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5-4 / 발자국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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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4 / 발자국 소리
  • 김홍성
    김홍성 ktmwind@naver.com
  • 승인 2021.01.21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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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음 형이 흑석동 어느 골목에 방을 얻어 살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기억이 뒤죽박죽 뒤엉켜서 갈피를 못 잡겠지만 나는 그 방에서 적음 형이 구술하는 육성 원고를 타자기로 기록하고 있었다. 적음 형은 종이에 제목들만 나열해 벽에 붙여 놓고 내용은 그날그날 즉석에서 만들어 냈다.

 

나는 늘 한 손에는 타자기,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들고 적음 형에게 갔다. 방문을 열고 종이 봉투를 내밀면 적음 형은 염화시중 같은 미소를 지었다. 빙그레 웃는 입가에서 곧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는 앉은뱅이 밥상에 타자기를 놓고 앉는다. 내 준비는 끝난 것이다. 적음 형도 나름대로 구술할 준비를 한다. 종이봉투에 든 소주병 뚜껑을 따고 병째로 한 모금 목젖을 적신 후에 헛기침을 몇 번 하면 적음 형의 준비도 끝난다. 적음 형은 소주병은 그대로 손에 들고 첫 문장의 첫 대목을 읊는다. 적음 형은 내가 독수리 타법인 것을 감안하여 천천히 읊는다. 부호와 행을 바꾸라는 명령어도 빠트리지 않는다.

 

들린다. 울울한 숲을 헤치고

탁탁탁 탁 탁타탁 타락 탁탁타

들린다 끝에 마침표 찍고 행 갈아라.”

틱 치리릭 촤아

산 너머 고개 너머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타 타타 타타 타앙 팅팅팅티티 투투투 티티

행 갈아라.”

틱 치치리 촤아

 

나는 타자기 레버를 옆으로 밀어서 행을 바꾸고 적음 형을 바라본다. 적음 형은 선 채로 소주병을 입에 대고 다시 한 모금 목젖을 적신 후 문장을 읊는다. 나는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기를 두드린다. 갑갑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한 줄 한 줄 불러 주는 대로 기록하여 완성된 문장을 읽으면 그럴 듯 했다. 고치기 위해 일부러 손을 댈 데가 안 보였다. 적음 형은 어딘가에 이미 써 둔 원고를 통째로 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적음 형은 소변을 방안에서 해결했다. 소변을 채워서 벽 밑에 주르르 세워 놓은 빈 소주병이 두 줄이 넘었던 때도 있다. 소주가 들어간 입에서 시가 나오고 목구멍을 넘어간 소주는 소변이 되어서 다시 빈 소주병을 채웠다. 적음 형의 흑석동 그 방은 그토록 적나라한 시의 산실이었다. 한 번은 나도 소주병에 오줌을 누려고 시도해 봤지만 그것도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적음 형은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오줌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병이 넘칠라 치면 어느 새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그 옆의 빈 병에 나머지 소변을 채웠다. 그렇게 소변을 보고난 적음 형은 다시 일어서서 우렁찬 문장을 읊었다.

 

들린다, 길 잃고 헤매다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오직 한 번의 포옹을 위하여

피 흘리며 쫓아오는 그대 발자국 소리

둥둥둥 둥둥둥 가슴 울리는 발자국 소리

충만함으로 살아

기어이 나는 살아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새겨들으니

오지 않을 듯, 그러나

분명히 찾아올 황홀한 황홀한 발자국 소리

 

- 산문집 저문 날의 목판화중에서 발췌

 

타자기 작업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과연 끝까지 도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산문집이 출간 되었다. 제목이 저문 날의 목판화였는지, ‘내 어디엔들 머물 곳 없으랴였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둘 중 하나는 먼저 나온 것을 재편집하여 제목을 바꾸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적음 형은 그 산문집 덕을 톡톡히 보았다. 책이 팔려서 인세를 많이 챙겼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산문집은 훗날 응암동 근처에 있었던 마리아 갱생원에서 풀려나는 데 기여했고, 더 훗날에는 모녀 보살이 사는 집에서 시봉을 받으며 지내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덕을 본 얘기도 여기에 기록할 필요가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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