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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3 ] 미쉘

김홍성
  • 입력 2020.07.2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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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설까 하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다고 손짓하는 사내가 있었다. 몇 번 봤으며, 한 번은 합석하여 통성명한 기억이 나는 사내였다. 미쉘이라는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김홍성

 

다시 짙은 운무. 무작정 걸었다. 물러 터진 토마토가 굴러다니는 질척질척하고 좁은 채소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비썩 마른 노동자들이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길모퉁이가 나왔다. 낯익은 장소였다. 트레킹 직전에 몇 번 들렸던 선술집이 그 모퉁이 맞은편에 보였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사내의 담뱃불이 빨갛게 피다가 졌다. 눈이 쓰리도록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담배를 피워야하는 주정뱅이들, 오줌 지린내 같은 땀 냄새와 쥐가 썩는 것 같은 겨드랑이 냄새, 그리고 주인 여자가 입은 양털 옷에서 나는 비린내도 역겹지만 앉을 자리도 없었다.

 

돌아설까 하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다고 손짓하는 사내가 있었다. 몇 번 봤으며, 한 번은 합석하여 통성명한 기억이 나는 사내였다. 미쉘이라는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지독한 운무다.”

악수를 청하자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마누라가 의자를 던졌다. 그걸 막다가 다쳤다. 몹시 아프다. 뼈가 부러졌는지도 모르겠다.”

술 마시면 안 좋을 텐데.”

하지만 너무 아파. 진통제만으로는 효과가 없어.”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약병을 꺼내 보였다.

이제 서너 알 밖에 안 남았어.”

진통제와 술을 같이 먹으면 심장에 무리를 준다.”

걱정 마라. 난 칵테일 브러드다. 특별한 인간이지.”

칵테일 브러드라니?”

전에 말했잖아. 내 혈관에는 티베탄의 피와 유럽인의 피가 섞여 흐른다고.”

 

미쉘은 술에 찌들어 망가지긴 했지만 잘난 사내였다. 자세히 보니 체형이나 얼굴 윤곽이 영화배우 록 허드슨을 닮았다. 그는 노란 액체가 찰랑이는 비닐 팩 모서리를 담뱃불로 지져 조그만 구멍을 뚫고는 유리로 된 맥주 컵에 따랐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 넣고 나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국 친구 넌 뭘 마시겠냐?”

그게 뭔지 모르지만 너와 같은 걸로 하겠다.”

 

좋은 생각이다...... 헬로 매덤, 여기 이거 한 봉지 더 줘요....... 이건 말이 소주지 공업용 에틸알코올에 가깝다. 45도짜리야. 락시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락시에는 농약을 타지만 이건 이 자체가 농약에 버금가는 독성이 있거든. 두어 팩만 마셔도 헬리콥터가 뜨는 거야. 너무 떠서 내일 아침엔 골치가 좀 아프겠지만.......”

 

빈 컵에 비닐 팩을 우겨 넣어 들고 온 주모는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묻는다.

이 술값은 누가 내는 거지?”

미쉘이 자기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낸다.”

아냐, 내 술은 내가 낸다. 넌 네 꺼만 내.”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미쉘 같은 술꾼들을 많이 겪어보았다. 그들은 자기가 술값을 낼 것처럼 떠벌리며 기분을 내다가 결국은 무책임하게 취해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사내와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 놓고 마시는 것이 현명하다. 나 자신을 너무 풀어지지 않게 단속하는 효과도 있다.

 

나는 비닐 팩 끝을 이빨로 찢었다. 일부러 송곳니를 보여서 여차하면 잔인한 사내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 마누라를 위해 건배하자.”

그래 마누라를 위해서. 그리고 내 손을 위해서.”

 

술잔을 입에 대자 이마가 지끈할 정도로 역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나는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는데 미쉘은 목울대를 몇 번 꿀꺽 이는가 싶더니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찡그렸다.

 

많이 아파?”

염려 마라. 곧 괜찮아질 꺼다. 진통제를 한 알만 더 먹으면.”

 

미쉘은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낀 채 왼손만으로 약병 뚜껑을 열었다. 어느새 탁자에 놓인 빨간색 알약을 집어먹고는 플라스틱 물통을 쳐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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