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걸의 ‘씻으라’는 명령에 따라, 유세련은 김이 뿌옇게 서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였다. 유세련은 욕실에 들어가서야 팬티를 벗었는데, 없이 산다고 여자 앞에서 알몸으로 나돌아 다니지는 않는다는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청결하고 비누 향기가 나는 남자의 몸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땀내 나는 야성적인 몸에 집착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유세련은 잘 알고 있었다. 마돈걸은 형편에 따라,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청결에서 땀내까지’ 매우 폭넓은 기호를 보였으나, 오늘은 거칠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듯 보
가 을 윤 한 로봉당 구석에 찬바람 나고 나무 잘하던 원재 형 머리 박박 깎고 군대를 가네김 풀풀 나는산 같은 고봉밥 오늘은 뚝딱, 해치우지 못하고반절도 못 먹어숟가락을 지우네어머니는 훌쩍훌쩍 자꾸만 우시네간 밤 장꽝에 떨어진 떫은 고욤 여남은 알 별처럼 으시시 새벽 서리 꼈네시작 메모가을이면 군대들을 많이 가는 것 같다. 서글프다. 나도 시월이십사일, 유엔데이 가을에 갔지만 형이 가던 모습은 유난히 가슴을 애리게 했다. 산 같은 고봉밥을 뚝딱 해치던 형이 몇 숟가락 넘기지 못했다. 하루종일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드러누워 있다가 겨
유세련은 마돈걸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알몸을 감싼 대형 타월이 어째서 흘러내리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타월의 양 끝을 묶지도 않았고 손으로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몸의 라인을 살려가며 앞뒤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냐 말이다. 결론은 그녀의 터질 듯 솟아오른 젖가슴이 타월이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는데, 타월도 남자가 벗겨줘야 하는 건지 유세련은 알 수가 없었다. 드레스의 뒷자크를 아래로 내리고 블라우스의 뒷단추를 하나하나 풀어준 적은 적잖이 있지만 타월을 벗겨준 적은 없었던 것이
천하의 바람둥이 유세련은 마돈걸이 얼른 다가와 뒤에서 군용 스푼처럼 포개지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기척이 없어 돌아보니 마돈걸은 소파에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희고 보송보송한 대형 타월로 알몸을 감싼 상태였다. 남자도 타월로 허리 아래를 감싸는 경우가 있는데 외국영화를 보면 마피아들이 사우나에서 그렇게 하고 사업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영화에서는 상체에 문신을 하고 있는 자들이 주로 나와 누군가 시비를 걸어달라고 눈에 힘을 주고 다녔다. 유세련은 문신이라곤 왼쪽 팔뚝의 쇠스랑 하나와 가슴골의 나비 한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형태를 손쉽게 추론해낼 수 있다. 첫째, 여자를 앞에 세워놓고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친 다음 위에서 입술을 찍어 누르는, 남녀 대다수가 선호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대한민국 청춘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카메라는 남녀의 옆얼굴을 크게 잡는데 왼쪽 얼굴이 자신 없는 여배우는 언제나 오른쪽만 노출시키게 된다. 두 번째는 여자를 벽에 밀어붙이고, 한 손은 그녀의 머리 위 벽 어딘가를 짚은 상태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여자는 엉덩이가 벽에 밀착해 크게 눌리는데 동시에 앞
바위 윤 한 로보미 골짜기에올 갈게도 개모과만 왕창 달았다비비틀린 모과나무 아래무녀리 같은 덕석 바위가무잡잡, 서내식이 작은 여편넨지적삼 가슴 풀어제치고 퍼질러 앉아설랑오입 담배 한 대 꼬실르는구만올참 갈 것이지하여트나 염생이 말목자리 뽑힌 등때기 쪼드락 볕 대근도 하고나시작 메모그전에는 산비탈 바위에 퍼질러 앉아 오입으로다 배운 담배를 피우는 촌 여편네들이 더러 있었다. 상주 보미 골짜기에 아버지 당숙인지 서내식 이라고 하는 이는 작은 마누라를 두고 살았는데 이이는 까무잡잡하니 그런 담배질도 곧잘 했다. 일, 사는 걱정에 대근한
여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하체에 힘이 빠지게 해 원나잇 투어로 이끄는 게 천하의 바람둥이 유세련의 장기인데, 마돈걸은 오히려 앞장서서 더 마시자고 하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커피나 한 잔 하자는 유세련의 건의는 바로 묵살 당했다. 그는 마돈걸에게 손목을 잡혀 요사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는 막걸리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예전에는 일일 노동자 아니면 마실 나온 동네 아저씨가 이런 곳에 주로 찾아와 사발에 철철 따른 걸쭉한 막걸리를 선 채로 단숨에 들이켜고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쓱 한 번 훔친 다음, 김치 한 조각
미국 본토 유학파 유세련이 송파구 육체파 마돈걸과 함께 강남의 한 와인 바에서 ‘메종’이라는 와인을 홀짝홀짝 마신지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났다. 비록 오늘 경마에서 돈은 잃었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아련한 밤까지 잃어버리는 건 너무나 아쉽다고 마돈걸은 느끼고 있었다. 유세련 또한 요 며칠 주식에서 깨먹고 오늘 낮엔 슬롯머신에서 호주머니를 탈탈 털렸지만 마돈걸과 함께 하는 이 밤은 예외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30대의 두 성숙한 육체가 와인과 함께 하는 강남의 밤은 홀로 지새는 원룸의 밤이나 아는 인간끼리 떠들썩하게 마셔대는 동네 호프집의
주식은 오르내리고 말은 질주하고 슬롯머신은 잭팟을 터뜨린다. 재미교포 유세련은 주식과 경마에도 남다른 애정이 있지만 슬롯머신은 엎드려 절할 만큼 좋아했다. 정선 카지노에 룸을 잡아놓고 날마다 하고 싶은 게 슬롯머신이었다. 여체가 댕기면, 문자 한 통에 바로 달려올 여자는 20대에서 50대까지, 40킬로에서 80킬로까지 족히 두 타스는 될 것이었다. 허나 돈도 돈이고 서울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산더미란 주로 어수룩한 물주를 꾀이는 일이고 돈푼깨나 있는 새 여자를 몸으로 후리는 일이었다. 사실 크게 한 탕 하면 그 모든 소소한
토요일의 마지막 레이스가 끝난 밤 시간, 오늘의 경기를 돌아보고 내일의 경기를 점쳐보며 동료와 함께 하는 소박한 술자리는 경마팬이라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돈을 잃었다고 한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일은 기필코 승리하리라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생이란 어차피 하나의 긴 승부임을 새삼 깨달으며, 경기 도중 내내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했던 가슴을 동료와 함께 찬 술로 식히는 이 정화의 시간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동료를 보고 있자면 심지어, 우리의 운명이 이와 같이 엮여 흘러가는구나 하는 감회마저 들며 숙연
막다른 길 윤 한 로길 한복판 벌거벗은이상의 아해들이 똥을 누네예닐곱 주른히 앉아 똥 누기 놀이를 하네 한 놈이 일어나네다음 놈이 일어나고또 다음 놈이 차례차례 일어나네웬일인지 한 놈이 일어나질 않네끝끝내 일어나질 못하네먹은 게 없어나올 게 없네낑낑 이마에 시퍼런 힘줄 돋우며한 아해가 가난을 누네햇빛을 누네쓰라린 시대를 누네굵은 콧물 빨아마시며째질 듯한 똥구멍으로불을 누네막다른 길 한복판이상의 한 아해가파아란 저녁 연기를 누네시작 메모‘날개’, ‘오감도’를 쓴 천재 시인 이상은 서울 종로에서 이발사 아들로 태어나 공고 건축과를 나와
지난주에 우리는 마돈걸이 건네 준 정보대로 3번 말과 9번 말에 나름 큰돈을 걸었다가, 그 허망한 결과에 망연자실해진 백팔만을 목도한 바가 있다. 백팔만은 마돈걸에게 욕을 할 수도 뭐라고 투덜댈 수도 없었다. 정보야 그녀가 줬지만 판단은 결국 자신이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준 정보야 지금까지 뭐 하나 시원찮은 게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떡하니 믿고서 질렀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평소에 사내답고 제법 담대하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언젠가 크게 한 번 맞추고는, 그동안의 실패 스토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죽기 얼마 전에 찾아가서 감회에 젖은 곳은? 1번 후배 디자이너의 패션쇼장, 2번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의 거리, 3번 경마장. 짐작한 대로 답은 경마장이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과 모자를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외국의 경마장은 그만큼 패션의 경연장이 되어 왔다. 과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우리는 지난주에 술회한 바 있다. 해서 당나귀 신사 백팔만은 마돈걸의 멋진 패션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그깟 복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사람은 내면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 아니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