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는 가느다란 이슬비로 변했다. 이슬비가 아니라 무거운 운무였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달맞이꽃이 형광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네이, 체링, 세따가 출렁다리 앞까지 따라왔다. 젖은 어깨에 걸쳐진 검은 머리칼에 이슬이 대롱대롱 맺혀있는 여자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바바에게 들리겠다고 먼저 떠났던 몽사는 출렁다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자 바바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어디 갔을까요?”“잠깐 출타했나 싶었죠. 그런데 앞마당이 평소 느낌과 달리 휑해서 굴에 들어가 보니 접어서 방석으로 쓰던 담요며 담요 위에
몽사는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바바를 따라 가고 싶은 미련이 남았다.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 배낭을 벗어 던지면 바바와 같이 걸을 수 있을 거다. 담요나 하나 장만하여 둘둘 말아서 어깨에 걸치고 걷는 거다. 바바가 자는 곳에서 자고, 바바 같은 깡통을 장만하여 바바와 함께 탁발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 달 만 고생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될 거다. 나머지 여정은 6개월이든 1년이든 큰 문제가 없을 거다. ...... 문제는 내가 물것을 잘 타기 때문에 벌레가 나만 문다는 데 있다. 그것도 견디다 보면
숙소에 돌아와 장 보따리를 풀어 놓고 우리는 언제 떠날 것인가를 의논했다. 내일 아니면 모레가 적당했다. 또한 모레보다는 내일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부탄 여성들은 몹시 서운해 했다. 특히 아네이가 그랬다. 아네이는 그새 정이 들어서 눈물을 글썽였다. 몽사는 바바에게 우리가 떠난다는 말을 전하러 갔다. 취생은 슬퍼하는 부탄 여성들을 위로하고 스님은 말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나는 스님을 거들었다. 스님은 감자를 넣은 수제비를 끓였다. 홑이불 수제비라고 했던가? 밀가루 반죽을 홑이불처
몽사와 나는 영감네 가게에서 씨킴 위스키를 사다가 마시기도 했다. 그 와중에 취생과 몽사의 속사정을 어설프게나마 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다 같이 앉아서 무상 스님의 인도 만행에 대해 들으면서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이 물어보는 말에도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불교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거나, 말로는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따또바니의 온천
잠시 후 바위에서 아네이가 내려왔다. 아네이는 굿 모닝, 밝게 인사하고는 탕으로 쑥 들어와 앉았다. 속옷이 물에 젖자 살이 비쳤다. 흰 면내의가 감싸고 있는 크고 탱탱한 젖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머리를 쳐들고 짐짓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서른이 넘은 나이라면 사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 내외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아네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끈끈한 인도 가요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풀주머니 같은 아네이의 살집이 감은 눈 속에 어른댔다. “코리아에도 이런 온천이 있나요?”콧노래는 언제 끝났
우리는 바바와 급속히 친해졌다. 바바의 섭생을 위해 마을에 가서 채소나 계란이나 우유를 구해 주기도 했는데 바바는 계란을 먹지 않았다. 바바는 계란을 감자처럼 모닥불에 구워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몽사는 첫날부터 바바와 함께 살다시피 하더니 며칠 후에는 바바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모닥불을 지펴서 취사하고 탁발 나가는 모습도 촬영했다. 바바는 뼈만 남은 사람이지만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사지를 자유자재로 비틀어서 꼬고 돌릴 수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몸통을 비롯한 사지의 일정한 근육만 부분별로 움직이기도 했다
“몽사는 저에게 말했죠. 부인과 이혼하겠다고. 하지만 이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이 여행이 끝나면 몽사는 부인에게로, 저는 큰 이모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서는 취생의 눈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보았던 것일까? 눈물이 맺히는 순간 취생의 표정에 서릿발 같은 미소가 서렸었다. 슬픔이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만든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 있는 어떤 각오가 한 순간 빛처럼 반사된 미소였다. 이미 걷기 시작한 취생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내가 물었다. “스
“그렇게 야윈 몸으로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 바바는 나를 한 번 흘낏 보더니 다시 불을 보며 대답했다. “걱정 마라. 가느다란 시냇물도 계속 흐르기만 하면 결국 바다에 이른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제부터는 조금씩 섭생을 시작할 것이다.”바바는 깡통을 가리키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몽사가 놀란 표정으로 바바에게 물었다. “여태까지는 안 먹었냐?”“한 달 넘게 먹지 않았다.”“엥?” “단식했다는 말이군요. 그러니까 저렇게 갈빗대만 앙상한 거 아니겠어요?” 취생이 이 말에 무상 스
손님들이 왔는데 대접할 게 없으니 불이라도 쬐고 가라는 건지 바바는 깡통을 내려놓고는 즉시 불씨가 남아 있는 통나무 앞에 앉아 불을 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통나무 밑동에 검불을 모아 쑤셔 넣고 엎드려 후우우 후우우 몇 번 길게 불자 불꽃이 살아났다. 불 주변에 둘러앉은 우리 손님들은 다들 '거 참 신통하군' 하는 눈치였다. 불꽃을 살려 놓은 바바는 스적스적 마당 주변의 덤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삭정이들을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옆에 놓고 한 가지 한 가지 차곡차곡 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엎드려서 후우
큰 바위에서 내려섰을 때 운무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무상 스님이었다. 스님은 차곡차곡 접은 수건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박쥐 바바처럼 혼자 목욕을 하고 명상을 하려는 걸까? 혼자 있는 스님을 본 것은 여러 날 만이었다. 스님은 늘 취생과 함께 있었다. 욕숨에서부터 따또바니까지 취생이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님, 상좌는 어디다 두고 혼자 오세요?”“취생은 내가 나온 것을 모를 겁니다. 온천욕 했으니 푹 쉬라고 깨우지 않았어요.”“스님도 어제 온천욕 하셨잖아요?”“저는 구경만 했어요.” “잘 하셨습니다. 지금은 온천에 아무도 없
그는 온천물이 빠지도록 모래주머니 하나를 치우고 그 앞에 앉아 머리 타래를 풀었다. 머리 타래는 한 발이나 되는 듯 길었다. 그는 그 긴 머리채를 둘둘 말아 쥐고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빨래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듯이 주먹으로 머리채를 두드리며 ‘세탁’했다.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갈빗대에서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많이 먹지 않는 바바, 사람이 없는 꼭두새벽에 목욕하러 나오는 바바, 말이 없는 바바 ……. 멋있었다. 시시한 사두 같지 않았다. 그는 머리채를 뒤집어서 두드리고, 다시 뒤집어서 두드리기를 두어 번 거듭한 뒤 물속에다
밥상을 대충 치운 후에 체링과 세따가 제일 먼저 온천욕을 하러 나갔다. 몽사와 나도 잠시 후 뒤따라갔다. 우리가 큰 바위 위에 겉옷을 벗어 두고 온천탕으로 내려갔을 때 체링과 세따의 코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바느질로 만든 면 소재의 펑퍼짐한 속바지와 꽉 끼는 속적삼 차림의 두 여성은 우리가 들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느라고 몸을 움직였다. 우리는 그녀들의 맞은편에 들어앉았다. 몽사는 기분 좋은 신음 소리를 냈지만 나는 무연한 척하고 오래 버티기가 뭣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발을 쭉 펼 수도 없었다. 가
부엌에 살림이 펼쳐졌다. 석유 버너, 석유통, 압력솥, 냄비, 국자, 쟁반, 숟가락, 물동이 등등이었다. 식량도 나왔다. 부탄 여성들은 말린 야크 고기와 붉은 고추 말린 것, 찐쌀 등을 가져왔다. 우리는 쌀과 밀가루 차 등등이었다. 아네이는 자기네 부엌살림부터 정리해 놓더니 곧장 버너를 피웠다. 아네이는 절에서도 공양주 역할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함석으로 만든 물동이를 들고 나가 샘에서 물을 퍼다 주기를 몇 차례 했다. 그 사이에 두 나라 여성들은 모종의 합의를 이루어 냈다. 부엌은 하나고 어차피 식구가 되었으니 하루
다음날 아침, 우리 넷은 욕숨 터미널에 나가 갱톡에서 오는 버스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내렸기 때문에 자리가 넉넉할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느라고 맨 나중에 올라온 몽사가 앉을 자리는 운전석의 엔진 덮개 위 밖에 없었다. 그는 거기 앉아서도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카메라는 창밖 풍경을 찍는가 하면 승객들도 찍었다. 그는 우리를 찍는 척하면서 우리 앞좌석에 앉아 있는 특이한 패션의 세 여성도 찍었는데 그녀들은 우리가 조레탕 온천 마을의 정류장에서 내릴 때 같이 내렸다. 내리면서 보니 그녀들도 압력솥이며 석유 버너를 꾸려
마당의 탁자에서 세 사람이 뜨거운 블랙 티를 한 잔 씩 비울 때까지 몽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취생은 짜파티를 만들겠다며 부엌에 들어갔다. 스님도 취생을 따라 부엌으로 갔다. 잠시 후 부엌에서 석유 버너 타는 냄새와 팬에서 구워지는 짜파티 냄새가 마당으로 흘러나와 시장기를 자극했다. 내가 부엌 쪽에 대고 말했다. “몽사 선생이 혹시 터미널이나 제 거처로 간 것은 아닐까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짜파티가 준비된 후에도 몽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끼리 먹기 시작했다. “금방 구운
일기장을 덮을 때 쯤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새들의 노래는 가깝거나 먼 곳에서 활기차게 이어졌는데, 일순 뚝 그치면서 찾아온 정적 속에서 작은 방울이 구를 때 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르르르 ...... 또르르르 ...... 또르르르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떤 곳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이명이나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한 마리 새가 제 흥에 겨워 노래하는 소리였다. 또르르르 우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다른 새들의 활기찬 노래에 묻혀 있다가 다른 새들이 무리지어 부르는 노래가 그칠 때만 잠시 들리는지도 몰랐다. 또르르르
몽사는 물론 씩씩하게 걸어갔지만 혼자라서 쓸쓸하게 보였다. 다르질링의 호리 축제 때 그 광란의 골목을 빠져 나가던 몽사와 취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금송 숲에 있을 두 여성의 모습도 떠올랐다. 귀보시라고 했던가? 남의 하소연이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보시. 거슬린다는 기색 없이, 판단이나 조언도 없이, 그냥 끝없이 잘 들어주는 보시. 스님은 취생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취생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듣고, 풀이 눕는 소리를 듣고, 높이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짓 소리를 들어주
그 날 게스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이틀 동안 혼자 두부디 곰파 쪽으로 산책을 다녔다. 사흘 뒤에는 북쪽 마을의 동포 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갔었다. 몽사 혼자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갔지만 세 사람 다 없었다. 혹시 만날까 싶어서 일부러 금송 숲을 에도는 먼 길을 택해서 걸었지만 못 만났다. 거처에 돌아오니 몽사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메모는 로 되어 있었다. 몽사는 버스 종점 식당의 차오민을 짜장면이라고 불렀던 게 기억났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 나도 종점 식당에 가서
관이 바위 위에서 화목을 쌓은 단 위로 옮겨지자 승려들의 염불 소리가 커졌다. 나팔 소리, 북 소리도 커졌다. 마을 남자 네 명이 횃불을 하나 씩 나눠들고 화목 열두 단 네 귀퉁이에 각각 불을 붙였다. 붉은 불꽃과 누런 연기가 솟아오르자 마을 남자들은 검불을 모아 단 사이로 쑤셔 넣었다. 긴 대나무에 매단 그릇으로 양동이에 든 버터를 떠서 나무에 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 몽사는 침착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번 여행에서 건진 가장 값진 사진이 되겠지만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눈앞의 영상
출상 행렬이 십리 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망자가 승려로 살았다는 두브디 Dubdi 곰파였다. 시킴 왕국 건국 당시(1701년)에 건립되었다는 이 곰파는 승려들이 떠난 후 퇴락하고 있었지만 상여가 오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자 활기를 띠었다. 상여는 곰파 앞마당을 세 번 천천히 돈 후 법당 앞에 내려졌다. 한 승려가 법당에서 나와 뚱바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으로 싼 위패를 모셔 들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서 요령을 흔들며 염불 하는 소리가 났다. 스님들이 법당에서 염불을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돌을 쌓아서 만든 오래 된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