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대충 치운 후에 체링과 세따가 제일 먼저 온천욕을 하러 나갔다. 몽사와 나도 잠시 후 뒤따라갔다. 우리가 큰 바위 위에 겉옷을 벗어 두고 온천탕으로 내려갔을 때 체링과 세따의 코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바느질로 만든 면 소재의 펑퍼짐한 속바지와 꽉 끼는 속적삼 차림의 두 여성은 우리가 들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느라고 몸을 움직였다. 우리는 그녀들의 맞은편에 들어앉았다. 몽사는 기분 좋은 신음 소리를 냈지만 나는 무연한 척하고 오래 버티기가 뭣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발을 쭉 펼 수도 없었다. 가
부엌에 살림이 펼쳐졌다. 석유 버너, 석유통, 압력솥, 냄비, 국자, 쟁반, 숟가락, 물동이 등등이었다. 식량도 나왔다. 부탄 여성들은 말린 야크 고기와 붉은 고추 말린 것, 찐쌀 등을 가져왔다. 우리는 쌀과 밀가루 차 등등이었다. 아네이는 자기네 부엌살림부터 정리해 놓더니 곧장 버너를 피웠다. 아네이는 절에서도 공양주 역할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함석으로 만든 물동이를 들고 나가 샘에서 물을 퍼다 주기를 몇 차례 했다. 그 사이에 두 나라 여성들은 모종의 합의를 이루어 냈다. 부엌은 하나고 어차피 식구가 되었으니 하루
다음날 아침, 우리 넷은 욕숨 터미널에 나가 갱톡에서 오는 버스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내렸기 때문에 자리가 넉넉할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느라고 맨 나중에 올라온 몽사가 앉을 자리는 운전석의 엔진 덮개 위 밖에 없었다. 그는 거기 앉아서도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카메라는 창밖 풍경을 찍는가 하면 승객들도 찍었다. 그는 우리를 찍는 척하면서 우리 앞좌석에 앉아 있는 특이한 패션의 세 여성도 찍었는데 그녀들은 우리가 조레탕 온천 마을의 정류장에서 내릴 때 같이 내렸다. 내리면서 보니 그녀들도 압력솥이며 석유 버너를 꾸려
마당의 탁자에서 세 사람이 뜨거운 블랙 티를 한 잔 씩 비울 때까지 몽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취생은 짜파티를 만들겠다며 부엌에 들어갔다. 스님도 취생을 따라 부엌으로 갔다. 잠시 후 부엌에서 석유 버너 타는 냄새와 팬에서 구워지는 짜파티 냄새가 마당으로 흘러나와 시장기를 자극했다. 내가 부엌 쪽에 대고 말했다. “몽사 선생이 혹시 터미널이나 제 거처로 간 것은 아닐까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짜파티가 준비된 후에도 몽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끼리 먹기 시작했다. “금방 구운
일기장을 덮을 때 쯤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새들의 노래는 가깝거나 먼 곳에서 활기차게 이어졌는데, 일순 뚝 그치면서 찾아온 정적 속에서 작은 방울이 구를 때 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르르르 ...... 또르르르 ...... 또르르르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떤 곳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이명이나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한 마리 새가 제 흥에 겨워 노래하는 소리였다. 또르르르 우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다른 새들의 활기찬 노래에 묻혀 있다가 다른 새들이 무리지어 부르는 노래가 그칠 때만 잠시 들리는지도 몰랐다. 또르르르
몽사는 물론 씩씩하게 걸어갔지만 혼자라서 쓸쓸하게 보였다. 다르질링의 호리 축제 때 그 광란의 골목을 빠져 나가던 몽사와 취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금송 숲에 있을 두 여성의 모습도 떠올랐다. 귀보시라고 했던가? 남의 하소연이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보시. 거슬린다는 기색 없이, 판단이나 조언도 없이, 그냥 끝없이 잘 들어주는 보시. 스님은 취생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취생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듣고, 풀이 눕는 소리를 듣고, 높이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짓 소리를 들어주
그 날 게스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이틀 동안 혼자 두부디 곰파 쪽으로 산책을 다녔다. 사흘 뒤에는 북쪽 마을의 동포 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갔었다. 몽사 혼자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갔지만 세 사람 다 없었다. 혹시 만날까 싶어서 일부러 금송 숲을 에도는 먼 길을 택해서 걸었지만 못 만났다. 거처에 돌아오니 몽사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메모는 로 되어 있었다. 몽사는 버스 종점 식당의 차오민을 짜장면이라고 불렀던 게 기억났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 나도 종점 식당에 가서
관이 바위 위에서 화목을 쌓은 단 위로 옮겨지자 승려들의 염불 소리가 커졌다. 나팔 소리, 북 소리도 커졌다. 마을 남자 네 명이 횃불을 하나 씩 나눠들고 화목 열두 단 네 귀퉁이에 각각 불을 붙였다. 붉은 불꽃과 누런 연기가 솟아오르자 마을 남자들은 검불을 모아 단 사이로 쑤셔 넣었다. 긴 대나무에 매단 그릇으로 양동이에 든 버터를 떠서 나무에 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 몽사는 침착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번 여행에서 건진 가장 값진 사진이 되겠지만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눈앞의 영상
출상 행렬이 십리 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망자가 승려로 살았다는 두브디 Dubdi 곰파였다. 시킴 왕국 건국 당시(1701년)에 건립되었다는 이 곰파는 승려들이 떠난 후 퇴락하고 있었지만 상여가 오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자 활기를 띠었다. 상여는 곰파 앞마당을 세 번 천천히 돈 후 법당 앞에 내려졌다. 한 승려가 법당에서 나와 뚱바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으로 싼 위패를 모셔 들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서 요령을 흔들며 염불 하는 소리가 났다. 스님들이 법당에서 염불을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돌을 쌓아서 만든 오래 된 마
여기 저기 푸른 풀이 돋는 마당에서 향 태우는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난간에서 어린 승려들이 긴 나발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허술한 이층집 주변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집 뒤로 내려오는 산길에서 막 마당으로 들어서는 어린 승려들도 있었다. 어린 승려들은 이 집에서 임종한 팔순 노비구니의 출상을 돕기 위해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몽사는 어린 승려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취생과 스님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근처에 있었다. 노비구니는 노환으로 속가에 내려와 있었을지언정 늘 청정하게 살다가 가부좌를 튼 채 임종을 맞았다니 거창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을 때 몽사는 이미 옆에 없었다. 스님과 취생이 거처하는 방에도 사람 기척이 없었다. 아직 젊은 여주인이 부엌에서 나와 타시델레 인사하면서 그들은 조금 전에 떠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짤막한 영어로 어제의 그 다리에서 그들이 오던 방향으로 계속 가면 마을이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차를 마시고 가라면서 나무 탁자를 가리켰다. 내가 부엌 앞의 나무 탁자에 앉자 그녀는 또 말했다. 자기 남편은 며칠 전에 트레킹 일을 떠났다고. 그 말을 들으니 락바 라마가 생각났다. 혹시나 싶어서
저녁은 남자들이 지었다. 쌀을 안칠 때 감자도 몇 개 깎아서 넣었다. 싹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갓 배추와 매운 고추와 스쿠티(말린 쇠고기)를 넣고서 된장 맛이 나는 멀건 국도 끓였다. 어찌 그리 행복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방바닥에 면 보자기를 펼쳐서 밥상을 차리고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필름 통 말입니다. 그거 아니었으면 우리가 못 만날 뻔 했다는 얘기는 했던가요?”“만나자마자 하셨잖아요. 그 얘기를 또 꺼내시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겠군요.”“네, 실은 어제 그 술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럼 이
다리 난간에 엉덩이를 기대고 서서 길을 물어볼 행인을 기다리는 중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다리 건너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쌍의 남녀가 바로 취생과 몽사였다. 그들을 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 하듯이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마을에서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아침에 헤어진 마크와 존이 필름 통을 술잔으로 갖고 있었기에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나서 스님을 소개했다. 스님이 합장을 하자 두 사람도 자연스럽게 합장을 해 보였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
이튿날 오전에 스님과 나는 욕숨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도 마크와 조앤처럼 욕숨의 삼툭 마을에 방을 잡고 산책이나 다니면서 며칠 푹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버스가 자욱한 운무 속을 달리는 동안 나는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깨어나서 차창 밖에 스치는 운무를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참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운무였다. 다르질링의 운무가 씨킴까지 따라온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르질링도 씨킴의 일부이며, 씨킴 땅은 설산 칸첸중가의 동쪽 기슭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휴게소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고 소변을
내 옆에 자리를 깐 청년은 영국인이고 이름은 마크였다. 종이봉투 속의 위스키를 보여 주고 한 잔 하겠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듯 씩 웃고는 방에 가서 자기 잔을 가져 왔는데, 그것은 뚜껑이 붙어 있는 빈 필름 통이었다. 마크는 자기 짝이 곧 나올 거라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때까지 마크의 짝이 누군지 몰랐다.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소년처럼 천진해 보이지만 이미 서른 살이라는 마크와 대작을 시작했다. 두 번 째 순배가 되었을 때 마크의 짝이 나왔다. 남인도 풍의 헐렁하고 긴 통치마 위에 점퍼를 걸치고 나온 그녀는 손으로 집어
종이봉투에 말아 준 1 리터짜리 위스키 병을 갓난애 안듯 보듬어 안고서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를 때 '너는 어쩌다 이렇게 가증스러운 술꾼이 되었냐?' 라는 물음이 목구멍 저 밑에서 올라왔다. 물음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자책에 가까웠다. 식당에서는 주류에 대한 정부의 면세 정책에 분노해서 술을 거부하더니 금방 ‘술이 무슨 죄가 있냐’는 핑계를 만들어 술을 사러 나갔으며, 술가게에서는 작은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가 순식간에 변심하여 큰 병으로 바꿔들었던 것을 뉘우치는 것이기도 했다. 망국의 원혼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데는 술만 한 것이
가이드북에 간추려진 기록에 의하면, 시킴은 독립된 불교 왕국이었다. 대국 사이에 낀 소국이어서 외세의 간섭과 침략에 의해 늘 흔들렸다. 다르질링도 사실상 영국에게 빼앗긴 시킴의 영토였다. 결국 시킴 전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 인도가 독립하면서 시킴도 인도의 보호령이 되었다. 1975년에는 국민투표에 의해 인도의 22개 주 중의 1개 주가 되었다. 불과 20 년 전에 망한 나라에 와서 세금 없는 술을 즐긴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면세 특혜는 원주민들로 하여금 망국의 한을 술로 달래고 술로 잊으라는 인도 정부의 술수라고 생각
칼림퐁과 갱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어름이었을까? 자동차 타이어들을 엉성하게 쌓아둔 어떤 집 앞 마당에 지프가 섰다. 간판 하나 없이 자동차 펑크만 전문적으로 때우는 집이었다. 영감님이 나와서 쇠 지렛대와 망치를 이용하여 타이어를 벗겨내고 고무 튜브를 꺼내어 물통에 담가 주물럭거리며 펑크 난 자리를 찾는 동안 어디선가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암탉이 마당의 흙을 발로 헤치면 병아리들은 헤친 흙 속에 서 먹을 것을 찾았다. “시골에 온 느낌은 나는데 왠지 좀 스산하네요.”“저도 그래요. 아까 그 대숲 속 해우소에 다녀오면서
지프가 다시 쉰 곳은 오래된 휴게소가 있는 언덕 위였다. 희미한 안개 속으로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 보였다. 언덕에서 골짜기까지 이르는 비탈은 계단식 경작지였다. 드문드문 차밭도 보였는데 언젠가는 차밭이 경작지 모두를 점령할 것 같았다. 골짜기에 흐르는 계류에는 팔루트 언저리에서 발원한 실리콜라의 물도 섞여서 같이 흐를 것이다. 지프는 우리를 내려놓고 왼쪽 앞바퀴의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승객들은 펑크가 난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내려서 보니 그 바퀴가 현저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운전사와 조수는 지프가 왼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통
국도를 달리던 군용 지프가 있었다. 길가에 있던 아이들 중에 하나가 갑자기 국도로 뛰어들었다. 운전병은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아이는 머리통이 터져서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지서 순경이 마침 현장에 있었다. 지서 순경은 의식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안고 길가의 병원에 뛰어 들어갔다. 병원의 의사는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침착하게 수술대 위에 누이고 퉁퉁 부어오른 아이의 얼굴과 머리를 알코올을 적신 거즈로 씻겨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의사는 아이를 알아보고 집안에다 고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