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인이 낸 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에 수록된 단편소설 속에서 적음 형을 만났다. 여러 해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적음 형은 미아리 시절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녔던 선배이다. 박인은 적음 형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사람임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내 기억에는 적음 형을 그렇게 진실하게 대했던 후배는 많지 않다. 함부로 대하고 반말했던 후배, 약소하나마 지출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미리 내빼는 후배, 심지어 발길질을 했던 후배도 있었다. 술집에 잡혀 놓고(앉혀 놓고) 도망치는 데 필요한 볼모로 써 먹은 후배도 있었다.
꿈 없는 잠이 있을까.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리라. 냄비의 물이 찌개를 끓이듯 잠은 꿈을 끓인다. 최근 며칠 동안 내 잠은 무슨 꿈을 끓였던 것일까? 온동네를 돌며 구걸해온 여러 가지 음식물들을 한꺼번에 쓸어 넣고 끓이는 다리 밑 걸인들의 죽처럼 빈곤하고 스산한 잡탕이 대부분이다. 꼬리지느러미가 달린 고등어 뼈, 갈치 대가리, 양파 껍질, 파 뿌리……. 잡탕 속에는 이런 박테리아성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도 함께 끓고 있었다. 그런 죽에서는 걸레나 행주 냄새가 날 뿐, 그것이 무슨 죽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내 머리가 아직 번쩍번
무슨 이유로 불려 나갔는지는 이제 희미하다. 그 때 생긴 이마 위의 흉터도 잘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 선생의 성난 괴물 같은 모습은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는 겨우 열두 살 먹은 6학년 어린이의 머리통을 수박 들 듯 두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서 칠판에다가 두두두두 소리가 나게 연속으로 쳐 박았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내 머리를 붙들었던 두 손을 뗐을 때 나는 어지러워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다.한 반에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제하며 수업을 진행해야 되는 교사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말썽
관광버스였는지 일반 시내 버스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비좁은 버스에 옹기종기 낑겨 앉아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떠났다. 첫 노래는 교가였다. 앞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뒷부분, 그러니까 후렴만 기억난다. “혜화, 혜화, 혜화, 하늘과 땅과 나라의 은혜로 우리는 변함이 없구한다.” ‘없구한다’가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없으련다’라는 뜻일 것이다. 김밥과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가지고(어떤 애들의 가방에는 바나나도 있었다) 학교 밖으로 멀리 나간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아이들은 자못 씩씩하게 노래했다. 교가보다 더욱 씩씩하게
혜화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아이들 중에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몇 안 된다. 모두 마지막 과외를 같이 했던 아이들인데 그중 하나는 성이 진 씨이다. 진은 아버지가 정신신경과 의사라고 했다. 집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맞은편에 있었는데 , 마당이 있는 2층 양옥이었다. 그 집에서 남녀 예닐곱 명이 함께 과외를 했다. 또 다른 아이는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올라가는 큰 길 오른쪽의 한옥에 사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성이 이 씨이다. 이 아이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던 것 같은데 집이 늘 조용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은 없다. 또 한 아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자주 꾸게 된 것은 1963년 5월 5일에 몇 시간 동안 미아가 되었던 일만 원인이 아닌 듯하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작용하는 것 같다. 우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 슬하를 떠나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닌 사실과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악몽 같은 학교생활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어린이 노래자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계동집 이층 큰 방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춰서 듣기도 했고, 책가방을 메고 라디오 가게 앞을 지나다가 한참 서서 듣기도 했다. 라디오 무대에 나온
1963년 5월 5일이었다. 그 날은 창경궁을 비롯한 서울의 궁이 무료로 개방된 날이었다. 아직 전학 수속이 안 된 나는 계동에 있었고 6촌 형제가 놀러왔기에 그를 따라서 돈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동물원이었다. 호랑이, 사자, 코끼리, 원숭이 같은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구경꾼들 속에서 6촌 형제를 놓친 곳은 원숭이 우리 앞이다. 아무리 둘러 봐도 그는 없었다. 거의 모든 인파가 동물원에 몰리고 있었기에 그 속에서 밀려다니면서 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혼자서 집을 찾기로 하고 돈화문을 찾았으나 내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따라 걷던 생각이 난다. 학교에 오갈 때 버스나 합승을 타기도 했지만 걸어 다닌 날이 더 많았다. 집을 나서서 원서동 고개에 이르면 징 박은 구둣발 소리가 몰려왔다. 왜정 때 순사들처럼 금색 단추가 반짝이는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쓴 고등 학교 학생들이 무섭도록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왔다. 잠시 주눅이 들었다. 돈화문 앞마당에 이르러 원남동 넘어가는 길에 서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면 안심이 되곤 했다. 종묘로 넘어가는 육교 밑을 지나면 내리막길, 내리막길 끝에서 만나는 사거리에서 발길을 창경궁 쪽으로 돌려
6학년이 되자 학생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한 반에 백 명 넘게 몰아넣고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2부제 수업을 했다. 1반부터 6반까지는 오전반, 6반부터 13반까지는 오후반 하는 식이었다. 학교 밖에서 과외도 했다. 학교가 오전반일 때는 오후에 과외, 학교가 오후반일 때는 오전에 과외를 했다. 다른 과외 선생은 모르겠지만 우리 과외 선생은 담임선생이 추천해 주었다. 첫 과외 공부 방은 경신고등학교 올라가는 언덕 꼭대기의 허름한 집이었다. 과외 선생 한 명에 열 명 쯤 되는 남녀 학생 애들이 모여 앉아 수련장 문제
계동 할머니는 평생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살았다. 아침 일찍 안방에 내려가 보면 할머니는 어느새 머리단장을 마치고 햇살이 들어와 환해진 경대 밑에서 머리칼 몇 올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곤 했다. 할머니의 친정 올케이며 친구이기도 한 미아리 할머니가 다니러 와서 며칠 함께 기거하는 동안에는 다른 친구들도 불러서 저녁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함경도 할머니들이 열 명 가까이 모일 때도 있었다. 그 중에는 혼자가 된 할머니들도 더러 있었다. 오늘 어머니에게 물으니 할머니는 85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며(내가 네팔에 간 지 몇 년 지난 후였다
계동 할머니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차남은 내가 그 집으로 옮겨 가기 몇 년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며 나에게 외당숙이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삼촌’이었다. 계동 할머니의 얼굴을 그대로 닮은 그는 징집되어 병역을 치르던 중이었는데 휴가를 나와서 집에 머물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 무슨 사고였는지가 궁금했으나 당시에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휴가가 끝날 무렵에 음독했으며 너무 늦게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조카인 나에게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시켜 준 후에 징집되었고 내가 서
이층 큰 방에는 체경이 달린 오래된 장롱들과 철제 침대 대여섯 개가 있었다. 일제 때는 사교댄스 교실이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 만큼 크고 넓은 방이었다. 장롱들 속에는 전쟁 때 납북된 할아버지의 양복과 모자와 가방과 안경 등의 유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벽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는 침대들을 대학생이었던 외삼촌 두 분과 내가 하나 씩 쓰고도 몇 개가 남았다. 이층 큰 방에서는 골목을 지나가는 행상들의 노래가 잘 들렸다.“ 아지나 동태 ~ 도루묵……. 아지나 동태 ~ 도루묵…….”“ 다발무가 싸구려~ 다발파가 싸. 다발무가 싸구려
내 책상 책꽂이 위에는 어머니 아버지 사진을 넣은 접이식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날 일동 고모가 트렁크처럼 생긴 작은 가방에 선물로 넣어준 것이다. 어른 양손을 합친 크기였고 펼쳐서 세울 수 있는 그 사진틀 좌우 상단에는 ‘努力’ ‘成功’이라는 문자가 좌우명처럼 붙어 있었다. 문자의 뜻을 강조하느라고 유리 가루를 입혀놔서 네 글자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 사진 위에 있는 글씨가 努力이었는지, 아버지 사진 위에 있는 글씨가 成功이었는지는 잊었다. 사진틀 뒤에 숨겨 두었던 하모니카는 아들이 노상 그걸 불다가
종로 4가와 청계천 4가 사이의 시계 골목에 냉면집이 있었다. 외가 친척들은 곰보냉면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서 맨처음 그 집에 갔던 때는 전학 수속을 하던 중인 1963년 5월이었다. 친척들이 앉아있는 방바닥에 장판이 아니라 쌀가마니를 튿어서 깔아놨었다. 모인 친척들이 어른들만 열 명이 넘었다. 피난 나온 가족 모임이 이 정도면 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친척들이 남아있을지가 궁금했을 법한데, 그런 걸 물었던 기억은 없다. 계동 할머니처럼 전쟁 전에 삼팔선을 넘어 월남한 친척들도 있지만 일사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화물
어느 날 학교 철봉대 밑 모래판에서 그 녀석들과 맞서 싸웠다. 물론 일방적으로 얻어 터져 코피까지 났지만 이를 악물고 결사적으로 덤빈 탓에 버스표도 전차표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날도 나는 걸어서 돌아왔다. 빼앗기지 않은 버스표로 학교 앞에서 번데기를 사먹고, 전차표로는 멍게를 사먹었다.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나를 보러 오는 어머니는 아들을 혜화동 로터리의 빵집에 데려가서 빵을 사줬다. 어떤 때는 그 옆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줬다. 용돈은 주지 않았다. 내가 학교 앞 노점에서 불량 식품이나 사먹고 만화나 빌려 볼 것이
성북동 큰아버지네 마루방은 큰아버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이젤만 세워져 있고, 어떤 때는 작업중인 캔바스가 이젤에 올려져 있었다. 큰아버지가 마루방에 테라핀 냄새를 풍기며 유화를 그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마루방에 세워져있던 큼직한 인물화가 생각난다. 큰아버지가 그린 계동 할머니다. 도록을 찾아보니 나온다. 그림 속의 계동할머니는 남색 마고자 차림이다. 상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자세로 단정하게 앉아 있다. 팔꿈치 밑에는 작업 중인 색동천이 깔려 있고 배경에는 재봉틀이 놓여 있다. 계
정릉 큰아버지 집 식구들은 커다랗고 둥그런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 일요일 점심 상에 올린 상추는 큰어머니와 내가 뒷마당에서 같이 뜯었다. 큰어머니, 그러니까 외숙모는 절구로 으깬 멸치를 고추장 된장에 섞어서 쌈장을 만들었다. 쌈장은 가지찜에도 들어갔다. 봄에는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짠무를 얹어 먹기도 했다. 겨울 내내 독에서 숙성된 짠무는 맛이 좋았다. 도시락 반찬이 되기도 했다. 수제비를 만들던 기억도 난다. 마당에 연탄이 든 화덕을 놓고 큰 들통을 올렸다. 들통에서 끓는 물속에 들어 있는 야구공만한 양철통에는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 즉 나의 외숙을 우리는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쳤기에 우리 자식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큰아버지 내외는 슬하에 1남 4녀를 차례로 두고 L 자 형태의 아담한 개량 한옥에 살았다.대문 안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 왼쪽이 문간방이며 문간방에서 부엌이 이어졌고, 부엌은 안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방 옆의 마루방은 마당과 대문을 향했는데 마루방 옆에는 건넌방이 있었다. 건넌방은 누이 넷이 같이 썼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옛날 개량 한옥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엌 문
앞장서서 걸으며 생각해 보니, 스님과 내가 호텔 마리아 옥상에서 만났다가 다시 다르질링에서 만날 때까지 두 어 달 동안 스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내가 물어본 일도 없었다. 스님과 작별하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버스에 오르기 전에, 스님에게 그것을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러자 궁금한 것들이 두서 없이 떠올랐다. 림빅의 누구네 집에서 묵었는지, 며칠이나 체류했는지, 람만의 룸부네도 아는지, 까말라와 까말라에게 스웨터를 떠서 입힌 여행자를 아는지...... 마침내 질문의 핵심을 찾은 나는 걸음을 멈
버스 종점을 둘러싼 짙은 운무 속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그 소리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파업에 적극 동참하자는 선동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아주 가까워지자 운무 속에서 시위대가 나타났다. 피켓이나 플랜카드를 들고 나타난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우리를 향해 육박해 오고 있었다. 무선 통신기를 든 경찰들이 맨 앞이었다. 경광등을 켠 경찰차들도 따랐다. 시위대의 거창한 행렬이 우리 앞을 지나서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취생과 몽사는 떠났지만 스님은 아직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