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은 몇 년 전인가? 37년 전이다. 적음 형이 33세가 된 그 해에 나는 28세였다. 나는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대문구 교남동의 잡지사였다. 적음 형은 술값이 떨어지면 여기저기 전화를 했는데, 그중 한 군데가 내 직장이었다. ‘형이다’로 시작해서 ‘돈 좀 있나?’로 이어지는 형의 전화는 사실 반갑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감 때는 짜증도 났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 하세요’ 이러면 ‘나중에 언제?’하고 물었다. ‘형, 전화 끊는다. 미안.’이러기도 했다. 셋방을 얻어 결혼 생활을 시작한 나에
적음 형이 흑석동 어느 골목에 방을 얻어 살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기억이 뒤죽박죽 뒤엉켜서 갈피를 못 잡겠지만 나는 그 방에서 적음 형이 구술하는 육성 원고를 타자기로 기록하고 있었다. 적음 형은 종이에 제목들만 나열해 벽에 붙여 놓고 내용은 그날그날 즉석에서 만들어 냈다. 나는 늘 한 손에는 타자기,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들고 적음 형에게 갔다. 방문을 열고 종이 봉투를 내밀면 적음 형은 염화시중 같은 미소를 지었다. 빙그레 웃는 입가에서 곧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는 앉은뱅이 밥상에 타자기를 놓고 앉는다. 내 준비는 끝난
대학 신문의 공모전에 K 형의 소설이 당선된 해는 언제였을까?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복학해서였을까? 기억이 확실치 않다. 일단 1976년이라고 해 두자. 70학번(69학번이라는 설도 있었다) 복학생이었던 K 형은 특별한 군대 생활을 했다. 카투사로 미2시단 제주도 휴양소에서 근무하다가 미군들의 흑백 갈등에 휘말려 병장 때 국군에 편입되었다. K 형은 전방 부대 소총 소대에 재배치되었는데 병장 대우를 못 받았다. 카투사에서, 그것도 제주도 휴양소에서 근무한 죄로 소대 내무반 최하위 졸병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며 지난한
적음 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1949년생이다. 처음 만났던 1975년에 우리는 둘 다 20대였다. 스물 두 살의 내가 스물일곱 살의 적음 형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선시를 읽는 듯 신비스러웠다. 적음 형의 시는 한문을 번역한 선시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운율이 느껴졌다. 글씨체는 짧고 꼬불거리는 터럭을 모아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듯, 여차하면 바람에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 적음 형의 서체를 누구는 음모정렬체라고도 평했다. 악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웃자고 한 평인데 딱 들어맞았다. 적음 형은 내 공책에 써 준 자기
작가 박인이 낸 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에 수록된 단편소설 속에서 적음 형을 만났다. 여러 해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적음 형은 미아리 시절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녔던 선배이다. 박인은 적음 형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사람임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내 기억에는 적음 형을 그렇게 진실하게 대했던 후배는 많지 않다. 함부로 대하고 반말했던 후배, 약소하나마 지출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미리 내빼는 후배, 심지어 발길질을 했던 후배도 있었다. 술집에 잡혀 놓고(앉혀 놓고) 도망치는 데 필요한 볼모로 써 먹은 후배도 있었다.
꿈 없는 잠이 있을까.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리라. 냄비의 물이 찌개를 끓이듯 잠은 꿈을 끓인다. 최근 며칠 동안 내 잠은 무슨 꿈을 끓였던 것일까? 온동네를 돌며 구걸해온 여러 가지 음식물들을 한꺼번에 쓸어 넣고 끓이는 다리 밑 걸인들의 죽처럼 빈곤하고 스산한 잡탕이 대부분이다. 꼬리지느러미가 달린 고등어 뼈, 갈치 대가리, 양파 껍질, 파 뿌리……. 잡탕 속에는 이런 박테리아성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도 함께 끓고 있었다. 그런 죽에서는 걸레나 행주 냄새가 날 뿐, 그것이 무슨 죽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내 머리가 아직 번쩍번
무슨 이유로 불려 나갔는지는 이제 희미하다. 그 때 생긴 이마 위의 흉터도 잘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 선생의 성난 괴물 같은 모습은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는 겨우 열두 살 먹은 6학년 어린이의 머리통을 수박 들 듯 두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서 칠판에다가 두두두두 소리가 나게 연속으로 쳐 박았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내 머리를 붙들었던 두 손을 뗐을 때 나는 어지러워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다.한 반에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제하며 수업을 진행해야 되는 교사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말썽
관광버스였는지 일반 시내 버스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비좁은 버스에 옹기종기 낑겨 앉아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떠났다. 첫 노래는 교가였다. 앞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뒷부분, 그러니까 후렴만 기억난다. “혜화, 혜화, 혜화, 하늘과 땅과 나라의 은혜로 우리는 변함이 없구한다.” ‘없구한다’가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없으련다’라는 뜻일 것이다. 김밥과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가지고(어떤 애들의 가방에는 바나나도 있었다) 학교 밖으로 멀리 나간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아이들은 자못 씩씩하게 노래했다. 교가보다 더욱 씩씩하게
혜화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아이들 중에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몇 안 된다. 모두 마지막 과외를 같이 했던 아이들인데 그중 하나는 성이 진 씨이다. 진은 아버지가 정신신경과 의사라고 했다. 집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맞은편에 있었는데 , 마당이 있는 2층 양옥이었다. 그 집에서 남녀 예닐곱 명이 함께 과외를 했다. 또 다른 아이는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올라가는 큰 길 오른쪽의 한옥에 사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성이 이 씨이다. 이 아이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던 것 같은데 집이 늘 조용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은 없다. 또 한 아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자주 꾸게 된 것은 1963년 5월 5일에 몇 시간 동안 미아가 되었던 일만 원인이 아닌 듯하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작용하는 것 같다. 우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 슬하를 떠나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닌 사실과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악몽 같은 학교생활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어린이 노래자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계동집 이층 큰 방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춰서 듣기도 했고, 책가방을 메고 라디오 가게 앞을 지나다가 한참 서서 듣기도 했다. 라디오 무대에 나온
1963년 5월 5일이었다. 그 날은 창경궁을 비롯한 서울의 궁이 무료로 개방된 날이었다. 아직 전학 수속이 안 된 나는 계동에 있었고 6촌 형제가 놀러왔기에 그를 따라서 돈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동물원이었다. 호랑이, 사자, 코끼리, 원숭이 같은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구경꾼들 속에서 6촌 형제를 놓친 곳은 원숭이 우리 앞이다. 아무리 둘러 봐도 그는 없었다. 거의 모든 인파가 동물원에 몰리고 있었기에 그 속에서 밀려다니면서 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혼자서 집을 찾기로 하고 돈화문을 찾았으나 내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따라 걷던 생각이 난다. 학교에 오갈 때 버스나 합승을 타기도 했지만 걸어 다닌 날이 더 많았다. 집을 나서서 원서동 고개에 이르면 징 박은 구둣발 소리가 몰려왔다. 왜정 때 순사들처럼 금색 단추가 반짝이는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쓴 고등 학교 학생들이 무섭도록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왔다. 잠시 주눅이 들었다. 돈화문 앞마당에 이르러 원남동 넘어가는 길에 서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면 안심이 되곤 했다. 종묘로 넘어가는 육교 밑을 지나면 내리막길, 내리막길 끝에서 만나는 사거리에서 발길을 창경궁 쪽으로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