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믐달 윤 한 로가시 끝밤새도록 맺힌이슬 한 방울뾰족한 가시도 저렇게 우는구나나이 먹고 추레하니나 이제야 보이네푸르스름한 아침 그믐달 눈 뜨네시작 메모아카시아 이파리 속 뾰족한 가시 끝에 맺힌 이슬을 본다. 밤새 내린 빗방울일지도 모른다. 늘 풀잎 위에 맺힌 진주 이슬만 읽거나 알고 있었지 가시 끝 눈물은 생각한 바 없었다. 가시란 존재는 남들에겐 아픔이지만 정작 자신에겐 깊은 슬픔이리라. 나 또한 나이 먹으며 점점 가시 같아지니. 오늘도 찔러보는 바지 주머니 속엔 삼만칠천원 무겁구나, 한 시간은 족히 가는 긴 생각거리 만났다
까치 택배 윤 한 로빨강 얼굴 빨강 코웬 사내헐럭하니 망사조끼엔 ‘까치 택배’ 새겼다(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 온다는 게로군)근사하다오늘도 반지하 우리게 저벅저벅 걸어들어완박스 하나 휙 뿌리고 간다빨강 팔뚝 빨강 다리 대낮부터 삭힌 홍어 냄새 풍기며어드메 먼 친척이나 되드키시작 메모장마철 반지하 사무실은 훅훅 찐다. 노트북 잡무 속에 머리를 붙들고 앉아있자니 짜증스럽다. 언제부터 택배가 너무 많이 온다. 하루에 십여 차례도 더 온다. 쓸데없는 책자니 유인물이 거지반이지만. 거칠게 들이닥치는 붉은 얼굴 택배 사내들, 이따금 그 모습이
벤치 윤 한 로아 아 문리대니 예대니 계집애들은왜 그렇게 깔깔거리는지스모르에 백구두에꾀죄죄, 시 나부랭이 좀 써보겠다고대학물 한번 먹겠다고 나 같은 놈팽이연천에서 올라와 나무 벤치 위외롭고도 마냥 쪽팔리더라청자 한 대 꿀리곤 신문지 한 장 뒤집어썼지스물둘 초여름파란 하늘에 흰 구름 한 덩어리천천히 천천히 흘러가도록시작 메모문학을 하겠다고 대학물 좀 먹겠다고 삼수하고 연천에서 올라왔는데, 스물두 살 내가 타던 84번은 지금도 아프게 한다. 대지 극장을 지나 미아리를 거쳐 창경원을 스쳐 화신 앞을 흘러 서울역을 나와 용산을 넘어 한강
새벽 미사 윤 한 로두 손 겹쳐 성체를 받아 모신다마냥 지지고 볶고 저들 위해 나 또한 옷이 되리니 굶을라 밥이 되리니갑자기 뒤설렌다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이놈한테서도자칫 춤과 노래 흘러나올 것 같아휘휘 보따리니 전대 돈이니 다 놓고부르튼 손발 오늘 하루지팡이 하나만으로 가본다 시작 메모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걸핏하면 발가벗고 춤을 췄다. 짐승들과 얘기하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다윗왕은 싸움에서 이기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춤을 췄다. 진정한 시인이며 목동이다. 아주 어린 애일 때 우리들 또한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마냥
이스라치 윤 한 로더두 덜도 아닌꼭 어제만큼 떨어졌네양재기에 한 홉큼 빨간 알갱이들꼭두새벽 이슬 머금어좀 시금털털하쟤아버지 오입 가 돌아오지 않는 된 밤, 파랗게 걷히고* 이스라치 : 산앵두나무 열매. 시작 메모붉은 버찌 알알이 깔린 아스팔트 언덕길을 오른다. 빗자루에 쓸리고 애들 발에 그렇게 짓밟히고 차바퀴에 으스러졌을 텐데 또 다시 어제만큼 깔렸다. 언제나 출근길은 화가 나지만 이것들로 참을 수 있다. 이 도시에서 이슬맺힌 버찌 언덕길은 내 마음에 ‘이스라치 깔린 산길’이다. 백석 시를 읽고 거기서 처음으로 이스라치라는 아름다운
기말 고사 윤 한 로우리 재수할라요웬만한 애들 거의 엎드리고수학 시험 시간수학 시험 문제지에모자도 그리고우스꽝스럽게 권총도 그리고시내 삐끼 다리도 그리고조용조용히 어느 소녀 얼굴과다시 그 얼굴 코 밑에 찍찍 숯검정 수염도 칠하고속절없이 먼 산 바라다간 어느새 손가락 깨물며, 물어뜯으며깨알같이 쓰는 시란정말 맛있습죠만우리 곧 구겨버릴라요시작 메모조선시대 문장가 이옥이 쓴 글 중에 저잣거리 모습을 쓴 게 있다. 소, 닭, 청어 끌고 엮고 오는 사람들에 입은 옷, 옷자락, 신발 같은 누추한 행색이 고작인데, 아아. 이옥은 이것들을 퀘퀘하
민들레 윤 한 로가냥 두었더니 골대 뒤쪽까지죄 짓쳐왔네시퍼런 잎 곤두세우곤 이것들이,내 어렸을 적 촌충처럼 샛노래라애기똥풀꽃엉거주춤두 손가락 가만집어보네시작 메모날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갑갑해서 한두 번 야외 수업을 한다. 민들레들이 야산 언덕바지서 강당 옆댕이로, 운동장 축구 골대 골키퍼 자리까지 욱대기며 피어났다. 시퍼런 창 같은, 톱 같은, 칼 같은 이파리들 치마처럼 두르고, 샛노랑 꽃 한 송이씩 쑥, 찌그린 게 앳되다. 나한테 샛노랑은 다 촌충 빛깔이다. 어렸을 적 촌충을 가진 나는 얼마나 아프고 조용했던가. 이 민들레를 자
오늘 아침 윤 한 로뜨뜻미지근온통 흰 함박눈유리 위로 범퍼 위로작은 봉고 한 대 벚꽃 무더기 뒤집어썼다눈썹이며 귀며마치 개가 된 듯오늘 아침 시내 일번가 지나 머리 쓰는 일 하러 터덜터덜직장 올라가는 언덕길에도 꽃 그늘 확확 시리다나 또한 개, 무지개 되어 날뛰고파아, 흐드러진 벚꽃*재갸가 ‘갑’이라먼난 ‘을’쯤 될쳐* 재갸 : 채만식 소설 에서 ‘자기’를 ‘재갸’로 썼다. 구어(입말) 낱말이다. 시작 메모‘갑’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이른바 생활등산화가 나왔다. 정장 차림에 신고 출근했다가 바로 산으로 직행해도 되는 신발이다. 사면
소만(小滿) 윤 한 로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고 가슴도 닦아드리고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뉘렇게 웃으시네누렇게 패이시네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교장선생시작 메모보리가 누렇게 패고 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이미 초여름에 들어섰다. 보리 이삭이 누렇게 패고 생명이 가득 차오른
은하수 마을 윤 한 로안양천 똥물이 애법 맑아지더니은하 슈퍼도 뜯기고은하 아파트도 뜯기고은하 고시원, 다방, 오토바이상사은하수 호프도 뜯기고은하네도 떠나고별처럼 하나 둘 떠났구나들작지만 세게 놀던 애들 싸구려 호프집, 싸구려 노래방, 싸구려 이발소 평일미사 빼먹지 않던 신심깊은 할매들도 많았는데꼭 정든 두메산골만 같았는데다 뜯어발린 덕천 마을다시 또 성호 한번 긋네시작 메모하여튼 재개발로 다 뜯어발기기 전에는 덕천 마을로 놀러 갔다하면 2차, 3차, 노래방에 입가심까지 진탕 먹고 두시, 세시는 넘어야 보내줘서 왔다. 참 좋았다. 거
구들장 윤 한 로이 땅에는꽃보다도 별보다도 아침 이슬보다도더 아름다운 이름 하나 있네방구들장머리 치렁치렁 길렀다가스님처럼, 고등학생처럼 빡빡 밀었다가강정마을로 용산 현장으로 삼보일배로달릴 때까지 달리네 사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대하고 싸우네 괴팍스럽기 이를 데 없어라방구들장 신부님그러나 손 한번 잡아볼라우세상에 그토록 부드러운 손 다시는 없을 걸세머슴도 숫제 상머슴처럼 살고파앞으론 나를 꼭 방구들장이라고만 불러주세요구들장 신부님제발, 푹 꺼지질랑 마소서시작 메모안중근도마 의사를 가장 존경하고 존경하다 못해 왜적 이토히루부미를
오솔길 윤 한 로점심나절 맑은 봄바람 서류 행정 늬들이나 다 해라학교 뒷산 철망 뚫고 진달래 오솔길 간만에 오르다 시껍하네공부하는 여자애들 둘담배 한 대 꼬실른다 퍼질러 앉아 더는 긴 말 필요 없스요그 꽃 두 송이 너무 아파나 성호를 긋네그 길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리시작 메모아침형 인간들이 싫다. 철저한 계획에 의거, 강철 같은 추진력을 지니고 인정사정 보지 않는 그 철인들. 아침이, 새벽이 오히려 좋댄다. 아침이면 꺼벅꺼벅 맥을 못 추는 올빼미 족속들이 좋다. 어둡고 눈부신 밤이 그립다. 만나고 울고 웃고 싸우고 게임하고 사랑하
식구 윤 한 로울 밑꽈리 누나길섶풀까마중 형오늘도 빨강 코씀바귀 아부지뉘엿뉘엿 해는 지고올갱이 식구들아차차 니저발여고자진한 초록 사발익모초 엄마시작 메모내 인생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로 이 사설시조를 든다. 시골 아낙네 같은데 서방은 병이 들었고 찢어지게 가난해서 약이나 의원은 쓸 수도 없고, 하릴없이 달래 나물 따위나 뜯어 종로 장터에 내다 팔 수 밖이. 시원한 수박 화채나 한 대접 해 먹이려 이것저것 다 샀는데 아차차, 잊어버렸네, 그만 당원 사는 걸 잊어버렸구나. 수박에 숟가락 꽂아 놓고 한숨짓는구려. 어
쑥 윤 한 로다시 또 봄이 와쑥을 보면옥이가 생각난다지지리도 박복한옥이 기집애비 한차례 내리곤하이얗게 설운 목련보다 백배나 고와라언덕바지 쑥시작 메모 시골에서는 이맘때면 논둑이나 밭두렁에 파랗게 쑥이 돋았다. 봄볕 언덕바지 위에 쪼그려 쑥을 캐던 어머니와 누나, 동생, 처자들. 해진 노랑 회장저고리에 때묻은 다홍치마, 하나같이 가난하고 박복하던 평생 땅강아지 그 처자들. 나이가 먹을수록 짓무른 눈에 더욱더 그립다. 이 안양 바닥에서는 어디로 가야 쑥을 보랴.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얼핏, 남부시장 노점상 할매 신문지 위에서나 본다.
종이컵 시인 윤 한 로확 구겨버리지 말자 아주 짧게 한두 줄 별, 꿈, 바람, 벌, 호박, 그리움 그런 한물 간 구닥다리 옛날 시 쓰리 점심 먹고는,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먹고는내 영혼 하냥 종이컵에 머물웨라이제 떠들썩한 곳 싫어 나는야 조용한 종이컵 시인 밑동에는 오늘 날짜도 쓰고 윤◯로, 외로운 내 이름 석 자도 쓰고 아무도 읽지 않네요그리하여 내 영혼 아스라이 별처럼 구름처럼 흘러 끽, 역전 벤치 위 뉘렇고 짠 손한번은 맑게 읽히리 ‘무신 무신 눔’ 소리 들어가며 나는야 종이컵 시인입네시작 메모행정도 잘 하고 사무도 잘 보고
석불 윤 한 로숭숭 얽은무녀리 곰보 석불눈도 선낫코도 선낫입도 선낫웃음은커녕옛다, 떡갈나무 칡넌출 산기슭에 버렸으니떼이고 패이고외려 좋으이시작 메모까뮈의 스승 장그르니에가 쓴 ‘섬’. 는 그 글. 깊은 밤 우리를 아무 목적없이 이끄는 두세 장. 저마다 기발하고, 박식하고, 숨막힐 듯 묵직하고, 재치있는 마침내 경박스러운 요설 시대에 문득 고독한 겨울 나무 문장들을 만난다. 그러나 아직도 기발함을 탐하는 내 시, 쓸수록 아프다.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코 윤 한 로도둑놈 시를 쓰다 말고 물끄러미 딴 생각한다그때 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비록 한 톨 먼지처럼 작은 잘못일지언정진심으로 뉘우치니카아, 얼마나 맑은지 모르겠구나 밤하늘 뚫는 매부리코 실로 간만에 바라보는 별오늘 왠지 장미 시를 쓸 것 같아점점 때갈스러워지는 오십 줄무거운 호박 괸다시작 메모애들한테 ‘너희들은 왜 다른 건 다 시로 쓰면서 너희를 가르치는 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시로 써보지 않냐’ 정말 섭하다고 했더니 끙끙 한편씩 써서 냈는데 개중 절창이 나왔다. 사람은 나이를 들수록 어려진다나, 갓 태어난 아가의 얼굴 같
낮달 윤 한 로물크러진 줴, 엄니 손톱 낮달염생이 우는 산기슭에 오늘따라 뜬금없이 빠졌네새파란 하늘한 소쿠리 그리움이여시작 메모돌에 대해서 끊임없이 긁적거리다가, 왼쪽, 오른쪽 고무신을 짝짝이로 바꿔 신고 사는 안짱다리 산골 마을 중년 농사꾼을 생각하다가, ‘내일은 힘들지 않게 해 주소서’ 가난한 티벳 사람들의 뭉클한 노래 구절 가슴 깊이 품다가, 새벽녘 새우처럼 꼬부리고 끙끙댄 끝에 우리 어머니 손톱 같은 낮달까지 왔다. 새파란 하늘 한 소쿠리 술술 새는 그리움이여.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나무 윤 한 로저녁 어스름흙먼지 뒤집어쓴 채먼 길 걸어왔구나 이제 다 내려놓고구부정, 가진 것 없는옛날 옛적 누더기 친구여찬 바람 속 뽑히울 수염과외려 노래할 희망, 기쁨에 떠는예언자여비록 지팡이는 없을망정동냥자루는 없을망정시작 메모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구약의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서 민족 구원의 희망을 노래했다. 누더기가 되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도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꿋꿋하고도 외려 기뻐했다. 수염 뽑으
우리 셋 윤 한 로동네 싸구려 호프집에우리 셋나와 마누라와 영진이귀때기가 떨어져나갈 듯 추운 밤 나도 한 잔 고생이 많구만 당신도 한 잔자, 학교를 졸업했으니 니놈도 한 잔오리털 파카 속 자꾸만 삐져나오는 깃털 풀풀 날리며대학이 다냐 공부가 최고냐착하게만 살면 되지라구라를 풀며 쨍그랑 쨍그랑우스꽝스런 우리 셋 발동 걸렸다코맹맹이 되고 혀 꼬부라지고드디어 필림이 끊길 때까지얀마, 맥주에 소주 말아 세게 한 잔 쨍그랑 시작 메모식구꺼정 술 마시면 미주알 고주알 맛있다. 트집 잡힐 일 없고, 도망갈 사람 없고, 술값 때문에 머리 안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