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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순풍과 역풍-1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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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1. 화농성 종기

 

국내성은 출정을 며칠 앞두고 어떤 미묘한 긴장감과 믿기지 않는 호승심으로 들떠 있었다. 이미 지방의 동서남북 각 부에서 보낸 군사와 말갈족을 합하여 1만, 전국에서 모병하여 훈련시킨 군사와 국내성 중앙군인 경군과 숙위군에서 차출한 병력 1만 5천 등 도합 2만 5천의 병력이었다. 또한 원정 도중 평양성에서 5천의 군사를 차출하여 총 3만의 대군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 중 전국에서 모병한 장정들은 전쟁 경험이 없어 두려움에 떨었고, 변방을 지키던 군사들과 말갈병은 사기가 충천하여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출진 명령이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왕 사유는 이미 원정군의 사열을 통하여 병사들의 사기도 점검해둔 마당이었다. 사기충천한 고구려 병사들을 볼 때 자신감을 갖게 될 정도로 크게 고무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도 없지 않아 있었다. 백제와의 전쟁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많았던 데다, 농사철에 군사를 모병하면서 민심이 흉흉하다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차 고구려의 대들보가 되리라 믿었던 태자 구부가 백제와의 전쟁은 국력만 소모할 뿐이라며 ‘전쟁불가론’을 주장한 데 대해 괘씸한 마음을 삭일 수가 없었다. 국상 명림수부를 비롯하여 그를 추종하는 일부 대신들의 입김에 태자가 놀아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이끌어갈 태자가 그렇게 귀가 얇아서야 어찌 나라 정사를 올바로 펼 수 있을 것인가,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청룡, 집안 통구 사신총(集安通溝四神塚) 널방 동벽

 

모름지기 군주는 대신들의 입방아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왕 사유의 생각이었다. 그런 일관된 생각을 견지해 왔기에 대신들 사이에서는 고집불통의 대왕이란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번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태가 구부가 편전으로 들어와 예를 올렸다.

“폐하! 이번 전투에 소자를 보내주십시오.”

전혀 생각지 못했던 태자의 말에 대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당겼다.

“무어라?”

“이번 전투에는 소자가 폐하를 대신해 원정군을 이끌겠나이다.”

태자는 이미 결심이 굳게 선 듯, 자못 그 표정이 진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전에는 전쟁불가론을 펴더니 이젠 출전을 하겠다?”

“네, 폐하께서는 이곳 국내성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소자를 보내주시옵소서.”

태자는 무릎걸음으로 한 발짝 대왕 앞에 더 다가섰다.

“그것은 아니 될 말. 짐이 이번에 백제를 치겠다는 것은 이태 전 치양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설욕전의 의미가 강하다. 태자가 그것을 대신한다면 남들이 비웃을 일 아니겠는가? 이번 원정에서 반드시 백제군을 짓밟아 치양 전투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 것이니, 더 이상 짐을 욕보이게 하지 말라.”

“폐하께선 이제 연로하십니다. 소자가 나가야 마땅하나이다.”

태자 구부는 몸이 장대하고 기상도 늠름하였다. 그 패기 하나만으로도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짐은 아직 늙지 않았다. 태자가 염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다만 걱정하지 말거라.”       

대왕 사유의 나이 이미 이순(耳順)을 넘겼으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그 고집만큼은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남다른 생각으로 이번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이태 전 치양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패할 때 적의 대장군은 백제 태자 수(須)였다. 백제왕 구도 아니고 그의 아들과의 싸움에서 대패했다는 것은 수치였다. 따라서 대왕 사유는 그 보복전에 태자 구부를 내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태자는 종전까지 전쟁불가론을 주장하던 입장이었으므로, 그가 대장군으로 전쟁에 임했을 때 고구려군의 사기가 그만큼 위축될 가능성이 높았다.

“태자는 국내성을 지켜야 한다. 백제와의 전투를 틈타 혹시 변방을 침입하는 세력들이 있을지 모르니 경계에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대왕이 막 말을 마치고 태자를 물러가라 이를 참인데, 때마침 왕자 이련이 편전으로 들어섰다.

“폐하! 이번 전투에 소자도 참여시켜 주시옵소서.”

왕자 이련은 열세 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어른처럼 장대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를 넘어서지 못한 상태였다. 대왕은 태자에 이어 왕자까지 출전하겠다고 나서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오늘 너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전장에 나가겠다고 하니,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냐?”

“약속한 바 없사옵니다. 이번에 폐하를 따라 전장에 나가 전투경험을 쌓고 싶사옵니다.”

왕자 이련은 내심 부왕의 신임을 얻고 싶었다. 하가촌에서 국내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대왕에게 넌지시 연화와의 혼사 이야기를 꺼낸 바 있었다. 그때 대왕은 아직 혼사를 논하기엔 어린나이가 아니냐는 말로 달래며, 백제와의 전투가 끝난 다음 생각해보자고 확답을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그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러나 전투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너는 태자인 형과 함께 국내성을 굳건히 지키도록 하라.”

대왕은 모처럼 용안 가득 미소를 떠올리며 두 아들을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소자의 출전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번 전투에서 소자가 폐하를 지켜드리겠나이다. 형님, 아니 태자 전하께서도 제가 출전할 수 있도록 폐하께 청원을 드려 주십시오.”

이련은 대왕과 태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간절한 눈으로 호소했다.

“폐하! 마땅히 이번 전투에 소자가 나가야 하옵니다만, 허락을 아니해주시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오나 아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오니, 이는 허락하심이 어떠하올는지요? 소자나 아우나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청원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소자도 열 살 때 연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지 않사옵니까? 당시 연나라 모용황에게 볼모로 잡힐까 두려움도 컸지만, 그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큰 도움이 되고 있사옵니다. 당시 열 살밖에 안 되었사오나, 소자는 나라가 강해야 이웃나라가 함부로 넘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사옵니다.”

태자 구부의 말에 대왕은 눈을 감았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 수모의 뼈아픈 기억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대왕 사유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에 연나라 모용황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변경인 신성으로 쳐들어왔다. 고구려가 화해를 요청하자, 그 대신에 모용황은 왕자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다음 해에 당시 겨우 열 살이었던 왕자 구부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안타까워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왕자를 오래도록 볼모로 붙잡아두면 어쩌나 했으나 다행히도 모용황은 고구려로 하여금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는 해가 지나고 나서도 연나라에 조공을 하지 않았으며, 그 2년 후에는 오히려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연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자 모용황은 연나라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태후와 왕후는 물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헤쳐 연나라로 회군했던 것이다.

“흐음…….”

대왕 사유는 신음을 깨문 채 한동안 침묵했다. 눈을 꾹 감고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는 번뇌의 도가니에 다름 아니었다. 번뇌가 쌓이고 쌓여 가슴에 큰 응어리가 생겼다. 울화는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모용황에게 당한 굴욕을 씻어내기도 전에 연나라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 반면에 이번에는 백제가 세력을 키워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했다. 더 이상 세력을 키우기 전에 싹부터 잘라내야, 예전에 연나라 모용황에게 당한 것과 같은 치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온통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초조감은 마음속에서 전쟁의 불씨로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이태 전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 느꼈던 초조감은 더욱 팽배하게 부풀어 올라 곧 터지기 직전의 화농성 종기와도 같았다. 가시에 찔리거나 칼에 베었을 때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바짝 독이 올라 곧 터지려는 종기의 근질거림이었다. 종기는 터뜨려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고름을 빼내야 근치될 수 있었다.

지금 대왕 사유는 화농성 종기를 앓고 있는 환자였다. 그는 그 종기를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치료하려고 작정한 마당이었다. 종기는 앓고 있는 환자만이 그 아픔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옆에서 아무리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로선 당사자가 아니므로 뼛속까지 스미는 듯한 통증을 느낄 수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대왕으로선 종기의 근질거리는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참견하고 건드려대자 울화만 더욱 증폭되었다.

“폐하! 소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왕자 이련이 다시 읍소했다.

“정 그러하다면 전장에 나가서도 너는 짐의 곁을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마침내 대왕은 왕자 이련의 출전을 허락했다. 아직 어린나이라 미더운 생각이 들지 않았으므로, 그저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고 전투나 관전케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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