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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싹트는 연정-4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06 11:35
  • 수정 2021.12.2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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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상서로운 새(瑞鳥), 삼실총(三室塚) 제2실 널방 남쪽 천장

 

4. 야심

 

고구려 동부의 본성인 책성으로 돌아온 이후, 동부욕살 하대곤의 심사는 사뭇 뒤틀려 있었다. 종제 하대용이 그렇게 표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대용은 딸 연화를 왕자 이련과 맺어주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괘씸한 놈!’

하대곤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대용은 연화의 배필로 해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식으로 혼사가 오간 적은 없지만, 하대곤과 구두로 그런 이야기를 나눈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평이나 연화도 어른들 사이에 은연중에 그런 말이 오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대용이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하대곤은 조카딸이지만 연화를 특별히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문뿐만 아니라 무술도 뛰어난 연화는 한 마디로 여장부였다. 더구나 마음 씀씀이도 후덕하고 매사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 국모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해평의 배필로 적격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해평은 왕제 무의 아들이므로 엄연히 고구려 왕실의 피를 이어받았다. 이것은 아직 해평 자신에게도 밝히지 않은, 오직 하대곤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만약 왕제 무가 연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미천왕의 시신을 모시고 국내성으로 돌아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 백성들은 무력한 대왕 사유보다 문무를 겸비한 왕제 무를 적극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대왕 사유를 제거하면 왕제 무는 백성들의 지지 속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의 아들 해평은 이미 태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난 전렵 행사 전의 마상훈련에서 보았지만 왕자 이련은 여러 가지로 문약해보였다. 말 경주를 할 때 낙마한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혈통으로 보나 문무를 겸비한 실력으로 보나 이련보다 해평이 당연히 연화의 배필로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련은 연화보다 네 살 아래였고, 해평은 연화보다 세 살 위였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연화의 신랑감으로는 해평이 적격자였다.

“여봐라! 해평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요즘 통 안 보이는구나.”

하대곤은 옆에 시립해 있는 호위무사 두충(杜忠)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요즘 무술 연습에만 몰두하고 계십니다. 전보다 말도 없어졌고, 얼굴에 수심만 가득한 것을 보면 뭔가 남다른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충이 대답했다.

“가서 데려와라!”

“네!”

두충이 오른 팔을 들어 군례를 올리고 급히 물러갔다.

사실상 하대곤은 대왕 사유의 전렵 행사에 참여했다 돌아온 이후 혼자서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분명 왕제 무는 서신에서 해평이 고구려 왕손이란 사실을 절대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하대곤의 생각은 달았다. 고구려가 연나라의 위협을 견디지 못해 태후와 왕후가 13년간 볼모생활을 하는 굴욕을 당한 데다, 그 이후에도 비굴하게 금은보화를 보내 조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왕 사유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이라고 그는 여기고 있었다.

고구려가 강해지려면 강력한 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 하대곤의 생각이었다. 그 적임자가 왕제 무였는데, 그는 의를 지켜 형제간에 피를 흘릴 수 없다하여 부여로 피신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낳은 아들 해평조차 하대곤에게 보낸 후 도를 닦는다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오직 해평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대곤은 해평의 성격을 잘 알았다. 부친을 닮아 무술이 뛰어나고, 배짱 또한 두둑하여 군주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해평을 고구려의 강력한 대왕으로 키우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잠시 후 두충이 해평을 데리고 왔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하대곤은 두충에게 턱짓으로 명했다.

두충이 물러가고 나자 하대곤은 해평을 데리고 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버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해평은 하대곤의 굳어 있는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런데 하대곤이 갑자기 해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절 받으십시오.”

하대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나서 번쩍 고개를 든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니, 아버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소자가 무슨 잘못이라도…….”

해평 역시 하대곤 앞에 무릎을 꿇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이 아니옵고…….”   

“자식 앞에서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아버님, 편히 앉으십시오.”

갑자기 양아버지 하대곤이 존대를 붙이자, 해평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대곤은 여전히 낮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해평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부터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소장을 그냥 장군이라 불러주십시오.”

“……네에?”

“주군께선 귀하신 분, 고구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는 왕손이시옵니다. 주군의 아버님은 바로 지금 고구려 대왕 사유의 친동생이시며, 연나라 대군을 벌벌 떨게 한 용장이셨습니다.”

하대곤은 눈물을 닦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하대곤은, 왕제 무에 관한 이야기를 해평에게 들려주었다. 연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에서부터, 모용황의 군대가 미천왕의 시신 파헤쳐 가고 태후와 왕후까지 볼모로 삼은 이야기를 한달음에 털어놓았다. 다음해에 왕제 무가 연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받은 후 고구려 국경에서 홀연히 사라진 이야기까지 했을 때, 해평은 고개를 꺾으며 흐느꼈다.

“아아, 아버님……!”

그런 해평을 보고 하대곤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군의 부친이신 무 왕제께서는 연나라 모용황과 대면했을 때도 당당하셨습니다. 볼모가 된 태후와 왕후를 모시고 가겠다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나 모용황은 무 왕제가 고구려에 있는 한 태후와 왕후를 귀국시킬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만큼 모용황은 무 왕제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지요. 무 왕제께서 고구려 국경에서 미천왕의 시신을 소장에게 맡기고 사라진 것은, 바로 태후와 왕후를 볼모의 몸에서 풀려나 다시 고구려로 돌아오시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태후와 왕후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대곤이 여기까지 말하자 해평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버님, 이제 편히 앉으시지요.”

해평은 그러면서 하대곤의 불끈 쥔 두 주먹을 손으로 감쌌다.

“주군! 소장은 이제 아버님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두 분의 아버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소자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아버님이고, 길러주신 분도 아버님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전처럼 아버님으로 모시게 허락해주십시오.”

해평은 하대곤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어찌 왕손이신데 감히…….”

“아닙니다. 당분간은 소자에게 왕손이니 주군이니 하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이 고구려 왕실에 들어가면 소자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어느 시기가 될 때까지는 절대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님은 소자를 전처럼 아들로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해평은 그러더니 하대곤을 끌어안았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당분간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하대곤도 팔을 벌려 해평의 든든한 등을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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