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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1 ] 전신전화국

김홍성
  • 입력 2020.07.23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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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개시 시간인 10시가 되었는데도 공무원들은 서류 수납 창구를 두툼한 장부로 막아놓고서 엉성한 전기난로 곁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보트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길게 누워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흘러 내린 눈물은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보트는 흐르지 않는 듯 흘렀다.    

 

여자는 느린 노래를 힘없이 부르고 있었다. 슬픔이 극에 달한 사람이, 슬픔에 눌려 죽어가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음성이었다. 어쩌면 흐느낌이 노래로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깨면서 방금 꾼 꿈을 세세히 기록해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볼펜을 들자마자 꿈은 달아나고 있었다.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 얼굴은 내가 자는 동안 머리맡에 있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뒷모습을 보이며 방에서 빠져 나가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전화를 해 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
 

전신 전화국電信 電話局은 티브이 타워에서 시장으로 가는 비탈길 오른쪽 계단 위에 있었다. 주정부 건물이라 워낙 우중충하기도 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폭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부를 쇠창살로 차단해 놓아서 살벌한 느낌마저 들었다.

 

업무 개시 시간인 10시가 되었는데도 공무원들은 서류 수납 창구를 두툼한 장부로 막아놓고서 엉성한 전기난로 곁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가운 나무 의자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쇠창살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자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때가 생각났다.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버틴 끝에 일착으로 접수 장부에 등록을 마칠 수 있었지만 기다린 지 1시간이 넘도록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내 뒤에 줄을 섰던 사람들 중에는 벌써 전화를 마치고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창구 직원에게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고 항의했지만 기다리라는 짧은 대답뿐이었다.

 

지루한 시간이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잠깐 졸다 깨보니 좁은 민원실은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열어놓은 현관으로 들어오는 짙은 운무가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고 있었다.

 

운무는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양털 재킷을 적시며 역한 개 비린내를 풍겼다. 참기 어려운 비린내였다. 소변이 마려웠다. 하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화가 연결될까봐 그냥 눌러 앉아 있었다.

 

전화가 연결된 것은 소변보러 열 번 갔다 와도 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받지 않는 전화라는 녹음이 우리말과 영어로 번갈아 흘러 나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짜증을 내면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전신 전화국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한걸음 씩 내려설 때마다 땅속으로 쑥 꺼지는 듯 했다. 잠시 선 채로 버티고 있을 때 운무 속에서 칸첸중가가 나타났다. 청룡 백룡 같은 구름 띠를 거느린 웅장한 자태였다. 거대한 섬처럼, 유라시아 대륙의 한 모퉁이처럼, 환영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이내 사라졌다. 다르질링 섬 전체가 다시 짙은 운무 속에 푹 잠긴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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