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들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눈곱이 말라붙어 속눈썹들로 눈을 꿰매 놓은 것 같았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질러서 간신히 눈꺼풀을 벌렸다. 커튼 한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비좁은 방이었다. 일어나고 싶어서 눅눅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젖혔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편두통을 앓았을 때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목이 타고, 아랫입술 안쪽이 쓰라렸다. 개를 쫒기 위해 휘두르던 허리띠가 내 입술을 스친 기억이 났다. 이불 속에서 배를 더듬었다. 여권과 달러가 든 전대는
학교 마당이 파도 위의 갑판처럼 출렁였다. 거기 혼자 위태롭게 서서 춤추듯 비틀거리는 사람은 미쉘인가 했더니 병수 형이었다. 병수 형인가 했더니 미쉘이었다. 병수 형은 1975년 12월에 서울 삼청동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병수 형은 반야라는 하얀 암고양이와 함께 살았었다. 반야는 병수 형의 죽은 애인의 이름이기도 했다. 병수 형은 반야를 마치 애인처럼 끌어안고 다녔지만 나는 반야가 달갑지 않았다. 그 음산한 울음소리는 특히 싫었다. 그때 나는 도봉산 밑에 살았기 때문에 종로통에서 술 마시다 통금에 쫓기면 병수 형 자
광장 건너편 행상들이 좌판을 걷고 있었다. 티베탄 마부들도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쉘은 광장 동쪽 비탈에 있는 공중변소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거기 판자로 지은 싸구려 선술집 서너 채가 나란히 있었다. 다르질링에서 가장 누추하고 좁고 저속한 선술집들이었다. 미쉘이 맨 끝 집의 거적을 들추자 흐린 불빛이 퍼져 나왔다. 불빛 속에서 여자의 조그만 얼굴이 나타났다. “김, 이 숙녀가 바로 내 애인 스바나야. 어서 들어와.” 미쉘은 여자의 목을 왼팔로 감으려했으나 여자는 살짝 빠지며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미쉘이 발정한 곰처
안개가 스멀거리는 문 밖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다음날 오전에 침낭을 찾고 오후에는 시킴으로 떠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미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못났고, 나처럼 슬프고, 나처럼 술에 탐닉하는 인간인 미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 둘은 와이프 이야기가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둘 다 멍하니 안개 속에 투영된 각자의 쓰라린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나 보았다. 희뿌연 안개를 몰고 들어온 한 떼의 술꾼들이 앉을 자리를 찾았다
약을 삼키고 나서 그가 말했다. “참, 네 이름이 뭐였지? 나이와 직업도 말해 줬던가?”“내 이름은 김이다. 나이와 직업은 네가 알아 맞혀 봐라.”“김, 이제 기억난다. 김이었지. 그리고 ...... 나이는...... 글쎄 ....... 동양인 나이는 알기가 쉽지 않다.” 미쉘은 새삼스럽게 나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뭐라고 말해야 둘 다 즐거울 것인가를 궁리해냈다. “직업군인이었어. 1971년에는 베트남에 있었지.”“1971년에 베트남이라……. 그럼 네가 몇 살이란 말이냐?”“1950년 생. 올해 마흔 다섯
다시 짙은 운무. 무작정 걸었다. 물러 터진 토마토가 굴러다니는 질척질척하고 좁은 채소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비썩 마른 노동자들이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길모퉁이가 나왔다. 낯익은 장소였다. 트레킹 직전에 몇 번 들렸던 선술집이 그 모퉁이 맞은편에 보였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사내의 담뱃불이 빨갛게 피다가 졌다. 눈이 쓰리도록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담배를 피워야하는 주정뱅이들, 오줌 지린내 같은 땀 냄새와 쥐가 썩는 것 같은 겨드랑이 냄새, 그리고 주인 여자가 입은 양털 옷에서 나는 비린내도 역겹지만 앉을 자리도 없었다.
넋 놓고 걸었나 보았다. 눈앞에 페마가 서서 웃고 있었다. 페마는 묻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친구들이 가게에 있다’고 알려 주고 나서 길 아래로 내려갔다. 길 위로 멀리 페마네 뚱바집이 보였다. 내 발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마네 가게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호가니 병을 깨트렸던 소년이 페마처럼 ‘안녕하세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불과 며칠 동안 들었던 우리말 인사를 억양까지 비슷하게 익혔다. 이미 와 있던 취생도 몽사도 번갈아 ‘안녕하세요’를 했다. 그 두 사람이 소년에게 ‘안녕하세요’라는 한국 문장의 발음과 억양을 가르쳤음이
보트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길게 누워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흘러 내린 눈물은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보트는 흐르지 않는 듯 흘렀다. 여자는 느린 노래를 힘없이 부르고 있었다. 슬픔이 극에 달한 사람이, 슬픔에 눌려 죽어가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음성이었다. 어쩌면 흐느낌이 노래로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깨면서 방금 꾼 꿈을 세세히 기록해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볼펜을 들자마자
홀리 축제의 소동을 피해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고 났을 때 양철배와 일기장이 눈에 뜨였다. 트레킹을 떠나면서 알리멘트에 맡겼다가 찾아온 짐 속에 있었던 장난감들이 언제 책상에 올라갔는지 생각이 안 났다. 어쨌든 혼자 조용히 할 일을 찾았다. 캘커타에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다르질링에 도착하여 어느 날 불현듯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불과 보름 쯤 전의 기록인데도 아주 오래 된 것 같았다. 다르질링의 운무 속에서 전생처럼 떠오른 기억의 일면들은 그렇다 치고, 쓰다만 유서 같은 편지 한 토막은 남의 글 같아서 여러
이튿날도 하늘이 맑았다.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광장에서 로티와 밀크 티로 아침을 때웠고, 세탁소에 들러 세탁물을 찾았으며, 내의를 비롯한 의복을 모두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더러워진 옷들은 다시 세탁소로 가져가 맡기면서 침낭을 찾을 때 같이 찾겠다고 했다. 침낭은 빠르면 다음날, 늦어도 그 다음날 오전에는 도착할 거라고 했다. 만약 오전에 찾는다면 오후에 바로 갱톡으로 떠나고 싶었다. 깨끗한 옷으로 산뜻하게 차려 입고 나온 자는 볼 일 다 봤다고 금방 방구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광장을 거닐다가, 벤치에서 햇볕도 쬐다가, 서점에
마리아 호텔 옥상의 남조선 술꾼 중에서 극소수에게만 밝혔던 그의 전직은 동해상사 김 전무였다. 동해상사는 속초에 있었던 특수부대의 위장 명칭이며, 전무는 현장 요원들을 지휘하는 초급 지휘관의 직위라고 했다. 18세에 가출하여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피를 팔러 갔다가 모병관의 감언이설에 속아 입대했는데 3년 만에 처음 휴가 나오면서 입어본 군복에는 하사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그 이전까지 그는 군인 아닌 군인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2년 전에 전역 신청했는데, 1년 후인 작년에야 통과되었다. 군대생활 20여 년 만에 상사로 전역한
이미 말했던가? 캘커타에서 지냈던 1월은 취생몽사의 나날이었다고? 자세한 얘기는 안 했던 것 같다. 날마다 호텔 마리아의 옥상에서 아침까지 마셨다는 얘기는 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여자의 방 화장실에 따라 들어갔던 얘기는 안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나는 그가 된다. 비겁하지만 그가 되지 않고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일어서려는 몸짓을 하다가 주저앉곤 했다. 일어서지를 못했던 것이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그들 혹은 그녀들은 낄낄낄 웃기만 했다. 모두 만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
몽사는 43세. 여행이 직업이라고 했다. 주로 오지나 절경을 찾아다니면서 찍고 써서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프리랜서였다. 그는 절경보다 오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들로부터 너 때문에 오지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국내 취재를 포기했다. 대신 취생과 함께 인도, 네팔, 파키스탄, 티베트 등의 히말라야 기슭을 뒤지고 다닌 지 만 2년이 되었다고 했다. 2년 동안 해마다 6개 월 정도는 여행하며 살았으며 이번에도 6개월 일정으로 출국했다고 했다. 몽사가 달변이라면 취생은 말을 아꼈다. 친절하고 명랑한 성품인 듯 했지만 매우 조
애틋한 새소리에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눈 뜨면 바로 일어나 걷던 수개월 동안의 버릇이 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다. 아직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에 이르렀을 때 태권도 도복을 입고 맨발로 달리는 소대 규모의 군인들을 보았다. 트레킹 전에는 못 본 풍경이었다. 사원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에 자리 잡고 줄지어 앉아 구걸하는 걸인들도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오직 운무만 보면서 운무 속을 산책했기 때문에 미처 못 봤을 것이다. 사원이 있는 야산을 우회하는 도로를 걷다가 긴 의자와 철봉이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쪽, 그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일에 차질을 빚는다. 시킴 입경 허가증이 나오는 데는 1주일 쯤 걸린다고 들었는데 막상 수속을 해 보니 절차가 번거롭긴 해도 몇 시간 만에 허가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오후에 바로 시킴으로 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목을 잡은 것은 침낭이었다. 빨래는 날씨만 좋으면 저녁에라도 찾을 수 있지만 침낭은 최소한 사흘은 걸린다고 했다. 드라이클리닝은 그 세탁소에서 하는 게 아니라 전문 업소에 의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르질링을 떠나고 싶어서 허가증을 손에 쥐자마자 세탁소에 가보니 침낭은 이미 전문 업
다르질링은 여행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예상한 그대로 알리멘트에는 빈 방이 없었다. 유스호스텔에는 있겠지 싶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티브이타워 인근에서 숙소를 찾으러 다녔다. 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 방이 하나 비어 있었다. 방 다섯 개가 잇달아 있는 아래층 맨 끝 방이었다. 한쪽 콧방울에 금싸라기 장신구를 붙인 몽골계 여주인이 방문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놓고 문 옆으로 비켜섰다. 직접 열고 들어가 보라는 뜻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놓인 나무 침대 위에는 솜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고 침대 밑에는 값싼 카펫을 깔아 놓았다. 통로 쪽으로 낸
셀파 호텔의 주방 메뉴는 훌륭했다. 모모(만두)와 툭바(국물국수)와 차오민(볶은국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장 맛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먹자마자 힘이 날 정도로 훌륭했다. 다르질링의 어떤 식당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별미였다. 도착해서 한숨 자고 난 후에 먹었던 툭바는 낭아(검은 물소)의 살덩어리를 뼈 채로 삶은 육수에 거친 밀가루 국수를 말고 수육 몇 점과 고소를 얹었으며 우리의 산초 비슷한 향신료를 살짝 뿌렸다. 밤에 먹었던 모모는 낭아의 생고기를 고소와 함께 다져서 속을 채웠다. 다음날 아침에 먹은 차오민은 유채 기름
마을 어귀가 보였다. 운무 속에서 나타난 마을은 이승 같기도 하고 저승 같기도 했다. 드문드문 사람들도 나타났다. 쟁기 비슷한 농기구를 수선하는 젊은 남자, 자느라고 목이 꺾인 애를 업고서 뜨개질 하는 여자, 기도 바퀴를 돌리며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가는 노인. 제각기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불쑥 나타난 털북숭이 개조차 나그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 유계에 발을 딛지 않았나 싶어서 오소소 소름이 돋을 때,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과연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을 꾸다가 깼다. 무슨 꿈이었을까? 부엉새처럼 생긴 여자의 커다란 두 눈만 잔상처럼 남았다. 펨 도마에게 뇌까린 거짓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날이 밝으면 펨 도마를 대면할 일이 두려웠다. 펨 도마의 아리땁고 순진한 얼굴이 떠오르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눅눅한 침낭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산장의 출입문을 살그머니 당겼다. 뎅그렁 뎅그렁, 출입문에 매단 쇠 방울이 몇 번 흔들렸다. 운무 자욱한 마당에는 간밤에 나를 방에 데려다 주었을 늙은 남자가 향연(香煙)이 뭉클뭉
취하면, 취한지도 모르고 취한 기이한 상태가 되면, 처절하거나 비통한 이야기를 꺼내어 과장하고 각색하는 자가 거기 있었다. 창작한 대사를 도취 상태로 읊는 배우가 거기 있었다. 상대의 관심을 끌어내고, 자신에게 몰입하게 하고, 동정과 위로를 얻는 자가 거기 있었다. 그는 붉은 술을 마시면서 펨 도마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섰다고 펨 도마에게 말하고 있었다. 딸은 펨 도마 또래이며 펨 도마와 많이 닮았다고도 했다. 기독교 계통의 봉사단 일원으로 석달 동안 네팔에 체류하면서 임무를 마친 딸은 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