘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별채의 들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을 안으로 삼켰다.별채는 환하게 황촉불이 켜져 있었고, 그 문 앞에 근위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봄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저울질할 때마다 초승달이 수줍은 듯 얼굴을 갸웃거렸다.잠시 후 별채의 문이 열리며 호롱불을 앞세운 여인이 나타났다. 소나무 그늘에 숨은 사내는 그 걸음걸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