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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5) - 패배를 딛고

서석훈
  • 입력 2010.06.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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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지난주에 우리는 마돈걸이 건네 준 정보대로 3번 말과 9번 말에 나름 큰돈을 걸었다가, 그 허망한 결과에 망연자실해진 백팔만을 목도한 바가 있다. 백팔만은 마돈걸에게 욕을 할 수도 뭐라고 투덜댈 수도 없었다. 정보야 그녀가 줬지만 판단은 결국 자신이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준 정보야 지금까지 뭐 하나 시원찮은 게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떡하니 믿고서 질렀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평소에 사내답고 제법 담대하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언젠가 크게 한 번 맞추고는, 그동안의 실패 스토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바람에 그만 눈가가 뜨거워진 적은 있었지만, 잃었다고 계집처럼 눈물을 보인 적은 결코 없었던 그였다.
백팔만은 쓸쓸히 자리를 떴다. 마돈걸이 따라왔지만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다. 어디서 그따위 정보를 갖고 왔냐고 고함친들, 잃은 돈이 돌아올 건가 속이 시원해질 건가,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일 뿐이라는 걸 모를 그가 아니었다. 또 마돈걸은 마돈걸 대로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친구나 여동생이나 오빠의 불행은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픈 법이었다. 게다가 그녀 또한 적지 않은 돈을 잃음으로써 그 불행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 가?
다음 레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분석을 하고 기수의 동태와 말의 상태를 살피고 전화로 각종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어떤 사내는 오늘도 예측에 불꽃을 튀기고 있었지만, 방배동 아주머니는 루이뷔통 가방을 꼭 쥐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예전 같으면 그런 모습들과 행위에 정보가 숨겨져 있는 양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름대로 그 의미를 헤아려봤을 테지만, 오늘 백팔만은 그 모든 걸 흘러 보내며 힘없이 건물을 나와 경마장 마당을 가로질러갈 뿐이었다.
“오빠, 술이나 한 잔 할까?”
따라나선 마돈걸은 말을 걸어보았다. 뭐 땜에 오빠에게 정보 따위를 주었던가, 후회가 막심하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정보를 준다고 냉큼, 그것도 큰돈을 걸어? 바보 아니야? 내 책임이라야 잘 해주려고 한 것밖에, 돈 벌어주려고 한 거 밖에 더 있냐 말이다. ‘칠성테크’ 주식에서 몰래 번 돈이 미안해서 정보를 안긴 건데 그만...... 그런데 그 말대가리는 왜 그게 특급정보라고 들고 온 거야? 이번만은 놓치면 후회한다고. 미친 자식, 그러니까 별명이 말대가리이지. 말의 머리나 되면? 신선한 말머리를 그 자식의 대가리에 대할까?
“아냐, 한 번 더 걸자.”
결연히 백팔만은 돌아섰다. 바로 이 모습이었다.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이 모습, 이런 모습의 오빠를 마돈걸은 사랑해온 것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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