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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싹트는 연정-5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1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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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5. 애증

 

하대곤으로부터 친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해평은 고구려 대왕 사유와 왕자 이련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가촌에서 처음 대왕을 알현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때 분명 대왕 사유는 해평을 보고 낯이 많이 익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대왕은 왕제 무를 쏙 빼어 닮은 해평을 보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왕은 해평에게 대부가 되고, 왕자 이련은 사촌동생이 되는 셈이었다.

‘너는 고구려의 피를 이어받았다. 장차 고구려를 위해 네 한 몸 바칠 수 있겠느냐?’

해평은 동부욕살 하대곤을 만나기 위해 떠나기 며칠 전, 친부가 당부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생생한 기억은 마치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실제 육성으로 들려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밤중이었고, 하늘에는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불룩한 배를 내밀고 빠져나와 대지를 환하게 비추었다.

“아버님!”

해평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아, 아버님! 그때 왜 소자에게 고구려 왕손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해평은 원망이라도 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깜짝 놀라 해평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하대곤이 서 있었다.   

“앗, 아버님!”

“지금 왕손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을…….”

낮에 해평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친부 무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하대곤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새 전처럼 양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님! 아직도 제가 왕손이란 사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생부께선 제게 전혀 그런 말씀을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구려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이곳 책성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왕손이란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하겠습니다.”

해평은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화 때문이겠지?”

“……네?”

“그리고 왕자 이련 때문이겠지?”

하대곤은 해평의 아픈 가슴을 찔렀다.

“……아버님! 그런 애송이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긴다 생각하니 몹시 화가 납니다. 같은 고구려 왕손이 아닙니까?”

해평은 너무 화가 치밀어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나도 네 마음 잘 안다. 허나, 지금 네 마음이 아픈 것은 네가 그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왕손이면서도 당장은 네가 왕자 이련만도 못한 위치에 처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번에 이미 나도 마음속으로는 종제인 하대용과 아주 인연을 끊었다. 하가촌에서 떠나기 전날 하대용과 연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종제의 마음은 완전히 왕자 이련에게 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연화와 맺어줄 생각인 모양이다. 당장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이유는 단 하나 이련이 대왕 사유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지금 당장은 참는 길밖에 없다. 연화가 여장부답고 후덕하여 너의 배필로 점찍어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한다.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하대곤은 말끝에 한숨을 빼어 물었다.

“사랑이란 남녀의 일이온데, 어찌 소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양보를 하란 말씀입니까?”

해평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문득 왕자 이련에 대한 앙심만큼이나 새삼 연화에 대해서도 애증의 감정이 솟구쳐 올라 그를 완전히 지배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권력의 힘이다. 너도 왕손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신분을 밝히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현재 나는 대왕 사유의 힘에 눌리고, 너는 왕자 이련보다 여건이 좋지 못하다.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대곤은 그러면서 해평의 안색을 살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억울합니다. 먼저 혼담이 오간 것은 소자인데, 갑자기 나타난 애송이 이련에게…….”

해평은 뒷말을 생략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힘을 길러야 한다. 현재 대왕 사유는 이미 늙었고, 사후에는 태자 구부가 왕위를 잇겠지. 구부에게는 아들이 없다. 현재로서는 태자비가 아닌 다른 여인을 취한다 해도 아들을 낳기 힘들어. 태자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거든. 그렇다면 구부 다음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왕자 이련밖에 없다. 내 생각에 이련은 왕으로서의 자질(資質)이 부족하다. 대왕 사유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을 꼭 빼어 닮았어. 지금 고구려는 서쪽으로 연나라 다음으로 일어선 전진의 부견이 있고, 남쪽으로는 발해에서 황해에 이르는 해상권까지 장악한 백제가 버티고 있다.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장담할 수가 없어. 미천대왕 때처럼 강력한 왕권이 들어서야만 고구려에게 희망이 보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는 알겠지?”

하대곤은 뚫어질 듯 해평의 눈을 주시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쳤다. 그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어둠 속으로 묻혔다.

“왜 대답이 없느냐?”

하대곤이 다그쳤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련에게 가기 전에 먼저 연화를 빼앗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평은 이를 악물었다.

“여자는 잊어라. 지금은 우리에게 힘이 없다고 하지 않더냐? 그보다도 나라를 경영하려면 문무를 겸비한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바쁘다. 경서는 물론이고, 병법서를 많이 보아야 하느니라. 강력한 군주는 전술전략에서도 그 어느 장군보다 뛰어나야만 해. 그래야 장군들이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고 따른다.”

“네!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해평은 하대곤에게 고개를 숙였다.

“밤이 깊었다. 들어가 자거라.”

하대곤이 먼저 해평을 뒤로 하고 침소로 향했다.

그러나 해평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불룩하게 배를 내민 달이 그의 그러한 모습을 뻔뻔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잊어라…….”

해평은 한숨을 푹 쉬면서 방금 전에 하대곤이 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되뇌어보았다.

‘오라버니와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에요. 제발 연화를 잊어주세요.’

어디선가 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해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허공을 쳐다보다가 배가 불룩한 달과 눈이 마주쳤다. 연화가 그 달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해평에겐 그것이 마치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솟소쩍, 소쩍!

소쩍새가 울었다.

“저 소쩍새까지도 나를 깔보는군!”

해평은 부쩍 자존심이 상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빛이 은빛가루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세계
무용총(舞踊塚) 널방 천장 중심(모형),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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