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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2-4 / 하모니카

김홍성
  • 입력 2020.12.2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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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 철봉대 밑 모래판에서 그 녀석들과 맞서 싸웠다. 물론 일방적으로 얻어 터져 코피까지 났지만 이를 악물고 결사적으로 덤빈 탓에 버스표도 전차표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날도 나는 걸어서 돌아왔다. 빼앗기지 않은 버스표로 학교 앞에서 번데기를 사먹고, 전차표로는 멍게를 사먹었다.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나를 보러 오는 어머니는 아들을 혜화동 로터리의 빵집에 데려가서 빵을 사줬다. 어떤 때는 그 옆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줬다. 용돈은 주지 않았다. 내가 학교 앞 노점에서 불량 식품이나 사먹고 만화나 빌려 볼 것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혜화동 로터리의 그 빵집에서 파는 곰보빵이나 단팥빵, 그리고 중국집 짜장면을 좋아했다. 학교 앞 노점상의 번데기나 멍게나 해삼도 좋아했다. 죽 늘어선 노점 앞을 그냥 지나치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그날그날의 전차표나 버스표로 군것질을 하고 만화를 보는 데 재미가 들렸다. 그 재미에 무거운 가방을 업고 진땀을 흘리며 아리랑 고개를 넘는 고역을 감수했다.

 

밤이면 탁자용 사진틀 뒤에 숨겨둔 하모니카를 꺼내 불었다. 큰아버지가 밤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기에 뒷골목 밖 개천가 가로등에 기대어 불던 짓은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공공연히 불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방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불었다. 솜이불은 방음 효과가 있었고, 이불 속에서 혼자 부는 하모니카 소리는 더욱 근사했다.

 

당시 중3이었던 외사촌 형은 과외를 하느라고 밤늦게 집에 왔다. 그래서 지칠 때까지 하모니카를 불 수 있었다. 어린놈이 하모니카를 불면 폐병이 든다는 어른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 날도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아리랑 고개를 넘었는데, 다른 날보다 유난히 힘이 들었다. 정릉으로 건너오는 다리 난간에 가방을 걸쳐 놓고 개천을 굽어보며 쉴 때도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어지러웠다. 개천 물은 그날따라 피처럼 검붉은 색이었고 약 냄새가 심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간신히 집에 돌아왔고, 오자마자 드러누워 앓다가 밤에는 정신을 잃고 신음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큰어머니의 등에 업혀 낮의 그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검붉은 개천 물이 가로등 불빛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열이 심해서 불덩어리가 된 조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때 나는 급성 폐렴에 걸렸다.

 

큰어머니는 두 살 터울로 줄줄이 낳은 당신의 14녀를 양육하기도 벅찼을 시기에 둘째 딸과 셋째 딸 사이의 나이 열 살짜리 어린 조카까지 떠맡았던 것인데, 이 조카가 당신 자녀들과는 달리 말썽을 많이 피웠으니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당시 고등학교 미술 교사였던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 당신 부인의 정숙하고 고결한 모습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는데, 구순을 넘기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 옛날 말썽쟁이 조카는 당신의 고운 얼굴을 찡그리게 한 일이 적지 않았다. 큰어머니는 진작에 다 잊고 용서했겠지만 나는 죄송한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훗날로 미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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