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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7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1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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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충정

 

하대곤의 예상대로 국내성 사자가 책성을 다녀갔다. 고구려 변방을 지키는 각 성에도 동시에 사자들이 대왕의 군대 동원령을 가지고 떠났다고 했다. 한 달 안에 가려 뽑은 군사를 국내성으로 보내라는 어명이었다. 군대의 규모는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이는 각 성에서 어떤 성의를 보이는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대곤은 고민 끝에 보병 1천의 군사를 보내기로 했다. 기병도 보내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해평을 기마대장으로 삼아야 하는데 보병 전체를 지휘하는 두충까지 두 장수가 빠지게 되면 책성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래서 보병만 보내기로 했으며, 그 대장으로는 이미 두충이 자원한 바 있으므로 누구를 대장으로 뽑아 보낼 것인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두충이 이번 출정의 군대를 총지휘하는 대장으로 정해졌다고 하자, 해평이 하대곤에게 급히 달려와 간청했다.

“이번에 소자도 출정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대곤은 충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해평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 동안 책성의 개마무사를 훈련시키는데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대곤은 이번 출정에서 해평을 제외시키기로 했다. 전쟁 경험을 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결코 고구려가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다. 대왕 사유의 성급함 때문에 벌이는 전쟁이므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패하기 십상인 전쟁에 해평을 내보내 처음 치르는 전투 경험에서부터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전쟁도 경험이 필요하니 출정하고 싶은 네 마음을 충분히 알겠다만, 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너는 나하고 이 책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보다 우적 사부와는 잘 지내느냐?”

하대곤은 지금 해평이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할 때라고 생각했다.

“잘 모시고 있사옵니다.”

“그래 요즘 사부께선 네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대곤의 물음에 해평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칼을 피하는 법과 군사들을 후퇴시키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흐음, 너는 사부의 가르침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하대곤이 빙긋이 웃었다.

“모름지기 칼은 베고 찌르라고 있는 것이고, 전쟁은 공격을 가해 이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피하고 후퇴하는 법만 배우고 있으니 도무지 신바람이 나질 않습니다.”

“허허, 우적 사부께서 제대로 가르치고 있군! 네가 아직 미숙해서 그 깊은 뜻을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내 몸을 방어하지 않고, 내 군사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훌륭한 장수라 할 수 없다. 칼을 피하는 법은 내 몸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힘을 빼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연후에 상대가 지쳐 공격에 허를 보일 때 단칼에 제압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칼을 쓰는 비결이지. 또한 후퇴하는 법은 적을 교란시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우선 자기 부하들 목숨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이 강할 때는 후퇴하는 것이 당연하다. 설사 적이 약해 보이더라도 짐짓 후퇴를 가장하여 상대로 하여금 자만심을 키워 공격을 유도케 한 연후, 절적한 기회에 기습적으로 쳐서 이기는 방법도 있다. 칼을 피하고, 후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겠느냐?”

“네, 아버님! 소자도 막연하게나마 그런 뜻이 숨어 있다는 걸 느끼고는 있었사오나, 방금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확연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럼, 어서 가서 사부에게 열심히 무술을 익히도록 하여라.”

“네, 아버님!”

 

청룡, 강서대묘(江西大墓) 널방 동벽

 

해평은 하대곤에게 군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나가다가 두충을 들라고 하여라.”

막 문을 열고 나가는 해평의 등 뒤에 대고 하대곤이 말했다.

하대곤은 대사자 우신이 보낸 우적이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었다.

우신이 애써 우적을 책성에 묶어두려는 것은 따로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우적을 통해 전한 서찰에서 책성에 필요한 인재로 적재적소에 써달라는 부탁을 한 것을 보고, 그는 우신의 밀사이면서 동시에 동부의 동향을 파악하는 첩자 역할도 맡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하대곤은 은밀히 우적을 경계하면서, 그의 행동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는 동지이면서 적일 수도 있었다.     

잠시 후 두충이 나타났다.

“출정 준비는 잘 돼 가느냐?”

하대곤이 물었다.

“네, 사흘 후면 곧 출정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말씀하신대로 보명 1천을 뽑아 부대를 편성해놓았습니다. 무기와 깃발도 준비했고, 군량미도 충분히 확보해 놓았습니다.”

두충의 보고를 들으며 하대곤은 마음 한 곳이 허전해 옴을 느꼈다. 두충은 충직한 호위무사였고, 멀리 떠나보내기에 아까운 수하였다.

“일전에 자네는 큰 장사꾼이 되겠다고 했지?”

하대곤은 그 동안 마음속으로만 곰곰이 생각해두었던 바를 말할 참이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그 석정인가 하는 괴승에게는 ‘조충’이라는 가명을 댔다고? 우하하하! 위장을 하려면 제대로 이름을 바꾸어야지. 두충이나 조충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이번 전쟁터에 가면 자넨 ‘두충’을 그곳에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네. 내가 앞으로 대상이 될 자네 이름을 정해주지. ‘조환(趙換)’으로 하게. 성은 자네가 ‘조’로 정했으니 그렇게 쓰되, 이름은 바꿀 ‘환(換)’ 자로 하도록. 장사란 게 서로 물건을 주고받고 것 아니겠나?”

하대곤은 그러면서 정면으로 두충을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셨사옵니까?”

두충은 자못 감동을 한 눈치였다.

“나하고 약속하세. 자넨 이번 전쟁터에서 죽어야 하네. 두충이란 인간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자넨 조환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세.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왜 그리해야 하는지 도무지……?”

두충은 하대곤을 빤히 쳐다보며 두 눈을 껌뻑거렸다.

“조환으로 새롭게 태어나 대사자 어른 댁으로 들어가게. 전쟁이 끝날 때쯤 대사자 어른에게 사람을 보내, 자네가 찾아갈 것이니 받아달라는 서찰을 전하게 할 것이네. 아마도 대사자 어른이 자넬 거상으로 키워줄 걸세.”

하대곤은 대사자 우신이 해평의 사부로 우적을 보냈듯이, 그 답례로 두충을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서로의 비밀 거래에 있어 대등관계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어느 한쪽이 기울 경우 사태가 엉뚱한 쪽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염려한 전략이었다.     

“장군의 깊은 뜻, 이제야 알겠사옵니다.”

두충이 고개를 숙이자, 하대곤은 그의 귀 가까이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해평의 사부 우적이 대사자의 우신의 밀정이라는 건 알겠지? 이곳 책성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고되고 있을 것이네. 자네 역시 그러한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 있음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믿네.”

“바위에 글자를 새기듯,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겠사옵니다.”

두충은 고개를 들어 하대곤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다가 얼른 머리를 다른 데로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울컥, 하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걸 삼키려고 하는 순간, 그 뭉클한 감정의 덩어리가 눈물로 변해 떨어졌던 것이다.

두충 역시 책성으로 오기 전까지는 떠돌이 무사였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에 우연히 하대곤을 만나 호위무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당시 태백산으로 사냥을 갔던 하대곤은 절벽 밑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충을 발견했다. 깊은 산속을 헤매던 끝에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다친 상태였다. 맹수들에게 물어뜯기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응급처치 후 정신이 깨어났을 때 물어보니, 두충은 태백산 자락 어디선가 도를 닦고 있는 무술 도인을 찾아가던 도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기절해 버린 것이라고 했다.

하대곤은 그때 두충을 책성으로 데려왔고, 곁에 두고 살펴보니 무술이 매우 뛰어나 호위무사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두충이 찾아다닌 무술 도인이 바로 하가촌에서 장정들을 가르치는 을두미였다는 사실을 그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러한 사실을 듣고 나서 하대곤은 만약 두충이 당시 을두미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면, 그 인재를 하대용에게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그는 두충이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다치는 바람에 자신이 인재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네, 울고 있나?”

하대곤의 목소리도 어느 새 젖어들었다.

“아니옵니다. 너무 감동한 나머지…….”

“헛헛헛! 그걸 가지고 감동이라니? 내가 자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거 같구먼. 그래서 마음속으로 무척 미안해하고 있네.”

“무슨 말씀을요? 10여 년간 거두어주신 것만으로도, 더구나 장군님 곁을 지키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소장은 큰 광영이었사옵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임무를 맡기시는 것은 그만큼 장군께서 소장을 믿으신다는 증거, 사나이지만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사옵니다. 눈물을 보여 죄송합니다.”

두충은 두툼한 손등으로 눈물을 슬쩍 훔쳤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하대곤이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하기는?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네를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네. 하대용이 내 종제지만 저처럼 마음을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바꾸는 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그렇지 않아. 그동안 내게 목숨을 바쳐 일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자네에게 전쟁터에 나가 죽으라고 명령하고 있어. 죽어서 다시 태어나라고. 정말 어려운 일이지. 두충이 조환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우리 오랜만에 술이나 나누세. 술상을 준비하라 이르게.”

두충은 곧 거실에서 물러갔다.

혼자 남게 된 하대곤은 감회에 젖어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두충의 충정이 자못 그의 심금까지 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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