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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6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1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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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6. 밀사

 

해는 서산의 등고선 끝자락에 올라앉아 곧 그 너머로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운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노을빛은 초록의 들판을 검붉은 빛깔로 수놓았고, 그 노을을 등지고 말을 탄 검은 그림자가 책성의 성문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말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 위의 사내가 크게 서두르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주변 산세와 잘 어울려 제법 높다랗게 지붕을 이고 있는 성문은 자못 중량감이 느껴졌다. 좌우로 이어진 석성의 높이는 두세 길은 좋이 되어 보여, 들판 멀리서도 성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문 앞에 당도한 사내는 말에서 천천히 내렸다. 근위병들이 양쪽에서 창으로 가로막자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 같은 막대로 슬쩍 쳐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도 두 병사는 손에서 창을 놓쳤다. 얼핏 보기에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칼인지 지팡이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 그것이 무기가 되기도 하고 지팡이 구실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완함(阮咸)을 연주하는 선인, 삼실총(三室塚) 제2실 널방 동남쪽 천장고임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한 병사가 얼떨결에 땅에 떨어진 창을 집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사내는 발길로 병사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병사는 맥없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꼴이 되었다.

그러자 다른 병사가 얼른 땅에서 창을 집어 들어 사내에게 겨누며 잔뜩 경계 자세를 취했다.

“수상한 놈이로군! 대체 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보면 모르겠느냐? 지나가는 나그네다. 끼니때가 되어 밥이나 한 술 얻어먹을까 해서 찾아왔느니라.”

사내는 당당하게 서서 버티었다.

병사는 아래위로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땅에 넘어졌던 병사도 얼른 창을 들고 일어나 사내를 향해 겨누었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로구나!”

두 병사는 사내의 남루한 행색을 살피며 엄포를 주었으나, 지팡이에게 당한 것도 있고 상대의 정체를 모르기도 해서 짐짓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때 성 남쪽 모퉁이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는 해평과 그의 졸개들이었다. 그들은 곧 성문 앞에 당도했다.

“무슨 일이냐?”

해평은 근위병에게 물으면서, 눈길을 사내 쪽에 주고 있었다.

“대장님! 이 자가 정체도 밝히지 않으면서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근위병사 하나가 자세를 꼿꼿이 세우며 보고했다.

“뉘시오?”

해평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내를 주시했다.

“그렇게 묻는 그대는 누구인가?”

사내는 주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니,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반말지거리냐? 우리 동부의 기마대장님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해평의 뒤에 둘러섰던 말을 탄 졸개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기마대장이면 네놈들 대장이지 나에게도 대장은 아니지 않느냐?”

“무엇이?”

해평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의 오른손이 어깨에 멘 칼자루로 가다 말았다.

“제법 칼도 쓸 줄 아는 모양이군!”

사내는 히죽 웃었다.

“한 번 겨뤄보자는 건가?”

해평이 팽팽하게 당겨진 눈길로 상대를 주시했다.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받자면 인사를 제대로 해야 쓰겠지? 이곳 문간 인심이 사나운 걸 보니 공짜로 밥을 줄 것 같지는 않고! 벌써 해가 꼴딱 넘어가려고 하니, 배도 슬슬 고파오는구나!”

사내는 서편 산 능선에 눈썹처럼 걸린 해를 쳐다보았다.

“그냥은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다는 건가?”

해평은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았다. 그러나 사내는 그저 지팡이를 짚은 채 먼산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이때 해평의 졸개들도 말에서 내려 주위를 넓게 둘러쌌다.

책성의 성문 앞에서 해평의 검과 사내의 지팡이가 일전을 벌이는 순간이었다. 둘러선 졸개들도 잔뜩 긴장해 있었고, 저녁노을은 더욱 붉은 빛으로 땅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먼저 해평의 칼이 사내를 향해 뻗어나간 듯했다. 그런데 사내는 크게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지팡이로 간단히 칼을 쳐냈다.

아니 쳐낸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해평은 어처구니없게도 칼을 떨어뜨려버리고 말았다. 칼과 지팡이가 순간적으로 부딪는 순간, 번개가 치는 듯 해평의 손에 찌르르한 떨림이 오면서 한 순간에 힘이 빠져 달아난 기분이었다.

‘아차, 칼을 놓치다니?’

해평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사내의 지팡이가 그의 목덜미로 날아왔다.

“어이쿠!”

엉겁결에 해평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 꼴이 되었다.

“젊은이, 먼저 인사부터 해야 예의가 아니가?”

사내는 다시 지팡이를 짚은, 바로 전의 태연한 자세로 돌아가 말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대결을 보기 위해 둘러섰던 졸개들이 일제히 칼을 빼어들었다.

“잠깐! 너희들은 칼을 거두어라!”

해평이 졸개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친구로군! 그러나 너희들이 떼로 덤벼도 상대해 줄 용의가 있다.”

사내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때 해평이 땅바닥에 떨어진 칼을 거두며 무릎을 꿇었다.

“뉘시온지? 몰라 뵙고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해평은 예의를 갖춘 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남루한 옷을 입었으나 그 얼굴은 귀골의 티가 흘렀다. 허공을 보는 듯한 눈빛도 그 안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대곤 장군께서 양아들을 두었다더니, 자네가 해평인가?”

사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해평은 움찔했다.

“네, 그러하옵니다. 아버님을 전부터 아시옵니까?”

“아닐세. 잘은 모르네. 그저 소문으로 들었을 뿐!”

사내는 손을 뻗어 해평을 일어서게 했다.

“멀리서 아버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지나가던 길에 밥이나 한 술 얻어먹을까 해서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참일세. 이만 하면 밥값은 한 셈이지?”

사내는 껄껄대고 웃었다. 웃는 입술이 한쪽으로 치우쳐 올라가면서 이마 쪽에 서너 가닥의 주름이 잡혔다. 세월의 흔적이 그 얼굴 속에 녹아 있었다.

“제가 아버님께 안내를 하겠습니다.”

해평은 곧 사내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하대곤이 거처하는 큰 저택의 거실에 두 사람이 나타나자, 그곳에는 두충이 대기하고 있었다.

“멀리서 오신 손님입니다. 아버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해평이 두충에게 청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해평은 곧 하대곤이 거처하는 내실로 찾아갔다. 하대곤은 방금 전까지 거실에 있다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내실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누구라더냐?”

해평이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보고하자, 뭔가 느낌이 온 듯 하대곤은 긴장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해평은 성문 밖에서 방금 겪은 일들을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보통 인물이 아닌 듯하옵니다.”

“그래?”

“행색은 남루하나 귀티가 흐르고, 무술 솜씨도 만만치 않사옵니다.”

해평의 말에 하대곤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보자.”

하대곤은 해평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나가면서 대사자 우신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대곤이 거실로 들어서자 두충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하대곤 장군이십니다.”

거실에서 서성거리던 사내가 하대곤을 보고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하대곤도 얼떨결에 예의를 갖추었다.

“하대곤이라 하오.”

“전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은 바 있사옵니다. 우적이라 하옵니다.”

우적이 천천히 고개를 들 때 하대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우적은 오른손 중지를 입술로 가져가며 은근슬쩍 두충과 해평을 일별했다.

‘흠, 주위를 물려달라는 얘기로군’

하대곤은 곧 눈치로 알아듣고는, 턱짓으로 두충과 해평을 잠시 물러가 있게 했다.

두충과 해평이 물러가고 나자 하대곤은 자리에 정좌하고 우적이 앉기를 기다렸다.

“오갈 데 없는 떠돌이 신세, 하대곤 장군께서 거두어주신다면 신명을 바쳐 모시겠나이다.”

우적은 하대곤 앞에 무릎부터 꿇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무사! 방금 전에 아들 해평에게서 무술이 뛰어나다는 소릴 들었소. 편히 앉으시오.”

하대곤이 애써 웃으며 말했으나, 우적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어떤 어른이 써주신 소개장이옵니다.”

우적은 서찰을 하대곤에게 건넸다.

서찰을 다 읽고 난 하대곤은 깊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말했다. 역시 짐작한 대로 전에 하대곤이 보낸 서찰에 대한 답서로 대사자 우신이 보낸 서찰이었는데, 앞으로 서로 긴밀 관계를 유지하되 밀사로 간 우적을 동부의 무술사범으로 써달라는 부탁도 글의 말미에 적혀 있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변방이라 누추하오만, 선생께서 기거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겠소이다. 서찰을 보고 알았지만, 선생께서 학문이 깊으시고 무술에 남다른 기량을 갖고 계시다니 우리 해평의 사부가 되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거두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광영이옵니다. 해평의 사부, 기꺼이 맡겠사옵니다.”

우적은 하대곤의 청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사실상 그것은 그 자신이 자원한 일이기도 했다.

“여봐라! 먼 길을 오셨으니 우적 선생을 편히 모시도록 하라!”

하대곤이 소리치자 대기하고 있던 두충과 해평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럼 물러가옵니다.”

우적이 일어섰다. 두충이 그의 안내를 맡으려고 하자, 하대곤이 다시 해평을 쳐다보며 지시했다.

“해평아, 이제부터 이 분께선 너의 사부가 되시었다. 네가 직접 모시도록 하여라.”

해평과 우적이 나가자, 하대곤이 손짓으로 두충을 가까이 오게 했다.

“대사자 어른이 보내신…….”

두충이 짐작하는 바가 있어 먼저 소리를 낮춰 물으려고 하자, 하대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사자 우신이 보낸 밀사가 맞네. 그러나 아직 해평에게는 비밀로 해두게나. 헌데 우리가 추진하려는 계획은 잠정적으로 보류할 수밖에 없게 된 모양일세. 지금 국내성에선 파란이 일어나고 있어. 자네가 큰 보물이라고 말한 그 석정이라는 괴승이 국내성 감옥에 갇혀 있다네.”

“네에? 감옥에 갇히다니요?”

두충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네가 주선한대로 국상께서 그 자를 구부 태자와 만나게 해준 모양일세. 석정은 태자를 만나자마자 전쟁불가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네. 그러자 태자도 같은 마음이라 이에 동조하여 곧바로 대왕을 만나 지금 백제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주청했던 모양이야. 한창 전쟁준비로 광분해 있던 대왕이 태자의 말인들 쉽게 받아들이려 하겠나? 대왕은 당장 태자에게 전쟁불가론을 펴도록 조종하는 자가 누구인지 비밀리에 알아보게 했고, 곧 그 자가 괴승 석정이란 사실이 밝혀진 모양일세. 전부터 저자거리에서 그 괴승이 전쟁불가론과 태자 구부에 대하여 떠벌리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 석정은 바로 그날로 잡혀 대왕의 친국을 받았고, 결국 전진의 부견이 보낸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네. 대왕은 출정 전에 피를 보게 할 수 없다며, 백제를 치고 나서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면 곧 석정을 처결하겠다고 했다더군.”

하대곤은 대사자 우신이 보낸 서찰의 내용을 그대로 두충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면 큰 일이 아니옵니까? 결국 대왕은 전쟁을 일으킬 모양이로군요?”

이때부터 다른 한쪽으로 두충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국내성의 사자가 들이닥칠 것일세. 이태 전 백제를 칠 때는 군사를 보내지 않고 버텼네만, 이번에는 출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어. 지난 봄 천제 때 대왕이 군사 1천을 이끌고 온 것은 우리 동부를 길들이기 위한 은근한 겁박이었네. 하니, 이번에 군사를 내지 않았다간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로세.”

하대곤은 걱정부터 앞선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기마대장은 이곳 책성을 지켜야 할 것이옵니다. 소장이 군사를 이끌고 국내성으로 가겠습니다. 기병 1백 기와 군사 5백만 주십시오.”

두충은 따로 생각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네, 이번에 국내성에 입성하면 몰래 석정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뭔가 방도가 있을 것이옵니다.”

두충의 말에 하대곤은 적이 안심이 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국내성에서 군사 요청이 올 경우 어쩔 수 없이 해평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고맙네! 허나 아직 두고 봐야 할 일. 일단 물러가 있게.”

하대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실에서 저녁 상차림으로 분주한 걸 보고 왔기 때문이다. 대사자 우신이 보낸 밀사를 대하고 나자, 그는 갑자기 식욕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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