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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4) - 3번과 9번에 걸어!

서석훈
  • 입력 2010.06.0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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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맑은 하늘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쬐는 토요일 아침, 백팔만은 당나귀에 올라타고 장정에 올랐다. 과천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타박타박 가다보면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는 당도할 터였다. 승용차의 경우 운전자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간 큰일 나지만, 당나귀는 주인이 공상에 잠겨 있든 꾸벅꾸벅 졸든 개의치 않고 눈앞의 장애물을 잘 피해가며 묵묵히 갈 길을 갔다. 때로 젊은 여성의 꽁무니를 따라가기도 하는 건 자기도 모르게 주인의 마음을 닮은 탓이었다.
마침내 당도한 과천 경마장엔, 눈부시게 차려입은 마돈걸이 둘만의 은밀한 접선 장소인 라일락 밑에서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백팔만이 팔아버린 칠성테크를 몰래 사서 재미를 보고 있는데다, 간밤에 뉴욕시장이 폭등했다는 반가운 뉴스까지 들어와 있어 사뭇 월요일 장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경마야 미국, 영국, 호주, 홍콩, 일본의 어느 존재 없는 말이 방금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들, 과천 경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천지 폭풍’이 무서운 속도로 일등을 했다 하니, 족보를 따지면 사촌 되는 너도 기운 내서 달려라, 이런 주문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경기는 철저하게 고독한 승부의 시간들로 짜여있었다. 경마는 물론 주식이 아니지만 석유도 축구도 다이아몬드도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혼자 뛰며 혼자 머리를 들어 달려온 길을 돌아보는 고독한 행위였다. 응축된 시간의 순수한 몰입, 관전자도 기수도 말도, 그들은 모두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시간을 통과해 간다. 어쩜 결과는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숨 막히는 새로이 창조된 시간에 비하면. 물론 백팔만도 마돈걸도 그런 철학적인 잡념과는 거리가 먼, 결과에 웃고 우는 정상적인 아저씨, 아주머니였다.
“3번과 9번에 걸어.” 마돈걸이 짧게 딱 한 마디 했다. 그러자 그 짧은 말이 권위를 갖추기 시작했고 백팔만은 이유를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승부를 한 번 걸라는 의미로 들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 큰돈을 번 적이 없었지만 이번은 왠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이 들었다.
백팔만은 돈을 걸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무엇이 망막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3번은 자타공인 최강자였지만 9번은 복병마였다. 복병마는 복병마 그 이름으로 그쳤다. 두 번째 결승선은, 경마 정보지가 조심스럽게 예견했듯, 검증된 강자 11번의 차지였다. 백팔만은 망연자실했다. 건 돈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마돈걸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다음 주에 계속)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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