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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20 ] 환청

김홍성
  • 입력 2020.07.12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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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속에서 물살 흐르는 소리가 귀에 시렸다. 어린이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의 음성도 도란도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귀신들이 내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들리는, 오직 폭음으로 황폐해진 자에게만 들리는 환청이기도 했다.

ⓒ김홍성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을 꾸다가 깼다. 무슨 꿈이었을까? 부엉새처럼 생긴 여자의 커다란 두 눈만 잔상처럼 남았다. 펨 도마에게 뇌까린 거짓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날이 밝으면 펨 도마를 대면할 일이 두려웠다. 펨 도마의 아리땁고 순진한 얼굴이 떠오르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눅눅한 침낭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산장의 출입문을 살그머니 당겼다. 뎅그렁 뎅그렁, 출입문에 매단 쇠 방울이 몇 번 흔들렸다. 운무 자욱한 마당에는 간밤에 나를 방에 데려다 주었을 늙은 남자가 향연(香煙)이 뭉클뭉클 피어나는 향로를 흔들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펨 도마의 아버지였다. 간밤에 펨 도마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합장을 해 보였다.

 

타시델레 …….
평화가 충만하기를 빈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타시델레 …….
나도 합장을 해 보인 후, 첫차를 타야겠기에 일찍 나선다고 둘러댔다.
첫차를 타기는 이미 늦었고 다음 차까지는 시간이 많으니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펨 도마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세 줄의 긴 주름살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나는 향로를 들고 염불하면서 나그네를 배웅하였다. 옴마니밧메훔 옴마니밧메훔 옴마니밧메훔 ……. 그의 염불은 아주 긴 한숨 같기도 했다.

 

출렁다리를 건너자 사위가 운무에 휩싸여 버렸다. 출렁다리 건너편은 물론 출렁다리 밑을 흐르는 실리콜라의 물살도 보이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물살 소리가 귀에 시렸다. 어린이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의 음성도 도란도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귀신들이 내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들리는, 오직 폭음으로 황폐해진 자에게만 들리는 환청이기도 했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운무 속에서 환청에 시달리며 걷는 동안 부엉새처럼 생긴 여자의 커다란 두 눈이 다시 떠올랐다. 누구였을까, 누구였을까, 그 눈은 누구의 눈이었을까? 나는 운무 속을 걸었고 눈을 감아도 보이는 어떤 눈이 한동안 어른거렸다. 어찌 보면 놀란 눈이고, 어찌 보면 안심하는 눈이었으며, 어찌 보면 분노한 눈이었다.

 

운무 속에서 전날 만났던 보리수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여전히 우리나라 서낭당 나무 같은 모습이었다. 멀리 떠난 자식이나 낭군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 혹은 삼지창과 방울채를 든 무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그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배낭을 등에 진 채로 털썩 주저앉아서 실리콜라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해 보았지만 짙은 운무로 인해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낮닭 우는 소리가 꿈결에선 듯 들렸고, 어린아이 칭얼대는 소리가 환청인 듯 또렷이 들리기도 했다. 얼마나 거기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배낭에 기대앉은 채 잠들었고 꿈을 꾸었던 듯하다. 식은 땀인지 운무인지 모를 습기에 푹 젖은 채 배낭을 메고 일어서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래도 걸을 수는 있었기에 길을 따라 운무를 헤치며 걸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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