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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싹트는 연정-2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1.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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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하늘세계
무용총(舞踊塚) 널방 천장 중심(모형), 독립기념관

 

2. 굶주린 모정

 

천제를 끝낸 대왕 사유는 일단 동부욕살 하대곤에 대한 의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의 아들 해평의 무술 실력을 높이 평가해, 앞으로 고구려를 이끌어갈 장재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더구나 말을 1천 두 이상 기르는 종재 하대용과 여러 차례 담화를 주고받으면서, 그가 말을 기르는 것이 앞으로 고구려 군사력을 키우는데 보탬이 되게 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적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

군사들을 이끌고 하가촌을 떠나 다시 국내성으로 가면서 대왕은 하대용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하 대인, 왕자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더 치료를 하고 싶다고 하니 잘 부탁하오. 부상당한 다리가 완치되는 대로 궁궐로 보내주시오.”

“폐하, 이를 말씀이오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을두미 선생의 의술이 뛰어난 데다 여기 소인의 여식이 병간호를 잘하니 왕자님께옵서는 곧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하대용은 바로 옆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연화를 가리켰다.

“오, 그래! 연화라고? 짐이 낭자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야 하겠구먼?”

대왕이 연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폐하! 지극정성으로 왕자님을 모시겠나이다.”

연화는 말을 타고 배웅을 나왔기 때문에 무도복 차림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왕자가 쾌차하면 낭자가 무술도 좀 가르쳐주시오. 아직 열세 살 밖에 안 됐으니 여러 가지 부족한 게 많다오.”

이 말을 남기고 대왕은 국내성을 향해 떠났다.

왕자 이련은 대왕 사유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 얻은 아들이었다. 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후가 13년 만에 고구려에 돌아와 낳은 아들이었다. 실로 대왕에게는 귀한 아들이었으므로 내심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국내성으로 향하는 대왕의 군사 행렬을 시야에서 까마득히 멀어질 때까지 언덕 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하대용은 이내 말을 돌려세웠다. 딸 연화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자못 남다른 감개에 젖어 있었다.

대왕의 전렵 행렬이 국내성을 떠나던 날, 공교롭게도 맑았던 하늘로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폭우를 내리게 한 날씨의 변화야말로 어떤 전조(前兆)를 예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그 전날 밤에 꾼 황룡과 흑룡의 꿈이 또한 그랬다. 만약 그날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대왕은 하가촌에 들르지 않고 곧장 태백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는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말 경주에서 왕자 이련이 낙마를 해 다리를 다쳤고, 때마침 뒤미처 달려오던 연화가 발견하고 그를 도와준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는 필시 하늘이 내린 인연이 아닐 수 없다고 하대용은 생각했다.

“연화야, 왕자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말을 연화는 금세 알아들었다. 이미 나이 열일곱의 성숙한 처녀였다.

“매우 영특한 분이시옵니다.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으십니다.”

연화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호오, 그래? 너와 말이 잘 통하더냐?”

“네, 이미 경서를 두루 통달하신 것 같사옵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도 극진하십니다.”

“흠, 네가 왕자님과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구나.”

“왕자님께서 자꾸만 물으시기에 그저 대답만 하였을 뿐이옵니다.”

연화의 붉어진 얼굴을 하대용은 곁눈으로 언뜻 보았다.

하대용은 흡족한 마음으로 한동안 얼굴에 머문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연화가 왕자 이련보다 네 살이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부부가 될 남녀 사이에 여자 쪽이 한두 살 많은 것을 두고 큰 흠이라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여자 쪽의 나이가 좀 든 것을 당연시 여기는 풍토이긴 하나, 네 살 차이라면 조금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하대용은 연화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종형 해대곤의 양자 해평과 맺어줄 생각도 했었다. 해평은 연화보다 세 살이 많았다. 남자가 여자보다 조금 나이 많은 것은 통상적이라 할 수 있는데, 연화 쪽에서 해평을 지극히 싫어하는 눈치여서 혼사 논의를 애써 미적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대곤에게 넌지시 귀띔을 한 일이 있어, 당사자인 해평 자신까지도 양가 사이에 그런 말이 오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대곤이 간밤에 하대용을 불러 해평과 연화의 결혼에 대해 다짐을 받아두려 한 것도 마음의 티끌처럼 껄끄러웠다. 하대곤의 입장에서는 분명 하대용이 연화의 배필로 왕자 이련을 생각해두고 있다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하대용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과 너하고는 네 살 차이가 나지 않더냐? 그래도 말이 잘 통하더란 말이냐?”

“네, 아버님! 왕자님은 어리지 않사옵니다. 여느 어른 못지않은 깊은 학문과 지혜를 겸비하고 있사옵니다.”

“허허허! 네가 아주 왕자님께 반한 모양이구나.”

“어머머, 아버님도!”

연화는 갑자기 말을 세우며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허헛, 이제 네 마음을 충분히 알았느니라. 어서 가자!”

하대용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길을 서둘렀다.

연화도 곧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은근히 가슴이 울렁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 순간, 황홀하고 즐거운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연화는 몸단장을 정성스레 하고, 얼굴에 지분도 엷게 발랐다. 왕자 이련을 병간호하기 위해 곧 별채로 가봐야 했던 것이다.

“낭자를 보니,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오.”

연화가 방으로 들어오자, 왕자 이련이 코를 벌름거리다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온지?”

“어머니는 내가 네 살 때 승하하셨다오. 그런데 오늘 낭자의 몸에서 어머니의 향기가 나는 듯하여…….”

이련은 그리움에 사무친 듯 아련한 눈빛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화의 얼굴 위로 모후의 얼굴이 겹쳤다.

연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고생을 하다 돌아온 태후는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왕후마저도 이련이 네 살 되던 해에 태후를 따라갔다. 부왕은 불과 5년 사이에 태후와 왕후를 모두 떠나보낸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오랫동안 연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심신이 괴로워 마음의 병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이후 부왕이 시시때때로 이를 갈아붙이며 연나라에 대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하던 말을, 이련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 슬픔에 잠겨 있던 이련의 얼굴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연화는 느낌으로 알았다.

“왕자님, 괜찮으시옵니까?”

근심어린 표정의 연화 얼굴이 이련의 눈에 비쳤다. 어느 사이 모후의 얼굴 뒤에 가려졌던 젊고 아름다운 연화가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은 그렇게 한 동안 서로의 눈동자 안에 눈부처로 머물러 있었다.      

“나는 방금 연화 낭자의 얼굴에서 어머니를 보았소.”

이련은 오래도록 모정에 목말라 있었다.

“어머, 소녀의 얼굴이 왕자님을 낳으신 왕후 전하와 닮았단 말씀이오니까?”

연화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바로 그때 누워 있던 이련이 벌떡 일어나면서 느닷없이 연화의 손을 잡았다.

“낭자!”

“이러시면……!”

갑작스러운 일이라 연화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감히 왕자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는 못했다.

“잠시만, 가만히 있어주시오.”

이련은 연화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연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슴이 쿵덕거리고 뛰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쿵덕거리는 소리가 이련에게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런 연화의 두근거리는 젖가슴에 이련은 얼굴을 묻었다.

연화의 얼굴은 이련의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걸쳐졌고, 그녀의 눈은 장지문 사이로 비쳐드는 따사로운 봄 햇살과 마주했다. 장지문에는 햇살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너울대고 있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연화는 두런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떼었다.

“연화 낭자 품이 따뜻하구려!”

이련이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떼며 연화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다리 찜질을 해드려야 하옵니다. 사부님께서 다리를 삔 데는 냉찜질이 효과가 있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추수를 시켜 태백산 골짜기 얼음골 바위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오게 한 것이옵니다. 조금 통증이 심하더라도 참으셔야 하옵니다.”

연화는 가지고 온 어름 그릇 보퉁이를 끌렀다. 곧 어름을 베 보자기에 싸서 이련의 다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지나자 이련의 인상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아아, 아흐!”

“왕자님! 참으세요.”

“저리고, 아리고……, 조금 떼었다 할 수 없겠소?”

“안 됩니다. 다친 부위의 저림이야말로 찜질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이옵니다.”

연화는 이련의 손이 어름을 싼 보자기 위로 가려는 것을 한 손으로 막았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더욱 어름 보자기를 부어오른 다리 위에 고정시켰다.

“허어! 낭자는 우리 어머니보다 더하는군!”

“무엇이 말이옵니까?”

“세 살 때 뛰어가다 무릎을 다친 적이 있었소. 의녀가 와서 다리 상처를 치료하는데, 소독을 한다며 약초를 싸매자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무턱대로 발버둥을 치며 울었지. 그때 어머니가 달려와서는 ‘사내대장부가 그것도 못 참아 우느냐’며 질책을 하시더군. 그러더니 잠시 약초 싸맨 것을 풀고 입으로 손수 호호 상처 부위를 불어주셨소. 지금도 그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구려.”

“그 말씀을 기억하신다니, 모후 생각이 간절하신 모양이군요. 지금 왕자님은 소녀가 아니라 모후께서 어름찜질을 해주신다 생각하고 참으시옵소서.”

연화는 엄살을 부리는 이련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잠시 만났다가 헤어졌다.

“좋은 생각이구려! 낭자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소. 내 그렇게 하리다.”

이련은 정말 모후를 생각하는 듯 자세를 반듯하게 자리 잡고 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더니 그는 어느 사이 깊은 잠에 빠져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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