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여배우 장화자가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하고 물었을 때 자칭 사업가인 강호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둘 만의 공간으로 이동했으면 거기에 합당하게 굴어야지 달랑 외투 하나만 벗고 의자에 착석한 채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기껏 하는 말이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라니.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뭘 말하는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 참 많이도 들어봤던 거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으로도 나오고 노래에서도 수도 없이 나오고 오랜만에 책이나 한 줄 읽어볼까 하면 또 튀어나오는 말이 그거였다.
99.9퍼센트는 꽝이지만 40대의 동영상 제작자 즉 감독은 왕년의 영화배우 장화자와의 약속시간이 좀 남아 경륜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면밀한 분석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10만 원을 질렀는 바, 걸리면 대박이고 허나 99.9퍼센트는 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주머니에 복권 탄 돈이 두둑이 있었기에 감독은 하품을 하며 자전거가 달려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옆에서 철없는 청춘남녀가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뒤고 급기야 아아아아 하는 탄식을 내지르며 머리를 감싸는 걸 보니 순진하게도 보이고 애틋하게도 보였다. 경주는 복승식
여배우의 결핍의 눈동자를 보며 한때 주연도 한 적 있고 그 뇌쇄적인 몸매와 심상치 않은 용모로 인해 일부 트집쟁이 인간들로부터 연기력 논란도 일으킨 바 있는 장화자는, 한 번 영화작업을 한 바 있는 40대 영화감독과 깊은 밤 술자리를 하며 행복에 대한 주제를 놓고 담화 중이었다. 행복이란 걸 느껴본 지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는 여인의 말에 감독은 동정심과 함께 야릇한 애정 같은 걸 느꼈는데, 한편으론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여인이 결핍의 눈동자를 하고 뭔가 갈구하는 것 같은가 하고 생각했다. 행복이란, 감독에게는 물론 영화
풀잎 윤 한 로늦을지라도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간다 간밤에 봄비 내리고두 닢 세 닢 네 닢두 닢 한 닢반 닢마치 *핵교 가는 길에 피듯 푸르게 피었네우린 이런 날 비록늦을지라도, 구질구질할지라도 끝까지 걸어간다네* 핵교 : 교도소의 은어시작 메모오늘도 배낭에 등산화를 신고 산에 가듯 출근한다. 걷고 또 걸어서 간다. 이제 우리겐 걷는 게 힘이리. 옛날에 지각의 대명사 오형이 ‘지각하는 날은 아스팔트 뚫고 나온 풀들 보며 한 발짝 한 발짝 철학자가 된 듯하다고, 시인이 된 듯하다고, 투사가 된 듯하다고’ 했다. 또 ‘만인한테 애인이
40대의 선글라스를 윗주머니에 꽂은 사내가 `동영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고 고대해에게 말했을 때 고대해는 동영상이 영화, 드라마, 광고 그런 걸 의미한다는 걸 캐치하고 있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델로서 모 남성잡지의 화보 12면을 책임지고 있는 주요 모델이자 저명 사진작가의 피사체로서 품위를 깨지 않고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사내는 고대해가 호들갑을 떨지도, 크게 흥분하지도, 쩔쩔매지도 않고 부처의 제자처럼 담담하게 나오자 담대한 여인이라는,
우리 동네 윤 한 로수풀우지 닭집수풀우지 세탁소, 엿공장아빠, 그저께 야쿠르트 아줌마랑우유 아저씨랑 결혼했대요, 헐 그러면?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 짓고서울대 아들 하나 쑥 낳으시래라사다리꼴 골목 사다리꼴 빌라사다리꼴 눈 맑은 사람들 동네시작 메모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붙잡고 싸우고 있다. 누가 죽여주는 소설이라고 해서 보는데 지금 너무나 지겹다, 후회막급이다. 우리와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게 틀린 사람들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리라. 남자와 여자가 마구잡이로 만나고 사귀고 사랑하고 헤어지
도도녀의 경우 우리는 흔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보단 감각적인 삶, 그리고 물질로 처바르는 삶, 단가가 비싼 사치용품의 빈번한 구입과 호화로운 장소 출입, 최신 유행에 대한 민감성, 거기에 남자의 진정성을 비웃는 깨지는 듯한 웃음을 언뜻 떠올릴 수 있겠다. 그리고 약간만 자극이 덜 하거나 일상적인 것들의 나열이 따른다면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트는 걸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생각하게도 된다. 이러한 도도녀는 자신의 값어치를 상당히 높게 매김으로써 먹는 거나 입는 거 드나드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만나는 남자의
지난주에 도도녀가 남자를 재는 잣대의 기준이 도대체 뭐냐는 과제를 던진 바 있다. 즉 까칠한 여자는 진정 남자에게서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선 전에도 일부 언급한 바 있다. 대체로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건 첫 번째가 일편단심, 두 번째로 책임감, 그리고 배려, 유머, 존중 등등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경제적 안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대다수 여성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경제적 안정, 이건 다소 소박한 느낌을 주는데 남성들은 그러한 소리만 들어도 심한 스트레스와 압박을 느끼며
가을 저녁 윤 한 로은행나무 삼거리 배낭 맨 할매들쑤월쑤월 한떼거리 올라탄다구린내가 코를 찌른다 아유 증말, 파르라니 약이 오른 시내버스가 펄쩍 솟구친다시러베아들 같으니라구시작 메모위대한 철학자이며 문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음의 숭배자였는데 노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로 혐오했다. 그러니 그리이스 아폴로와 비너스 신들의 얼굴과 육체야말로 온통 열몇살 된 애들 거로 채워질 수밖에. 아, 그러나 아흔살이나 된 엘아자르,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고 했으나 형장으로 끌려가 목숨이 날아갈지언정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
지각 윤 한 로나는 재수를 해서 내 친구들은 나보다 한 살이 적다그래도 나는 좋다는 정정구가 오늘도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다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직수굿복도 끝 비둘기 발가락을 보고 있는 갑다종종종새우젓 냄새를 피우며바짝 다가올 것 같아한쪽 팔을 바꿔 짚어도 먹물을 찍은 듯한 눈알 이젠 겁도 없어 날아갈 줄 모른다바람 한 점 없는교실 바깥 맑은 날씨 이런 날은어딘가로 떠나가고파, 흘러가고파흰구름 깔치 삼아 시작 메모지각생들 중에는 성격 좋은 애들이 아주 많다. 온순하고 따뜻하고 꾸밈이 없고 인간적이다. 이해력과 상상력이 풍부하고 세상
마돈걸의 ‘씻으라’는 명령에 따라, 유세련은 김이 뿌옇게 서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였다. 유세련은 욕실에 들어가서야 팬티를 벗었는데, 없이 산다고 여자 앞에서 알몸으로 나돌아 다니지는 않는다는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청결하고 비누 향기가 나는 남자의 몸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땀내 나는 야성적인 몸에 집착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유세련은 잘 알고 있었다. 마돈걸은 형편에 따라,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청결에서 땀내까지’ 매우 폭넓은 기호를 보였으나, 오늘은 거칠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듯 보
‘모텔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것이 모텔을 한 번이라도 이용해 본 자들의 한결 같은 감회다. 과연 모텔은 그러했다. 이름과 나이, 직업과 신용카드 색깔을 물어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베드는 그 눈부신 흰 빛으로 열려 있었다. 유세련은 베드에 바로 몸을 던질 만큼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베드는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보다 특별한 주인을 맞이하여, 베드도 긴장하며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9층 909호실 더블 베드는 마치 순결한 처녀처럼 떨고 있는 듯했다. 오늘 낮에만 해도 남녀 도합 170킬로그
맑은 하늘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쬐는 토요일 아침, 백팔만은 당나귀에 올라타고 장정에 올랐다. 과천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타박타박 가다보면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는 당도할 터였다. 승용차의 경우 운전자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간 큰일 나지만, 당나귀는 주인이 공상에 잠겨 있든 꾸벅꾸벅 졸든 개의치 않고 눈앞의 장애물을 잘 피해가며 묵묵히 갈 길을 갔다. 때로 젊은 여성의 꽁무니를 따라가기도 하는 건 자기도 모르게 주인의 마음을 닮은 탓이었다. 마침내 당도한 과천 경마장엔, 눈부시게 차려입
당나귀 신사 백팔만은 작전이 걸린 칠성 테크 주식으로 벌어들인 쥐꼬리 수익에 감격한 데다 다른 생각도 좀 있어 마돈걸을 정갈한 일식집으로 모셨다. 시간은 오후 네 시 경으로, 이러한 시간에 중년남녀가 호젓이 입장하여 자연산 회 한 접시를 시켜 먹는 건 일식집 사장이 보기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일식집 사장은 수완 좋은 아주머니를 붙여 그들이 참이슬 대신 몸뚱어리를 은은하게 덥힐 수 있는 사케를 마시게끔 유도하였다. “오빠, 어디서 정보를 들은 거야?” 마돈걸은 사케가 석 잔도 돌기 전에 칠성테크가 왜 올랐는지 궁금해 죽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