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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3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0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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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엿듣는 자

 

두충과 석정은 금세 의기투합을 이루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사기는 그 곁에 옹색하게 쪼그리고 있다가, 지루함을 참지 못한 듯 평상 귀퉁이에 앉아 끄덕끄덕 졸았다. 그는 가끔 꿈속에서 잠꼬대를 하는 듯 웅얼거리기까지 했지만, 사실은 총기 있게 귀를 바짝 세운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래 스님은 언제부터 불자가 되셨소?”

두충이 무릎을 바싹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허허 헛! 내가 원래 역마살이 있어서, 열대여섯 살부터 집에 붙어 있질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저 중원을 거쳐 서역까지 두루 섭렵을 했지요. 장안을 거쳐 서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먼데,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그 열사의 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더이다. 사막 가운데는 토굴들이 많은데, 그 진흙 토굴 속에는 온갖 부처들이 살고 있더란 말이외다.”

“토굴 속에 부처가 살고 있다니? 부처상이 모셔져 있더란 말이지요?”

“진흙으로 빚은 부처도 있고, 생불도 있더이다.”

“생불이라뇨?”

“면벽수도 하는 스님들이지요.”

석정은 그러더니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목울대가 꿀렁거리도록 들이켜고 나서, 소리 나게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수염에 묻은 술 몇 방울을 털어냈다.

 

강서대묘(江西大墓) 널방 천장고임

 

“허면, 스님께서도 그 토굴 속에서 면벽수도를 하셨단 말씀이시오?”

“나야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사막 땅에서 얻어먹으려면 시늉이라도 해야 하니 그곳 생불 흉내를 내봤지요. 그거 간단하외다. 가슴에 두 손을 모은 다음 눈 딱 감고 뭐라 중얼대면 되는 거 아니겠소이까? 거기 생불들을 따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읊어댔더니 밥 주고 재워주고 그러더이다. 거기 동굴에서 천축(天竺: 인도) 출신의 젊은 스님 한 분을 만나 도반이 되었지요.”

“도반이 뭐요?”

“한 스승 밑에서 같이 공부하는 스님들끼리 서로 도반이라 하지요.”

“친구를 만난 셈이군요?”

“말하자면 그렇지요.”

이번에는 두충이 술을 들이켠 후 물었다.

“천축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과는 말이 통하던가요?”

“이심전심! 눈빛을 보고 묻고, 손짓으로 대답하고, 입으로 상대의 흉내를 내다보면 다 통하더이다. 말이란 원래 하늘이 내는 것! 그것이 땅과 기후 조건이 다른 지역에서 소통의 수단으로 쓰이다 보니, 지역마다 달리 표현되고 있을 뿐이지. 홧, 하하핫! 하느님의 말씀은 곧 부처님의 말씀! 그래서 어느 나라 말로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은 다 통하는 법이외다.”

석정은 오랜만에 입이 터진 것처럼 매우 즐거워했다.

“그 토굴이 있는 곳이 도대체 어디요?”

“돈황(敦煌)이라고 하지요. 거기서 소승은 마음먹은 바가 있어 서역으로 가려고 했었지요. 서역을 거쳐 천축 땅을 밟으려고 했던 것이외다. 서역으로 가는 길에는 죽음의 사막이 펼쳐져 있는데, 화염산을 지나다가 그만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소.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돈황입디다. 천축에서 사막을 거쳐 돈황으로 오던 젊은 스님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 것이지요. 그래서 그때 소승의 생명을 구해준 천축의 젊은 스님과 알게 되었지요. 돈황에서 한 해 남짓 더 머무르며 우리는 같은 스승 밑에서 경전을 익혔소. 그래서 천축의 젊은 스님과 도반이 되었던 것이라오.”

“헌데 스님께선 그렇게 세상을 두루 섭렵하다 언제 고구려로 돌아오신 거요?”

두충은 눈빛을 빛내며 은근히 석정의 기색을 살폈다.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소이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땅이지만, 고국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했소이다. 그래서 돌아온 거요.”

“우리 고구려의 평화를 위해서? 스님에겐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듯싶은데…….”

두충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곡절? 흡후, 하하핫! 있지요, 있어! 벌써 30년 가까이 되는 일이로군! 연나라 모용황이 우리 고구려에 쳐들어와 환도성을 점령했지 않소이까? 그때 소승은 부모형제를 모두 잃었소이다. 그러고 나서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소승은 그들에게 포로로 끌려가 숱한 고초를 겪었지요. 노예와도 같은 인간 이하의 노동에 시달렸는데, 축성 작업은 정말이지 지옥이나 다름없더이다. 우리 고구려 유민들 중에선 구르는 돌에 깔려 죽어나가고, 열병에 걸려 쓰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소. 그곳에 더 이상 있다가는 지옥 귀신이 되겠다 싶어 나는 천축으로 도망치려고 서쪽으로 무조건 줄행랑을 놓았지요. 그곳이 전진의 수도 장안이었소. 신분을 감추기 위해선 승려가 되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에 불교에 입문했지요.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 소승은 아귀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결심하였소. 어린 시절에 부모형제를 잃은 그 뼈아픈 기억이 소승으로 하여금 그런 세상을 갈구하게 만든 것이지요. 지옥을 구경했으니 이제 천국을 만들자. 그래서 아직도 중음신(中陰身)처럼 지옥과 천국 사이를 오가며,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조국 고구려를 천국 같은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돌아왔소이다.”

석정의 눈에서는 어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찌하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겠소이까?”

두충은 점점 석정의 말에 취한 듯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얼굴이 불콰해졌지만, 괴승의 말을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사람에게 취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오히려 술이 깨어 정신이 말짱해진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더욱 상대편 가까이로 들이댔다.

“허헛, 헛헛헛! 세상사람 모두가 욕심을 버려야지요. 전쟁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앙갚음도, 보복도 다 욕심이오. 용서할 줄 모르는 증오심, 즉 그것은 인간의 저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은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끝없는 욕망의 덩어리요. 저급한 욕망, 그것은 아주 못된 마구니(魔仇尼)와 다를 바가 없소이다. 지금 대왕은 백제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소. 변방의 군사까지 마구 끌어들이고 있다는 소문이오. 이는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격이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하오.”

“대왕 폐하의 명이 지엄한데, 어찌하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스님!”

두충은 괴승 석정의 말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종이에 물이 스미듯, 그렇게 흠뻑 젖어들었다. 그러니까 종이는 석정이고, 두충은 물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전쟁광이 된 대왕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고구려에서 단 한 사람!”

석정은 그러면서 두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두충의 눈에도 옮겨 붙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불길로 만나 마음과 마음이 동화되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요?”

두충의 마음은 다급했다.

“……구부 태자올시다. 태자는 정중동(靜中動)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 이분이 아니고는 고구려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울 거요.”

그러면서 석정은 조금 느긋해진 태도로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하늘에는 별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내릴 듯 위태롭게 박혀 있었다.

“흐음…….”

두충은 술상에 눈을 박아둔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을 토해냈다.

“나무관세음보살!”

석정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헌데, 스님께선 귀국한 지 한 달밖에 안 된다면서 어찌 그리 국내 사정을 잘 아시오?”

두충의 말에 석정은 다시 상대를 쳐다보았다.

“헛, 허! 등하불명(燈下不明)이 따로 없군! 지금 전진에선 부견이 국력을 키워 장강 북쪽을 장악했고, 이어서 연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소. 소승은 그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왔소이다. 지금 전진은 고구려에 대한 정보도 청동거울을 들여다보듯 환하게 꿰뚫고 있소이다. 연나라 다음은 고구려외다. 그러나 고구려는 진정 그것을 모르고 있소. 서북방의 위협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데, 대왕은 남방의 백제를 치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변경 지역의 군사들까지 동원하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큰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이때 자는 척하다가 정말로 깜빡 잠이 들었던 사기는, 석정에게서 ‘백제’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바짝 긴장을 하며 갑자기 소름이라도 돋은 듯 몸을 옹송그렸다. 여전히 자는 척하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아두기 위해 귀를 곤두세웠다.

“딴은 그렇습니다. 어찌하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허헛, 초피 장사꾼이 꽤나 나라 정사에 관심이 많구려!”

석정의 말에 두충은 마음속으로 움찔했다.

“장사꾼도 고구려 백성 아니겠습니까? 나라에 평화가 와야 물산의 거래도 활발해지고, 장사꾼도 돈을 벌지요. 더구나 서역인들은 우리 초피를 아주 좋아합니다. 오늘 낮에도 가져온 초피를 모두 서역인들에게 팔아치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두충은, 혹시 이 괴승이야말로 전진의 부견이 보낸 밀사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석정의 고구려 정세를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것은 동부욕살 하대곤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백제와 더 이상 전쟁을 벌이는 것은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남방의 신라나 백제와는 선린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북방의 여러 나라들과 대적하여 팽팽한 군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하대곤의 주장이었다.

“앞으로 큰 장사꾼이 되려면 시야를 넓혀야 하오. 초피만 가지고 되겠소? 물목을 다양하게 취급하는 대상이 되도록 하시오. 그 비법을 차차 소승이 알려드리리다.”

“거래를 하자는 말씀 같습니다. 스님께서 대상이 되는 비법을 알려주신다면 저는 무엇을 도와드려야 할는지요?”

두충은 석정이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볼 심산이었다.

“장사꾼이라 역시 거래의 정도를 아시는군! 구부 태자를 알현할 길을 열어주시오.”

석정의 말에 두충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괴승은 어쩌면 정말로 전진의 부견이 보낸 밀사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다는 확신이 마음속에서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사귀어두어서 결코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구부 태자를 만나서 어찌하시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대왕이 백제를 치려는 계획을 중도에 포기하도록 설득시킬 사람은 구부 태자뿐이라고 생각하오. 고구려가 살 길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유지요. 오직 내치에 힘써야 할 때란 말이오.”

“스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지금 백제는 요서 지역을 경영할 정도로 강한 나라가 됐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백제와 싸울 것이 아니라 혈맹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입니다. 고제동맹을 맺어 북방 세력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맞아요. 고제동맹도 시급하고, 화북의 전진과 교섭하는 일도 시일을 다투는 문제올시다. 지금 전진은 강남의 동진(東晉)과 대치하여 고구려를 넘볼 틈이 없지만, 언젠가는 동쪽으로 눈길을 돌릴 것이오. 그러기 전에 우리 고구려는 전진의 부견과 교린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처럼 시급을 다투는 일인데, 그대는 앞으로 소승을 어찌 도와주시겠소?”

석정이 무릎을 당겨 앉았다.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십시다.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두충은 그러면서 껄껄대고 웃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모닥불도 꺼지고, 으슬으슬 한기까지 느껴졌다. 두 사람은 술상을 물리고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새우등처럼 구부리고 잠이 든 척하고 있는 사기를 보고, 두충은 침상에서 일어서며 발길로 그의 허리를 툭 건드렸다.

“여보게 방에 들어가서 자세나. 저녁에는 걸신이 들려 장국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더니 이젠 잠귀신이 들러붙은 모양이로군!”

세 사람은 선술집 주모에게 부탁해 미리 마련해둔 봉놋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선술집 마당으로 별빛이 금싸라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모닥불이 꺼지며 어둠이 짙어지자 하늘의 별들은 더욱 빛났고, 어느새 마당 귀퉁이의 대추나무에 걸린 달이 등불처럼 추녀 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달빛은 이미 뜰을 반 이상 먹어 들어와 한창 마루턱에서 출렁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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