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읽기 마혜경 카페에 자주 가는 편이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카페에서 멍때리기도 하지만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카페에 발을 들였다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수다가 섞여서 귀에 소음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어폰을 꽂아야 한다. 잡다한 소음에는 음악이라는 지우개가 제격이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몰입한다. 소설 읽기에 적당한 조도와 멀리 보이는 초록 나무가 페이지를 하나둘 넘겨준다. '혼자'를 즐기기에 좋은 공간, 푹신한 의자와 한몸이 되었다면 일어서기 힘들다. 그러나
헤세의 정원 가는 길 마혜경 송추로 뻗은 길햇살이 칠해진 도로는 들꽃의 환영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돼지를 태운 트럭과 내가 나란히 굴러간다어디로 가는 걸까분홍색 눈동자가 편지를 쓰지만단어가 모자라 갈림길에서 헤어진다 헤세가 있나요그는 오지 않습니다크림을 덮은 베이컨이 정갈하게 누워있다 여긴 어딜까헤세는 없고 정원만 기다리는 나이프와 포크가 승리를 시연하기 위해날카롭게 빛나는 곳
얌전한 고양이 마혜경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거잖아땅으로 떨어지듯 다소곳하게 고개 숙여야 한다는 거 어른들은 그게 문제야 끝을 소홀히 하는 거 저것 봐눈꺼풀 살짝 치켜뜨는데 저 건방진 처마처럼 하라고
두 개의 바다 마혜경 애초에 실수가 있었다해일이 일어난 그날, 열두 시를 어긴 신데렐라처럼 파도는 돌아오지 않았다포기하고 싶을 때, 비나 눈으로 둔갑하고바람이 대신 변명했다 구름은 말해야 한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비오면 바다가 왜 따라 울까정수리를 타고 내리는 비는 왜 쓸쓸해야 할까 헤어진 연인들은 비가 오면 바다로 간다텅빈 하늘은 있어도 바다는 늘 가득하다곧 껍데기로 버려질, 어쩌면 하늘은 바다의 필명 가오리연지느러미가 퇴화한 비행기 날개인생이 왜 고해苦海겠는가
"큰 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마리우폴에 사는 어린 소년이 눈을 비비며 인터뷰에 응했다. 아침이면 유치원에 가고, 낮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밤이면 부족했던 놀이를 꿈속에서 경험하는 아이에게 잠을 깰 정도의 큰 소리란 무엇일까. TV도 아니고 자동차, 음악도 아니다. 그것은 약속이 깨지는 소리다.약속은 공정했다. 비겁한 노력은 최고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든 어기는 자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한 올림픽에서 약속이 이행되지 않으면 퇴장 또는 벌점이 추가되거나 승리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미지도
봄 아이디를 입력하세요 마혜경 두꺼운 점퍼를 입고 산에 오른다내려오는 사람과 인사하지 않는다허밍만으로 올라가는데진달래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중인지핑크색 무늬가 떨어진다언덕은 올라오는 발자국을 세고 있다노란 몽우리가 곧 터질 테니줄을 서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그러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오픈 시간이 얼마간 연기된다아직 이른 걸까아무도 개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긋난다올라가는 사람 등에는 구름 지도가 펼쳐지고흙을 비집고 나온 새싹이 나를 클릭한다 "봄에 접속했습니다"
착하게 굴러갑니다- 마혜경 손수레가 지나간다 꽃 한송이 다가온다 납작한 가슴, 옷핀 하나에 매달린 꽃, 바람에 흔들린다. 매정하게 뗄 순 없지 애가 준 걸. 할머니가 가다 선다. 꽃이 가다 선다. 활짝 피는 일은 갈 뿐 서지 않는다 골목에 숨은 어둠이 이름을 부른다 꽃은 귀를 막아 뒤돌아보지 않는다. 홀로 키운 손녀딸, 기죽지 마라 그 할머니 죽지 마라. 삐딱한 무게중심 핀 하나에 매달려 굴러간다 할머니 이거 오백 원, 여기서 주웠어요. 아니, 거기 그냥 둬 요즘 애들 줍는 재밀 통 몰라. 흙 묻은 동전 둥근 바퀴 노을을 밟고 굴러
키가 큰 아침 - 마혜경 송도 국제도시 초고층 호텔꼭짓점을 피해 앉은 외국인들이 같은 아침을 먹는다냅킨으로 입술을 두드리고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무례함은 에티켓이 될 수 없다얌전한 척이라면 몰라도 따분한 아이들이 모여 숨바꼭질을 한다노란머리가 술래인데 검은머리 아빠가 일어선다검은머리가 들켰는데, 노란머리 삼촌이 곱슬머리를 가리킨다 얌전을 모르는 아이들얌전빼는 어른들같은 아침을 먹어서 같은 소리로 웃을까 세상이 인정한 소란68층에 깃발을 높이 꽂았다
물구나무서기- 마혜경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어둠을 파헤치고 땅을 보는 것이다흙이 고집을 버리고 길을 내어주면조금 수월해질 뿐이다막무가내로 나아가면 안 된다물러난 만큼 다가가고 기다려야 한다빈자리에 헝클어진 머리를 대고새 살이 차오르듯흙이 다가올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종이와 펜을 잡은 시지프스는 나무가 그랬듯이 안을 바라보는 것이다 달이 깨진 자리여우가 숨은 사막에서홀로 별이 되는 것이다 다만 푸른 나뭇가지만이 손목을 비틀어이 소름 끼치는 사연을 시인에게 수신할 뿐이다
제주도 미혼모- 마 혜 경 제주도 아침을 지나간다. 길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산방산 11킬로미터 양쪽으로 다리 벌린 도로에 천천히 들어간다. 안개를 묻히며 오르막을 지난다. "전방에 방지턱이 있습니다" 내리막을 지나서야 안개를 털어낸다. 7킬로미터, 거친 산통 야자수 뒤로 숨는다. 정수리가 고개를 들자 아기 울음 길 위에 퍼진다. "3킬로미터 남았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검푸른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둥근 그림자가 길 위에 서 있다. 500미터, 혹시 골리앗! 아, 근사한 다윗은 아닐까...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보문사 불상도
피카소 사진관 - 마혜경 그곳 바닥에는 깨진 거울이 있었고파편들은 대체로 누워있었다문득 내가 궁금했다빛이 예리하게 바닥을 지날 때다행히 두 눈동자만큼은 조각의 한가운데 자리 잡아잘리거나 어긋나지 않았으며어제를 재연하듯 다소 경직되었다스틸사진과 닮았다고 생각을 한 게아마 시계에서 조각조각 소리가 날 때였을까 그곳 바닥, 거울 눈동자 속에서시간이 찰칵 조각나고빛은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두 눈동자만큼은 사라지지 않고정면을 응시한 채 기억되고 있었다내가 조각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집에 가는 법- 마혜경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지나간다네모난 부리를 가진 새가 베어 문 타이어 자국바람 소리와 함께 정류장에 찍힌다얇은 소음을 매달고 그들의 집에 더 가까이 모르는 사람들이 흔들린다모르는 가방들도 흔들린다어깨와 손잡이는 알고 있다먼저 탄 사람이 먼저 내리는 건 아니라는 걸 적당히 흔들려야 가까워진다네모난 부리 자국 주소만큼 찍혀야모르는 사람들이 집으로 간다
흔들리는 언어- 마혜경 바닥을 정하고 높이 올라간다지붕이 필요 없는 바닥은 바닥만으로 집을 짓는다높이 올라간 재료들은 높다고 떨어지거나 굴러가지 않는다집을 짓는다는 마음이 집을 짓는다빙 둘러 벽을 세우면 속을 파낸 집이 된다 햇살이 잠시 지붕이 될 때가 있다그때 바람은 햇살을 가지런히 빗은 후집주인의 표정에따라 꿈을 조금 더 연장한다그 집에는 주로 나뭇가지를 닮은 발들이 잠을 자는데새집증후군이 없으니 두통이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다 다만 챙겨야 할 것이 있다잠버릇이 심해 떨어져도설령 그것이 꿈일지라도저희로서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에
가끔 히스테리- 마혜경 내 생각은 달라요사람이 꽃이라는 거곧 지고 말 걸 꽃이라니요떨어지면 그만인데 우리에게 그만이란 게 있나요사람과 꽃은 달라요 꽃이 사람이 아니듯 설마 이거 말인가요, 꽃병의 꽃우리도 모가지가 꺾이면 그날로 그만이라는 거잔인하군요, 그렇다고 강요하진 마세요사람은 꽃이 아니어도 우기면 얼마든지 행복하니까요시 쓰는 사람들이나사람은 꽃이다, 외우며 우아하게 폄하하시길
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 - 마혜경 누가 누굴 조심해야 할까. 사람이 조심해야 할까. 차가 조심해야 할까. 이 두 개의 '조심'은 결국 사람이 하는 행위로 동시에 존재해야 맞지만, 만약 선두를 정해야 한다면 누가 먼저 조심을 실천해야 할까. 처음의 조심과 나중의 조심은 얼마간의 간격이 적당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동시에 실천되는 게 맞지만 말이다.끼이익~ 걷다가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아스팔트의 거친 소음이 걸음을 세웠다. 다행히 생각보다 큰일은 아닌 것 같다. 놀란 두 사람이 도로 위에서 얼음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 차창
천륜 - 마혜경 비밀의 땅 파미르산양의 심장이 붉은 그림자를 그린다두 개의 꼬리가 깃발을 올린다늑대가 달린다 총 소리에 개가 달려간다 송곳니에 식도가 뚫린 개늑대 눈동자에 맺힌다우리 어디서 본 듯하다그러나 두 눈 꼭 감자새끼에게 돌아가려면주인에게 충성하려면지금은 삼만 년의 핏줄을 끓어야 한다 매너를 중요시하는 인간이 늑대의 새끼를 데려와엄밀히 말하면 훔친 뒤, 개로 키웠다지 패륜이라면 돌을 던지던 그들이늑대와 개 사이에서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일곱 살 슬픔입니다- 마혜경 내 이름은 슬픔입니다. 나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바다만큼은 노래를 들어줬대요. 여행 당일은 언제나 날씨가 말썽이잖아요. 노래가 죄는 아니니까요.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작은 심장들의 불을 끄면서 태어났으니까요. 노래가 사라진 바다는 어둡고 화가 났죠. 내 탄생을 미리 알았는지 세월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가만히 있으라!"나는 가만히 있는 사람들의 눈물입니다. 나는
어떤 의자 - 마혜경 사람이 다가온다연필처럼 걸음이 걸음을 긋고 온다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다지팡이가 점을 찍으면 두 발이 점을 잇는다그 사람이 지팡이보다 늦게 걸어온단 말이다사람이 지팡이를 따라오는 것 같지만사실 지팡이가 친절한 사람에게 밀려오는 것이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팡이는 길을 알고 사람은 모른단 말이다지팡이가 수명을 다해 부러지면사람은 길을 몰라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그의 가슴이 부러진 지팡이를 품으면그것이 의자란 말이다두 개의 다리로 일어설 수 없을 뿐우리는 여태 그것을 모른단 말이다
사랑도 인턴이 있나요- 마혜경 빨리 오늘이 어제가 됐으면 좋겠다 좋은 추억이 있나요 그녀가 물었을 때, 딱 오늘이 제격이라 생각한 후. 방금 그녀는 체했다 스테이크 탓을 했지만 내숭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눈을 찡그리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면서 이것이 추억이 아니라면 무엇이 추억일까 그리고 또 생각했다 사랑은 스테이크처럼 비싸진 않지만 질긴 오해가 많아 체하기 쉽고 덜 익으면 비릿해서 버려야 하는 그게 아니라면 내숭이라도 부려서 등 두드릴 일을 만들어야 하는 만날 때마다 추억을 씹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사과는 예뻤다- 마혜경 과일집 앞에 서 있다노란 바구니에 담긴 넌 그 밤을 알고 있다시치미를 떼지만 부꾸러움은 들키기 싫은 눈치내가 말할까우와, 안겼을 때 엄마 품에서 우두둑 떨어진인형처럼 무릎을 접어 받은 품삯어둠 속에서도 새 부리 선명했던 그 사과잖아 쓸쓸하게 넌 홀수로 앉아 있다먼저 시식하던 새들은 엄마 따라갔을까사과가 이렇게 예쁠 수도 있다니예쁘려고 맛을 버린 건 아닐까 한 입 베어 문다어두운 방에 서 있다새들이 돌아올까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밤, 어두운 방, 모난 사과 하나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