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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2-8 /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

김홍성
  • 입력 2020.12.30 14:44
  • 수정 2021.01.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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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 할머니는 슬하에 41녀를 두었다. 그 중 차남은 내가 그 집으로 옮겨 가기 몇 년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며 나에게 외당숙이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삼촌이었다. 계동 할머니의 얼굴을 그대로 닮은 그는 징집되어 병역을 치르던 중이었는데 휴가를 나와서 집에 머물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

무슨 사고였는지가 궁금했으나 당시에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휴가가 끝날 무렵에 음독했으며 너무 늦게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조카인 나에게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시켜 준 후에 징집되었고 내가 서울로 유학을 온 해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덕수궁, 시청, 서울역 등지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준 그 삼촌을 나는 왜 까맣게 잊었는지 모르겠다.

삼촌의 묘는 청량리 밖 망우리에 있었다. 6학년 때였고 한식날이었지 싶은데, 삼촌 묘 앞에서 한 젊은 여성이 울고 있었다. 삼촌의 애인이었다는데 너무나 안 됐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날의 음복이 떠오른다. 잔을 새로 올리기 위해 잔을 비우느라 큰 사발에 부어 두었던 청주를 삼촌들이 한 입 씩 돌려가며 마신 끝에 내게도 차례가 온 것인데 나는 반쯤 남아 있는 청주를 한 입에 쭉 들이켜 버렸다.

 

여자들은 혀를 차며 걱정했고 남자들은 무척 재미있어 했다. 어지럽고 울렁거렸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더니 삼촌들 중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리며 사나이라고 추켜세웠다. 기분이 좋았다. 그 날의 음복 이전에는 술을 입에 대 본 기억이 없으니 내가 경험한 첫 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계동 할아버지의 피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할머니가 걸어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눈이 부리부리한 미남이다. 전쟁 당시 할아버지는 서울 근교의 농촌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들이닥쳐서 납치해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장군이었던 친척을 따라서 압록강까지 다녀왔으나 끝내 할아버지를 찾지는 못했다. 할머니가 명랑이라는 두통약을 상비하고 있는 까닭은 그처럼 극심한 고초를 많이 겪은 탓이라고 볼 수 있다.

 

할머니의 외모는 서양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에 비견되곤 했지만 기질은 여장부였다. 할머니가 야단을 치면 장남은 물론 당시 대학생이던 두 아들도 절절 맸다. 두 아들은 모두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였고, 체중이 1백 킬로그램이 넘었다.

 

계동 골목 끝에 있는 대중탕에 둘이 같이 들어가기만 해도 탕 밖으로 물이 넘쳤는데 수영장에서나 하는 발차기를 누가 더 오래 하나 하는 내기도 했으니 그 소란이 오죽했겠는가. 삼촌들의 덩치와 기세에 눌려서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층 큰 방은 그 두 삼촌이 쓰는 방이었다. 내가 들어오기 오기 훨씬 전에는 고인이 된 삼촌도 같이 썼던 방이다. 그 방에는 오래된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었다. 6학년 때였을까? 두 삼촌이 할머니를 모시고 사업차 강릉 경포대로 여행을 떠난 후라고 생각되는데, 밤이면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을 들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주제곡이었다. 전주곡만 울려도 슬펐던 그 노래가 훗날 남북이산가족상봉의 눈물 짜내기 노래가 되어 지겹도록 들리게 될 줄 그 때 어찌 알았겠는가이 연속극 중에 지금도 대충 기억나는 짧은 대사가 있다.

 

기차 지붕에 앉아서 피난 가는 대목에서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내가 품에서 소주를 꺼내서 옆 사람과 나누면서 하는 대사다. 기차 바퀴 소리를 멀리 죽이고서 가까이 들려주는 또렷한 음성이었다. 추울 때는 거저 쐬주가 그만이구만.”

 

자라면서 술 마시는 버릇이 든 어느 날 느닷없이 떠올랐던 이 대사는 종종 곱씹었기에 아직도 잊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앞에 캬 좋다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뒤에 기왕이면 한 잔 더 주구래가 붙었을지도 모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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