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는 다시 안개 속을 달렸다. 올 때처럼 계속 아래를 향해 구불구불 내려갔는데 어느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후로는 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도 위도 모두 안개가 가득 차 있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래로 달릴 때는 브레이크가 터져서 곤두박질 칠까봐 걱정되더니 위로 오를 때는 엔진이 터질까봐 조마조마했다. 눈을 감았지만 귀는 열려 있어서 지프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엔진 소리, 바퀴 소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 쿠션들이 삐꺽대는 소리, 창틀에서 유리가 바르르 떠는 소리, 다른 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듣
지프가 섰다. 콜라와 사이다 광고판이 큼직하게 자리 잡은 도로변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안쪽에 라라 카페라는 간판을 단 기다란 건물이 있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여러 대의 버스와 지프들이 주차해 있었다. 뚱뚱한 운전사와 바싹 마른 조수를 포함한 10 명의 승객들이 우리 지프에서 내렸다. 주차해 있는 세 대의 지프 중 에서 우리 지프가 유난히 고색창연했다. 바싹 마른 조수가 10분 동안 휴식이라면서 화장실은 카페 뒷마당에 있다고 알려 주고 운전사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스님을 포함한 세 명의 여자들은 카페 뒷마당으로 갔다. 남자들 몇몇
안개를 뚫고 알리멘트 문 앞에 온 10인승 합승 지프는 실망스러웠다. 과연 갱톡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고물이었다. 타파도 2차 대전 때 지프가 올 줄은 몰랐다며 투덜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프의 조수는 우리 배낭을 받아 지붕에 싣고 밧줄로 칭칭 동였다. 우리 자리는 지프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 보고 앉는 자리였다. 스님 옆 자리는 중년의 따망 부인, 내 옆 자리는 유스호스텔에서 일하다가 칸첸중가로 일하러 간 락바 라마를 생각나게 하는 중년의 사내였다. 지프는 시가지를 벗어나 차밭 사이로 달렸다. 안개 속에서 갑
원효 대사 아시죠? 물론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저는 그 때 원효 스님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주워들은 짧은 얘기만 기억하고 있었죠. 즉,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떠났다, 움막에서 자게 된 어느 날 밤 자다가 깨서 물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중에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이 때 크게 깨달은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 가지 않았다. 겨우 이게 전부였죠. 그 얘기를 듣고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던 자가 마침내 그럴듯한 해골바가지를 얻었으니 어찌 흉내를 내보지
다시 학교에 갔죠. 과외도 다니고요. 과외 선생이 그 때 지방에서 올라온 s 대학교 외교학과 1학년인데 우리와 같이 놀았어요. 과외 수업을 하는 집은 돈암동 천중이네 집이었는데 천중이 아버지는 전방 사단의 연대장이었고, 천중이 어머니는 자주 관사에 가서 여러 날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죠. 그래서 그 집에는 어른이 없는 날이 많았어요. 말이 과외지 실제로는 공부를 안 했습니다. 천중이 어머니가 집에 있는 날에만 대충 공부하는 흉내를 냈을 뿐입니다. 천중이 어머니가 전방에 가고 집에 없는 날에는 그 방이 과외 공부 방이 아니고 그냥 ‘만
청계천 아니면 종로5가였을 겁니다. 길거리 노점상 좌판에 고물 엿가위가 여러 개 나와 있었어요. 하나하나 집어 들고 절컹절컹 해봤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손에 맞는지 소리가 잘 났어요. 노점 상인도 잘 한다고 부추겨요. 그걸 사서 절컹절컹 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아예 엿장수가 되고 싶어지더군요. 책가방 대신 엿판을 짊어지고 엿가위를 절컹거리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나중엔 절에 가고 싶었어요. 그 때가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이었어요. 학교 다니기 싫어서 거의 미쳤을 때였죠. 그날도 학교 담을 넘어 거리로 나와 무작정 쏘다니고 있었던 겁
“세 분 다 무사히 순례를 마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니 훌륭한 거죠.”“그런가요?”“저도 몇 년 전에 셋이 떠났다가 혼자 귀국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일찌감치 목표를 바꿨습니다. 티베트의 카일라스를 목표로 떠났는데 수속이 여의치 않아서 백두산으로 갔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직업과 관련이 있는 여행이었나요?”“그런 셈이죠. 셋 다 글 쓰는 사람들이니까요.”“작가라는 말씀이군요?”“둘은 확실한 작가지만 저는 좀 어정쩡합니다. 잡지 기자를 십 년 쯤 했더니 진이 다 빠져서 그만 둔 상태였죠.”
나중에 시킴에서 들은 무상 스님 얘기 중에서 몇 대목만 일찌감치 밝히는 게 낫겠다. ...... 혼자가 된 스님은 비하르 주의 수도 파트나로 갔다. 그곳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손님들이 입다가 두고 간 옷가지들 중에 더 입어도 될 만한 것들을 세탁하여 팔고 있었다. 다리미질까지 해서 얌전하게 걸어둔 힌두 풍의 새것 같은 옷가지들도 보였지만 스님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허름한 옷가지들 중에서 골랐다. 무릎을 가리는 정도의 펑펑한 반바지와 얇은 면으로 만든 헐렁한 긴 팔 티셔츠가 그것이었다. 방에 들어와 누군지 모를 여행자가 입었던 옷을
실내가 밝아졌다. 파상이 촉광이 높은 칸델라 석유등을 들고 들어와 카운터 탁자 위에 올렸던 것이다. 실내가 밝아지자 촛불을 끄는 손님들이 있었고 그대로 둔 손님들도 있었다. 일본 청년이 촛불을 꺼도 되겠냐고 영어로 물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심지를 잡아서 우리 탁자의 촛불을 껐다. 스님과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출가하신지는 몇 년이나 되셨는지요?”“출가 하고 십년이 안 된 스님들은 저처럼 이렇게 만행할 처지가 못 될 겁니다.”“왜 그렇습니까?”“십 년까지는 안 놔줘요. 절에서 이런저런 소임을 맡아 일하고 있어야 때가 되면 강원에
서쪽 능선에 별들이 듬성듬성 돌아와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인제 왔나 싶게 별들이 반가웠다. 별들과 나 사이에 언제 그렇게 도타운 정이 생겼나 싶기도 했다. 스님도 오랜만에 보는 별들이 반가웠는지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또 멈추면서 한참씩 별들을 바라보았다. 파업으로 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는 한적했다. 행인이 많지 않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산책하기 그만이었지만 너무 어두웠다. 정전이었다. 파업으로 인한 단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걷던 길가의 창문마다 가끔씩 촛불이 어른거렸다. 페마네 뚱바집 창가에도 촛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인 줄 알았는데 저녁이었다. 두 시간 동안 깊은 잠 속에 빠져 수많은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는 혼미한 꿈을 꾸었다. 시간 감각을 놓쳤더니 공간 감각에도 혼란이 왔다. 내가 처한 곳이 알리멘트라는 걸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리멘트의 식당에서 비망록을 덮고 방으로 올라왔다는 걸 기억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탁 터진 하늘을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에서 빠져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쪽 귀퉁이만 둥글게 터져 있었는데, 세상의 빛이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꿈에서 만났
정오 무렵에 스님의 시킴 입경 허가가 나왔다. 주정부 사무소가 있는 거리에는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플래카드를 쳐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그들의 요구는 다르질링을 웨스트벵갈 주정부로부터 독립한 자치단체로 승격시켜 달라는 것이었지 싶다. 이를 주도하는 정당은 공산당 계열이라고 들었다. 20 년 전 그 때, 다르질링에 머무는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시위로 인해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파업이나 계엄으로 발이 묶이는 것이 두려웠다. 서둘러 다르질링을 떠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만 했다. 단순한 축제였던 홀리 축제마저 나에
술이 설취해서 잠이 안 왔다. 마음이 들떠서 안 오는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는 일기장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쓰다만 문장이 마침표를 요구하고 있었다. 뒷말은 생략한 채 마침표를 찍었다. 한 줄 비워놓고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님에게 들려준 말들을 정리해 둘 작정이었다. 말할 때는 몰랐는데 문장을 만들려니 어려웠다. 양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졸라 매놓은 듯 갑갑했다. 결국 말하듯이 써버렸다. 쉽고 간결했다. 리듬을 타고 주절주절 길게 나오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9시. 이를 닦고 있는데 타파가 올라왔다
듣는 사람이 잘 들어 주기만 해도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샘물처럼 저절로 흘러나온다. 구태여 과장할 필요도 없고, 없는 말을 꾸며낼 필요도 없다. 그냥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면 된다. 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수행을 했는지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다. 계속 하라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태도로 귀를 열고 내 앞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까말라 얘기를 하고, 까말라가 입은 싸리나무 꽃 같은 스웨터 얘기를 하고, 싸리나무 꽃 같은 스웨터 때문에 어린 시절과 어머니가 떠올랐다는 얘기를 하고, 그
맥주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작은 위스키를 사서 맥주에 섞어 건배를 했는데 스님은 반 모금 정도만 마시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스님이 말했다. “천애(天涯)를 느꼈던 걸까요? 천애고아라고 할 때의 천애 말입니다. 갑자기 무섭고 춥고 막막해진 세상에 처해서 올려다본 먼 하늘이 천애라던데 …….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 건 일종의 예방주사가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천애에 맞닥뜨리면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 부모 슬하에서 미리 느껴보라는 예방주사 말입니다.” “흐흐흐, 그렇게도 깊은 뜻이 있었을까요?
언제부터 그랬나, 언제부터 슬픈 사연을 만들어 주절거렸나? 대학을 포기하고 동네로 돌아와 술 마시며 빈둥대며 지낼 때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역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로 돌아와 해병대 간다며 놀고 있던 친구 K에게 ‘우리 아버지도 네 아버지처럼 친아버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너는 그래도 친아버지 밑에서 컸으니까 얼굴을 알지만 내 친아버지는 육이오 때 전사했으므로 얼굴도 모른다고 했다.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으라고 했는데 K는 그 말을 제 어머니에게 전했다. K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친했다. 두 분 다 워낙 분
“밑에 네 친구가 왔다.”“친구?”“주정뱅이 말이야. 내가 뭐랬어. 숙소를 가르쳐 주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안 가르쳐 줬어. 어떻게 여길 알았을까……. 어쨌든, 있다고 했어?”“아니, 있나 없나 본다고 했어. 그 친구는 벌써 한잔했더군. 술 냄새가 역해.”“체크인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어야지.”“네가 알려줬다고 생각했지. 젠장.”“방에 없다고 해 줘. 미안.” 쓰던 일기를 마저 쓰려고 볼펜을 들었으나 상념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흔들었다. 주로 술 생각이었다. 한 시간 쯤 버티
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내 뒤에 따라오던 짙은 안개가 나를 앞질렀다. 광장에는 안개가 구름처럼 사람들 사이를 흘러다녔다. 까무잡잡한 현지인 관광객들은 그런 안개 속에서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혼부부, 핵가족, 대가족도 있었다. 한 줄은 벤치에 앉고, 한 줄은 그 뒤에 주르르 서도 모자라 벤치 앞에도 서넛이 털썩 주저 앉아야할 만큼 식구가 많은 대가족도 있었다. 그 많은 식구들을 향하여 카메라를 들고 있던 여학생이 내게 카메라를 내밀며 미소 지었다. 셔터를 눌러 달라는 거였다. “스마일. 하나, 둘 …….” 번창한 가족의
비탈길을 에돌아 학교 마당으로 내려섰다. 미쉘은 거기 있었다. 인부들이 페인트칠 하는 벽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무슨 모임에 다녀 온 듯 했다. “김!”미쉘이 반갑게 웃었다. 면도를 했는지 얼굴이 말쑥했다. 미쉘이 함께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젊은 여자는 친정에 갔다던 미쉘의 아내 강가. 눈초리에 의심과 짜증을 달고 있었다. 체구가 큰 서양 남자는 미쉘의 형 요한. 형제라지만 둘이 너무 달랐다. 미쉘이 사근사근하고 순진해 보인다면 요한은 거칠고 야비해 보였다. 배다른 형제일지도
우선 아일랜드에 갔다. 배낭 속 약주머니에서 아스피린을 찾아 두 알을 먹고 체크아웃 했다. 여주인에게는 시킴으로 떠난다고 했다. 세탁소에 맡긴 빨래와 침낭도 찾아왔다. 침낭은 깨끗해졌지만 벤젠 냄새가 심했다. 아스피린을 먹은 후 잠시 잊었던 두통이 재발하는 듯 했다. 침낭을 침대에 펼쳐 놓고 보니 과연 홀쭉해져 있었다.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 널어놓고 손으로 비비면서 두드리면 어느 정도 복원이 된다던 몽사의 말이 생각났다. 벤젠 냄새라도 빼야겠다 싶어서 침낭을 대충 말아 안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흐리고 바람도 없었지만 안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