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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순풍과 역풍-2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26 14:12
  • 수정 2022.01.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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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연꽃 벽화, 환인현 미창구 장군묘(桓仁縣米倉溝將軍墓)(모형)

2. 바람의 순리

 

동부의 군사 1천을 이끌고 국내성에 당도한 두충은 일단 성의 동문 밖에 군막을 쳤다. 그리고 그곳 들판에서 군사들을 조련시키던 어느 날 밤, 그는 갑옷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옆에는 말구종으로 따라온 사기가 있었다. 사기는 기마부대 소속으로 기마대장 해평의 수하가 되었으나, 그가 스스로 두충에게 찾아와 간절히 이번 출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바람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두충을 보고 사기가 물었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성내에 좀 다녀올 일이 있다.”

“그러면 소인도 따라가겠습니다요. 주인님 가시는 길에 말구종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지요. 말구종은 주인님의 그림자인데.”

사기를 그러면서 헤헤거리고 웃었다. 그런 사기를 언뜻 바라보던 두충이 말했다.

“허긴 네 말이 맞구나. 나는 이제부터 초피 장사꾼이니 너는 말구종 노릇을 해야 하느니라. 얼른 옷부터 갈아입어라.”

두충과 사기가 국내성으로 들어간 것은 설핏하게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해가 서쪽 산등성이로 다가갈수록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면서 그 취기를 푸른 들녘에 물감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국내성에는 출정을 앞두고 거리 곳곳에 창칼을 든 병사들이 군집해 있었고, 말을 탄 일군의 무리들이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도 간간히 목격되었다.

시장의 장터마당은 일몰 직전에 이미 파장이었다. 전쟁 분위기가 감돌면서 장사가 잘 안 되니 일찌감치 짐을 싸서 숙소로 돌아가는 장사꾼들만 더러 보일 뿐이었다. 장사꾼들마저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아예 집에 틀어박혀 문밖출입조차 삼가고 있어, 사람들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리는 텅 비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막 판을 걷고 있는 서역 대상에게 초피 두 장을 팔아 은화를 챙긴 두충은 그것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소매 속에 간직한 채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

사기가 슬며시 두충의 눈치를 살피며 바짝 그 뒤를 따라붙었다.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라. 가보면 안다.”

두충은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눈길만큼은 부지런히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두루 살폈다. 그는 주막에 들러 술병도 하나 챙겨, 사기에게 건넸다.

사기는 술병을 받아 바랑에 넣고 부지런히 두충의 뒤를 따랐다. 여러 번 대로와 골목을 돌고 돌아 두충이 발길을 멈춘 곳은 국내성 감옥이었다. 이젠 골목이 캄캄해 등불에 의지하지 않고는 길을 걷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감옥을 지키던 두 명의 옥리가 두충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옥사장을 불러주게.”

두충은 옥리 한 사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옥리는 그저 영문을 몰라 큰 눈만 꿈적거렸다.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옥리의 요령부득이 답답하기만 하다는 듯, 두충은 끌끌 혀를 찼다. 그러더니 얼른 소매 속의 가죽주머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 옥리에게 건네주며, 다시 그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이 사람아, 눈치가 있어야지.”

두충은 눈까지 찔끔거리며 옥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잠시 기다리슈.”

얼른 은화를 챙긴 옥리는 동료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지껄인 후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갔다.

잠시 후 옥사장이 나타나자, 두충은 허리를 깊이 한 번 꺾은 후 아무도 모르게 은화가 든 가죽주머니를 통째로 쥐어주었다.

“왜 이러시오?”

가죽주머니를 슬쩍 허리춤으로 숨긴 옥사장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옥에 갇힌 석정 스님을 좀 만나게 해주시오.”

옥사장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인 두충은, 이제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상대를 향해 눈을 찡끗했다. 뇌물을 먹였으니, 칼자루는 이쪽에서 쥐고 있는 셈이라고 내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아, 그 괴승은 곤란한데……. 대왕 폐하의 엄명이 계셔서.”

옥사장 역시 작은 소리로 두충에게 귀띔을 하며 무척이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가죽주머니에 든 은화를 다시 내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빤한 수작을 알고 있는 두충이 혀를 차며 말했다.

“허헛, 참! 난 초피 장사꾼이오.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망설이시오? 얘야, 그것 이리 다오.”

두충이 손짓을 하자, 사기는 벌써 눈치를 채고 얼른 바랑 안에서 술병을 꺼냈다.

“아니, 이러면?”

“허허, 출출할 때 한 잔씩들 드시오."

두충은 그러면서 마음 느긋하게 뒷짐을 지었다.

결국 옥사장은 은화가 든 주머니와 술 한 병에 마음을 바꾸었다.

“따라오시오.”

결심을 굳힌 옥사장이 앞장을 섰다.

“너는 예서 잠시 기다리거라.”

두충은 사기에게 한 마디 던지고 옥사장의 뒤를 따라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곧 두충은 옥사장의 안내를 받아 석정을 가둔 곳으로 갔다. 다른 곳에는 죄인들이 여러 명씩 들어 있는데, 석정이 갇힌 곳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면벽을 한 채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석정 스님, 내가 왔소!”

두충이 석정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초피 장사꾼이구먼!”

“아니,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시오?”

“나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다오.”

석정이 천천히 돌아앉아 무릎걸음으로 나무 창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허튼수작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빨리 얘기 끝내고 나오시오.”

옥사장은 그러더니 서둘러 옥에서 나갔다. 겉으로는 엄포를 주고 있지만, 기실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었다.

“석정 스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요?”

“드디어 고구려에도 광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군!”

석정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광야의 바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고구려 구중궁궐에 들어와 있으니 하는 말이외다.”

갈수록 석정의 말은 안개 속을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일부러 안개를 피워 올려 자신의 말을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님,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시오. 변죽만 울리지 말고.”

“허어, 이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야 어디 큰 장사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소?”

“스님이 내게 큰 장사꾼 시켜줄 요량이라도 있으신 모양이구려.”

“내 말만 잘 들으면 그 정도쯤이야 뭐 어려울 게 있겠소?”

석정은 그러면서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나저러나 이번 백제와 일전을 치른 후에 대왕 폐하께서 스님을 극락으로 보낼 모양이오.”

두충은 너무도 태연한 석정의 태도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도 하여 넌지시 떠보았다.

“허허, 대왕 폐하가 뭐 부처라도 된단 말이오? 고맙게도 이 돌중을 극락에 보내주겠다니…….”

석정은 큰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껄껄대고 웃었다.

“남들이 듣겠소. 그래 따로 자구책은 마련해 놓으신 게 있으시오?”

두충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생명이란 하늘이 준 것. 그러므로 하늘에 맡겨야지 따로 무슨 잔꾀를 낸단 말이오? 큰 나무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가지를 기울이고, 바람이 멈추면 그때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이오. 어줍지 않게 뻗대는 나무는 바람과 맞서려다 가지가 뎅겅 부러지고 말지. 이 돌중은 오래도록 광야의 바람을 견뎌온 몸. 그래서 그 바람을 몰고 고구려로 돌아왔으니, 역풍에 맞서다 가지가 부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저 바람의 순리에 따를 뿐이지.”

석정의 말에 두충은 그때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방금 전에 석정이 ‘광야의 바람’ 어쩌고 한 것이 바로 그 자신을 지칭한 것임을 두충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역풍’이란 대왕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었다.

“역풍이 너무 세면 큰 나무도 뿌리까지 뽑힐 수 있습니다.”

“허허, 너무 염려할 필요 없소이다. 역풍은 잠시 잠깐……. 이렇게 구중궁궐의 안전한 곳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무얼 걱정하겠소? 전장에 나가는 군사들이 걱정이지.”

“스님께선 이번 전쟁을 어찌 보십니까?”

두충은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보기로 했다.

“그 역시 바람의 순리에 맡길 수밖에. 역풍은 그 속에 성냄과 아집을 숨기고 있는데, 그래서 한 번 억지를 부리면 거세게 몰아치나 꺾어질 때는 속수무책! 그걸 조심해야 하오. 역풍 다음에 오는 고요, 그것이 무서운 일이지.”

석정의 말은 어떤 암시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를 알아듣지 못할 두충 또한 아니었다.

“역풍 다음의 고요라니요? 이번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하고 백성이 흉년과 풍토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요? 전쟁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이야기 했을 뿐.”

“역풍이 불 때는 그 자리를 지키기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두충은 파옥을 해서라도 석정을 구해주고 싶었다.

“아니 될 말씀. 이곳이 가장 안전하오.”

석정은 바로 알아들었다.

“전쟁 후의 일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은 길게 끌지 않을 것이오. 역풍은 잠시 잠깐, 그 뒤에 오는 고요가 무섭다고 하지 않았소? 누가 이기든 지든 그 뒤에 오는 흉흉한 민심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이번 전쟁은 승패에 관계없이 민심을 잃는 큰 손실을 입을 것이니, 결국 이겨도 지는 격이 아니겠소? 민심이 바로 순풍이외다.”

이 같은 석정의 말을 듣고 나서야 두충은 적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구려가 전쟁에 이겨도 민심 때문에 대왕 사유는 석정 자신을 처단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두충은 그 깊은 뜻을 간파했으므로 더 이상 석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스님, 몸조리나 잘 하시오.”

두충은 석정을 뒤로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그는 옥사장에게 따로 마련해두었던 금붙이를 주고, 그것으로 가끔 넉넉하게 석정에게 사식을 넣어 달하고 부탁했다.

감옥을 벗어나자 사기가 두충에게 물었다.

“석정 스님은 이번 전쟁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습디까?”

“고구려는 이기든 지든 큰 손해를 볼 거라고 그러네. 민심이 흉흉하니, 그럴 수밖에…….”

두충은 말끝에 긴 한숨을 빼어 물었다.

그림자처럼 두충의 뒤를 따르는 사기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그저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때 두충은 앞장서서 걸어갔기 때문에 사기의 그런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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