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속 성장의 행복한 길은 걸을 수 없다.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절망, 최근 코로나19의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외면할 수 없다. 시민들은 불확실한 삶 앞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쉽사리 두려움이란 감정에 잠식당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종종 타인(기득권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 분노, 비난과 뒤섞이며 이성적 사고와 건설적 협력 대신 손쉬운 타자화 전략을 선택해 나와 타인의 날 선 경계를 짓게 한다.성별, 종교, 직업, 나이, 장애, 성적 지향
내가 그런 집에 살았었는데그대처럼 사랑하는 법을 알았으면라이터로불장난 할 일도 없었을텐데내 고집으로 일어난 화재에솜이불이 타고묶어놓은 개들이 짖어서그대가 잠에 깰 일도 없었을텐데밥을 짓고 담배를 피다발등에 재가 떨어져몸이 서두를 때면겨울에만 보이는 별자리에마음 뺏길 일도 없이추운 밤에 이를 부딪치며나는 또 떠나게 생겼어그대에게 배운 걸누구에게 알려줄까 떠올리면몸이 말썽이야나 좀 용서해줘내 입이 거짓말을 담지 않으면허연 반점이 나이것봐 사실은 밥알을 삼키지 않은건데도사람 속눈썹을 붙인 인형이 있다니까쪼르르 달려온 그대는담배를 처음 피
운무는 가느다란 이슬비로 변했다. 이슬비가 아니라 무거운 운무였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달맞이꽃이 형광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네이, 체링, 세따가 출렁다리 앞까지 따라왔다. 젖은 어깨에 걸쳐진 검은 머리칼에 이슬이 대롱대롱 맺혀있는 여자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바바에게 들리겠다고 먼저 떠났던 몽사는 출렁다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자 바바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어디 갔을까요?”“잠깐 출타했나 싶었죠. 그런데 앞마당이 평소 느낌과 달리 휑해서 굴에 들어가 보니 접어서 방석으로 쓰던 담요며 담요 위에
몽사는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바바를 따라 가고 싶은 미련이 남았다.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 배낭을 벗어 던지면 바바와 같이 걸을 수 있을 거다. 담요나 하나 장만하여 둘둘 말아서 어깨에 걸치고 걷는 거다. 바바가 자는 곳에서 자고, 바바 같은 깡통을 장만하여 바바와 함께 탁발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 달 만 고생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될 거다. 나머지 여정은 6개월이든 1년이든 큰 문제가 없을 거다. ...... 문제는 내가 물것을 잘 타기 때문에 벌레가 나만 문다는 데 있다. 그것도 견디다 보면
봄비자박자박 똑똑똑발자욱 소리문 두드리는 소리'누구세요? 누가 오셨나요?'아무 대답 없더니아침 햇살 반짝여문밖에 나갔어요.아! 나뭇가지에 물기가껑충 올라왔어요.
숙소에 돌아와 장 보따리를 풀어 놓고 우리는 언제 떠날 것인가를 의논했다. 내일 아니면 모레가 적당했다. 또한 모레보다는 내일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부탄 여성들은 몹시 서운해 했다. 특히 아네이가 그랬다. 아네이는 그새 정이 들어서 눈물을 글썽였다. 몽사는 바바에게 우리가 떠난다는 말을 전하러 갔다. 취생은 슬퍼하는 부탄 여성들을 위로하고 스님은 말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나는 스님을 거들었다. 스님은 감자를 넣은 수제비를 끓였다. 홑이불 수제비라고 했던가? 밀가루 반죽을 홑이불처
해파리가 있는 어항양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여인들은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담겨있는 게 아니라 참맺혀있는 게 핏방울 따위가 아니라철이 없는 순간들을 채워야궤도는 돌고 돌아오는 신나는 일을 겪고나면내일이 두려워진다니까요 기포가 같은 개수로 떠오르다가여인 하나가 문득 깨어나면여기가 바다인가 싶다가도다른 여인이 길게 늘어져있으면천국인가 싶어서 꿈이 이어지는 걸 보니아직도 이곳은 여름인가봐어항속에 여전한 해파리는죽은 척하며 바깥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새벽에 문득 들려오는 노래에나는 서글퍼지고조금만 푸르스름해진다면정말이고 울어버리
예스24(대표 김석환)가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도서 기획전과 도서 리뷰 이벤트를 진행한다. 코로나19로 집콕 중인 독자들이 집에서도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가을과 어울리는 도서를 중심으로 마련했다.도서 기획전은 예스24에서 양질의 도서 리뷰를 작성해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예스 블로거’들이 선택한 도서로 구성했다. 예스 블로거 추천 도서는 ‘코로나 사피엔스’,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언제나 길은 있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등이다.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도서로는 ‘데미안’, ‘죽
소설가 정지아와 장류진이 ‘제7회 심훈문학대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단편소설 정지아의 ‘검은 방’과 장류진의 ‘도쿄의 마야’이다.정지아 소설가는 1990년 계간 에서 장편 ‘빨치산의 딸’을 출간했다. 1996년 ‘고욤나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장류진 소설가는 2018년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20년 소설 ‘연수’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심훈문학대상은
몽사와 나는 영감네 가게에서 씨킴 위스키를 사다가 마시기도 했다. 그 와중에 취생과 몽사의 속사정을 어설프게나마 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다 같이 앉아서 무상 스님의 인도 만행에 대해 들으면서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이 물어보는 말에도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불교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거나, 말로는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따또바니의 온천
푸르고 푸르러 마냥 푸르러허튼 바람 한줄기 자리잡을 공간 없었다짙푸른 잎은 싱싱하게 세상을 보듬는 줄 알았다녹색 핏방울 뚝뚝 떨어지는 때적폐는 청산의 대상일뿐 협치의 상대가 아니라는쌓이고 쌓인 울분 피토하듯 쏟아내도메아리도 남기지 못하고 잦아든다도대체 어디까지 모두가 인정하는 푸르름이냐짙푸른 나뭇잎 속으로 시든 잎들이 고개 숙이고잎과 잎사이 죽은 잎들이 사열할 때혹독한 바람 불어와 나뭇가지 힘차게 흔들면숨어 있던 썩은 잎들 일제히 우수수 떨어지고마른 가지는 툭툭 부러져 땅 위에 나뒹군다별들도 속삭이다 울고달빛 속에 춤추
‘까똑왔숑!’ “응? 바쁜데 누구지?” 정신없는 미소로 손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요란하게 울린 남편의 카톡 메시지. [너 어디야? 고3 엄마가 돼서 생각이란 걸 하는 거냐? 지금이 어떤 때인데 제정신이면 당장 그만둬. 적어도 막둥이 시험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그만두라고.] 무방비 상태에서 날아온 익숙하고 일방적인 메시지. 아르바이트도 엄연히 신뢰를 기반으로 계약을 하고 일하는 곳인데, 앞뒤 설명 없이 날아온 메시지는 또 한 번 내 마음을 쿵하고 울린다.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많지는 않지만 쏠쏠했던 부수입과 무엇보다도 갱년기의
잠시 후 바위에서 아네이가 내려왔다. 아네이는 굿 모닝, 밝게 인사하고는 탕으로 쑥 들어와 앉았다. 속옷이 물에 젖자 살이 비쳤다. 흰 면내의가 감싸고 있는 크고 탱탱한 젖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머리를 쳐들고 짐짓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서른이 넘은 나이라면 사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 내외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아네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끈끈한 인도 가요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풀주머니 같은 아네이의 살집이 감은 눈 속에 어른댔다. “코리아에도 이런 온천이 있나요?”콧노래는 언제 끝났
윤직원 윤한로(‘직원’이라 함은 거의 옛날 시골 훈장님쯤 되려나)우리 문학 가운데 보물 같은 소설이 있는데바로 채만식「태평천하」입지요거기 주인공 이름하여 윤두꺼비 윤두섭은한때 노름꾼 아버지가 물려준 집과 재산을억착같이 불리고 늘리고 닥닥 긁어모은 덕으루다그 잘난 만석꾼이 됐으며 그러구러이제 한창 구한말 나라가 무너져 가고탐관오리, 화적패가 날뛰던 개판 시절이 ‘직원’을 돈으로 삽니다만아무 날 느닷없이 화적을 맞은지라저 피 같은 재산과 재물몽조리 불타고 빼앗기고 맙니다요그리하여 우리 주인공 윤직원 영감님땅을 치며 이렇게 부르짖습니다오
우리는 바바와 급속히 친해졌다. 바바의 섭생을 위해 마을에 가서 채소나 계란이나 우유를 구해 주기도 했는데 바바는 계란을 먹지 않았다. 바바는 계란을 감자처럼 모닥불에 구워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몽사는 첫날부터 바바와 함께 살다시피 하더니 며칠 후에는 바바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모닥불을 지펴서 취사하고 탁발 나가는 모습도 촬영했다. 바바는 뼈만 남은 사람이지만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사지를 자유자재로 비틀어서 꼬고 돌릴 수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몸통을 비롯한 사지의 일정한 근육만 부분별로 움직이기도 했다
“몽사는 저에게 말했죠. 부인과 이혼하겠다고. 하지만 이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이 여행이 끝나면 몽사는 부인에게로, 저는 큰 이모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서는 취생의 눈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보았던 것일까? 눈물이 맺히는 순간 취생의 표정에 서릿발 같은 미소가 서렸었다. 슬픔이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만든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 있는 어떤 각오가 한 순간 빛처럼 반사된 미소였다. 이미 걷기 시작한 취생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내가 물었다. “스
영화 감독 그 아이는 항상 거짓말만 한다그런데 돈은 제때에 갚고 제때에 빌린다그런 웃기는 애가 곪아터진 이야기만 한다고깃집에서 일하는 자신의 순정에 대하여 그럼 또 그림쟁이가 있다고 한다미술은 배우는 게 아니라면서 노트에 누드화가 가득하다남자와 아끼는 밤을 나눈다솔직히 나와 나눠줬으면 싶었는데헤테로의 정의를 모른다 그 사이의 나는 시집을 싫어하게 되었다그렇게 됐다 낭만을 곪아터진 애에게 배웠다책장에 꽂혀있는 시를 찢어 일기장에 붙였다이건 내 작품이라고 싸인을 남기랬다 지겨운 하루의 연속은 회전목마 때문이다교복입고 단체사진 찍는 것은
“그렇게 야윈 몸으로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 바바는 나를 한 번 흘낏 보더니 다시 불을 보며 대답했다. “걱정 마라. 가느다란 시냇물도 계속 흐르기만 하면 결국 바다에 이른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제부터는 조금씩 섭생을 시작할 것이다.”바바는 깡통을 가리키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몽사가 놀란 표정으로 바바에게 물었다. “여태까지는 안 먹었냐?”“한 달 넘게 먹지 않았다.”“엥?” “단식했다는 말이군요. 그러니까 저렇게 갈빗대만 앙상한 거 아니겠어요?” 취생이 이 말에 무상 스
손님들이 왔는데 대접할 게 없으니 불이라도 쬐고 가라는 건지 바바는 깡통을 내려놓고는 즉시 불씨가 남아 있는 통나무 앞에 앉아 불을 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통나무 밑동에 검불을 모아 쑤셔 넣고 엎드려 후우우 후우우 몇 번 길게 불자 불꽃이 살아났다. 불 주변에 둘러앉은 우리 손님들은 다들 '거 참 신통하군' 하는 눈치였다. 불꽃을 살려 놓은 바바는 스적스적 마당 주변의 덤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삭정이들을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옆에 놓고 한 가지 한 가지 차곡차곡 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엎드려서 후우
전설과 어머니옥피리 소리 절절하여 하늘 궁전까지 들렸더라.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말하기를잠못이루는 공주님 잠들게 해달라피리소리 다시 청하였는디피리쟁이 석주 그 청을 들어주었더라.선녀가 고마워하며옥비녀 뽑아줄 제하마 받지 못하고 땅에 떨어뜨리니비녀 그만 깨져 버렸더라.옥비녀 떨어진 자리비녀 닮은 꽃이 피더라.어머니는 생전 쪽진 머리로 사셨다.색경 앞에 앉으시고 대충 얼기빚으로 다듬고이내 참빚으로 매무새를 하시곤꼼꼼히 묶은 다음쪽을 짓고 비녀를 꽂으셨다.빚질 단정히 마친 다음빠진 머리카락도정성껏 다듬어 모아두셨지.한 주먹 모아지면어김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