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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기억 2-1 / 성북동 큰아버지네 식구가 되다

김홍성
  • 입력 2020.12.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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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큰 오라버니, 즉 나의 외숙을 우리는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쳤기에 우리 자식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큰아버지 내외는 슬하에 14녀를 차례로 두고 L 자 형태의 아담한 개량 한옥에 살았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 왼쪽이 문간방이며 문간방에서 부엌이 이어졌고, 부엌은 안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방 옆의 마루방은 마당과 대문을 향했는데 마루방 옆에는 건넌방이 있었다. 건넌방은 누이 넷이 같이 썼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옛날 개량 한옥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엌 문 앞만 빼고 좁은 툇마루가 죽 이어져 있었다. 툇마루 밑에는 연탄 넣는 아궁이가 있었고, 대문 오른쪽에는 장독대를 겸한 반 지하 광이 있었다. 겨울에는 거기에 김치나 염장 무를 저장했다.

변소는 건넌방 옆으로 난 좁고 짧은 통로 끝에 있었다. 편하게 운신할 수 있는 크기였고 조그만 환기창이 있었다. 환기창으로 보이는 뒷마당 텃밭에는 상추 등 몇 가지 채소를 심었다. 집의 평수는 뒷마당까지 합쳐서 약 40~50 평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형이 이전에는 혼자 쓰던 문간방을 같이 썼다. 형은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생물반 특별활동을 하고 있어서 책상 위나 서랍 속에 신기한 곤충이나 도마뱀 같은 것을 간수하고 있었다. 서랍에 있는 조그만 성냥 곽 속에는 풍뎅이가, 소풍 가서 샀을 법한 향나무 필통 속에는 도마뱀이 들어 있었다.

형이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았을 때 나는 서랍을 뒤져 형의 수집품들을 구경했다. 책상 밑에 감춘 신발주머니 같은 광목 자루 속에는 구렁이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기억은 없고 서랍 깊숙하게 숨겨둔 괴도 루팡 같은 탐정 소설을 몰래 읽기도 했다. 

형의 메모 쪽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메모에는 형 나름대로 구상했던 탐정 소설의 등장인물 이름과 캐릭터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누이들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나중에 형이 고등학교에 간 후에 훔쳐 본 형의 일기장에는 통학하는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여학생에 대한 야릇한 상상도 나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은 소녀가 달려와 내 가슴에 포근히 안겼다이다. 큰아버지의 네 자매 중에 둘은 내게 누나들이었다. 당시 큰누나는 중학교 1학년, 그리고 내가 그냥 이름을 불렀던 작은 누나는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나보다 동생인 두 자매는 나보다 두 학년 씩 아래였다.

전학 가서 처음 혜화동으로 통학할 때는 갓 중학교 교복을 입게 된 단발머리 큰누나와 함께 합승을 타고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내린 후 나만 전차로 갈아탔다. 며칠 동안이겠지만 대문 앞에 책가방을 들고 서서 나를 기다리던 누나의 단발머리 아래로 설원처럼 펼쳐진 하얀 칼라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작은 누나에 대한 그 당시 기억은 별로 없지만 네 자매 중에 유독 작은 누나가 형과 친했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큰 여동생 H와 나는 한 번 크게 싸운 일이 있다. 집을 등진 쪽의 골목을 벗어나면 제법 큰 개울이 나오는데 거기서 같이 잡은 올챙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내가 먼저 화를 냈다.

급기야 나는 H가 들고 있는 올챙이 담은 비닐봉지를 잡아채서 시멘트 바닥에 쏟아 놓고 발로 문질러 버렸다. 그 때 H는 내게 니네 집 가, 니네 집 가하면서 크게 울부짖었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비록 초등학교 때 일이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H는 그것 말고도 내가 미웠던 기억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막내였던 G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올챙이 사건 때 언니 옆에서 같이 울었던 것 같다. G는 현재 외국에 산다. G는 부친의 부음을 듣고 바로 비행기를 탔다지만 장례에 참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나는 큰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다음날 일찍 상경하여 문상했다. 엎드려 절 하는데 울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변한 67세의 상주, 그러니까 사촌형과 함께 소주를 몇 잔 마신 후에는 혼자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구슬픈 노래라도 부르면서 한참 울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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