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이 흩어진 소들을 앞세우고 이 쪽 저 쪽에서 목동들이 모이기 시작한 때는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소들은 멀리까지 달아났으며 꽁꽁 숨어 있었기에 아직 많이 모자랐다. 나중에 박 씨가 한 떼의 소들을 몰고 합류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소들은 대부분 그 꼴통 소들이었다. 윤 씨와 나는 목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이르렀건만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사격장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보름달이 밝았지만 산그늘 풀숲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장선 윤 씨와는 달리 나는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칡넝쿨은 소들이 좋아하는 풀이었다.
소들을 몰아넣고 나면 금방 밤이 되었다. 호롱불 밑에서 저녁을 먹고 화투를 치다가 오줌 누러 나가서 보면 우리 안의 소들은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갓난 송아지를 둘이 교대로 안고 온지 며칠 안 된 어느날, 그 송아지를 찾아봤더니 어미와 함께 무리 가운데 업드려 있었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소들은 새끼 없는 암소들이었다. 약한 것들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방목하는 암소들은 위험으로부터 약한 것을 보호하는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이룬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을 가둔 감옥 얘기를 들어보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
배가 크게 부르고 젖이 부푼 암소들의 가랑이를 잘 관찰하면 송아지를 낳을 날이 가까운 암소를 가려낼 수 있었다 가랑이에 이슬이 흐르면 해산이 가까워진 암소였다 이슬을 미처 못 보고 방목장에 데리고 나가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혼자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하여 어딘가에 숨어서 송아지를 낳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찾아갈 때까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사격장은 사방이 30리 씩 된다는 광활한 분지였다 분지를 둘러싼 사방의 산에서 내려온 능선들이 크고 작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서 과연 어느 자락에 숨어들어 새끼를 낳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1972년 봄부터 가을까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3리의 덕재 목장에서 일했다. 2백 마리 쯤 되는 한우를 방목하는 일이었다. 대부분 암소였고, 송아지들이 더러 있었으며, 암소와의 교미를 위해 묶어 놓고 기르는 종우가 두 마리 있었다. 종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이중섭이 그린 소를 연상하게 했는데, US 마크가 찍혀 있는 미군 탄띠로 목둘레를 해 놔서 미욱해 보이기도 했다. 목장은 덕재 고개 남쪽 비탈에 인공으로 조성한 목초지에 있었으며 고개 북쪽의 안덕재는 미군 비행기 사격장이었다. 고개 위에서 안덕재를 바라보면 우음산에서 뻗
1974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고, MT를 위해 설악산에 간 대학생이었다. 양폭 산장에서 여장을 푼 첫날 마신 술이 과했다. 소변 보러 간 계곡에 처박혀 많이 다쳤다. 어금니 몇 대가 부서졌고, 턱이 찢어졌다. 피가 많이 났다. 지혈을 하는 등 응급처치를 해 줬던 누군가가 말했듯 그만하기 다행이긴 했지만 통증이 심했다. 진통제 몇 알 정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통증이었다. 빨리 하산하여 치과부터 가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나는 일행의 뒤를 쫓아 기어이 대청봉에 올랐고 가까스로 한계령 쪽 국도변 민박촌
옹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은 1972년 초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친구와 나는 경기도 포천 땅의 영평천을 거슬러 국도를 따라 걷던 중에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채 일동면과 이동면 사이의 삼팔교 부근에 이르렀다.그곳 도로변 야산 기슭에 장독 굽는 큰 가마가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 터널처럼 길게 만든 가마 입구에서 불땀을 들이던 노인이 우리를 보더니 불도 쬐고 옷을 벗어 말리고 가라고 붙들었다.우리는 젖은 옷을 벗어 물기를 쥐어짠 후 두 손으로 펼쳐 들고 화끈화끈한 불 앞에 섰다. 그렇게 서서 이글
조촐하고 오래된 서민아파트였다. 햇살이 잘 드는 마당에 넓은 장독대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들이 보기 좋았다. 입주한 세대마다 하나 둘 조심스럽게 내놓고 정갈하게 갈무리하는 살림으로서의 장독들이었다.큰 독은 맨 뒤에 중간 독은 중간에 작은 독은 맨 앞에 세대별로 조르르 놓아서 마치 잔칫날 단체사진 찍으려고 모인 옛날 식구들 같았다. 아파트에 살망정 푸근하고 소박한 살림을 사는 사람들이 이룬 풍경이었다.살던 집 전세가 갑자기 많이 오르는 바람에 싼 집을 찾아 나섰던 우리는 그 진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채송화가 피어나는 화
소년기부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까지 가장 왕래가 빈번했던 친구들 중에서 셋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시 일어서 걷기는 하지만 거동이 그전 같지는 않다. 우리 나이 쉰을 넘어선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뇌졸중이 왔던 친구는 그의 고향인 동해 바닷가 도시에서 요양 중인데, 초기에는 가까운 친구들조차 만나주지 않았다. 전화로 안부를 나누다가, 그래도 그렇지 우리 사이에 상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변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오. 지. 마.’라는 세 마디였다. 애써 뱉어내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그때 나는 다만 푹 쉬고 싶어서 히말라야 산길을 걸었다. 히말라야 산길이라면 전문산악인들이 거창한 장비를 두르고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위험한 길을 연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도 그 밑동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고 경작지가 있으며 사원이 있다. 울창한 숲이 있고 시냇물도 흐른다. 그리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산길이 있다. 그때 내가 걸었던 피케(Pike;해발 4010m) 기슭의 길도 그런 산길이었다. 길의 형태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등산로와 비슷하다. 그러나 피케 언저리의 산길은 관광객
먼동이 트자 룸비니 평원의 새들이 날아오른다. 부스스한 얼굴로 끼룩 끼룩 배고픈 투정을 해대면서 하늘을 날기 시작한 그 시간에 지평선 여기저기 납작하게 엎드린 마을의 농가들도 하나하나 깨어난다. 연장을 어깨에 둘러멘 농부들이 소를 몰고 나오면 룸비니 평원도 깨어나기 시작한다. 북쪽에는 히말라야라고 부르는 설산이 길게 누워있지만 동 서 남 세 방향은 일망무제의 지평선이다. 경작지는 그 지평선으로 이어지면서 대평원을 이룬다. 그 넓은 땅에 발목을 잡혀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 살아온 농부들 중에는 그 땅을 감옥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깊은 잠이 그리워서 절을 찾았던 적이 있다. 네팔 땅, 룸비니의 대성석가사. 오갈 데 없었던 한 시절을 그 절에서 기숙했던 인연을 믿고 찾아간 것인데 주지 스님은 식구처럼 반기며 전에 내가 쓰던 방을 내주었다. 출국 전의 나는 심한 불면에 시달리고있었다. 불면 초기에는잠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자다가 깨면 깨는 대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읽을 책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으니 '잠 안 오는 밤은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하면서 동 틀 때까지 책상에 앉아있었다. 불후의 명작을 쓰고 있다는 자부심도 들었지만 그렇게 써서 모은 글을 다시
아버지의 병원은 날마다 번창했다. 낮에는 물론 밤에도 급한 환자들이 병원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의 수입이 늘어 상차림이 풍성해지긴 했지만 환자들과 그들의 병실을 마주 보며 사는 일상은 불안했다.병원은 급한 환자들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이다. 엑스레이를 찍느라고 갑자기 돌리는 발전기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으며,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울부짖기 예사였고 가끔 아버지의 고함 소리도 들려오곤 했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들은 온 식구들의 잠을 깨웠다. 조산원의 도움으로 출산하다가 출혈이 심해서 달려온 산모들과
새 동네는 전에 살던 동네와 무척 달랐다. 전에 살던 동네는 삼팔선 이남이었기에 농촌 토박이 삶이 남아 있었지만 삼팔선 이북의 수복 지구인 새 동네는 대규모의 미군이 주둔하면서 생긴 기지촌 문화가 번창하고 있었다. 새 학교 아이들은 스티로폼으로 유리창을 닦았다. 창틀에 걸터앉아 양 손에 그 하얀 스티로폼을 들고 유리창을 문지르면 삐까삐까 소리가 나면서 유리창의 때가 말끔히 벗겨졌다. 지금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스티로폼 쓰레기가 넘쳐나지만 나는 새학교에서 그런 물건을 처음 보았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스티로폼이 미군부대 오물장에 지천
새 학교에서의 3학년 시절은 기억나는 게 많지 않고 혼란스럽다. 자주 두통이 왔으며, 어지럽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체육 시간에는 혼자 교실에 남아 유리창 너머로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뛰노는 아이들을 멀거니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은 철봉대 앞에 줄지어 앉아 턱걸이 시험을 보는데, 나는 맨 뒤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이 턱걸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턱걸이를 한 번도 못하는 아이였기에 곧 닥쳐올 창피를 무릅쓸 일에 조마조마했다. 철봉대 너머로는 봇도랑이 있었다. 이 봇도랑의 물은 1920 년대에 만든 산정리의
가족들이 먼저 이주하고, 나는 2학년을 마저 마친 이른 봄부터 살게 된 동네에는 미군과 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전에는 삼팔선 이북 땅이었던 마을 어귀에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만들었다는 해방탑이 반 쯤 파괴된 채 남아 있었다. 해방탑 서쪽은 꽤 너른 들이 펼쳐져 있고, 들이 끝나는 곳을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한탄강으로 합류했다. 사단 규모의 미군 부대는 바로 그곳 한탄강을 끼고 있었다. 새 학교는 전 학교에 비해 학생 수가 몇 배나 많았다. 주둔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흥청망청한 특수(特需)를 보고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인구
아버지의 여름은 물맞이 철이었다. 운악산 서파 골짜기에는 물맞이 하기 딱 좋은 폭포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아이들도 폭포 밑에 데려가 물맞이를 시켰다. 폭포 밑에서 물맞이를 하다가 너무 추우면 뙤약볕에 뜨겁게 달궈진 넙적 바위 위에 엎드려 찜질로 몸을 뎁힌 후 다시 폭포 밑에 가서 섰다. 찜과 물맞이를 반복하다가 무료해지면 가재를 잡고 머루 다래를 따 먹었다. 배가 고파지면 어머니가 준비해 온 주먹밥과 오이지를 간식으로 먹었다. 특별한 날, 이를테면 서울 외삼촌들(당시 고등학교에 다녔다)이 놀러 온 날에는 솥단지를 들고 가서 닭죽
아버지는 2019년 현재 94세이지만 내가 다섯 살이었던 1958년에는 서른셋이었다. 서른셋의 내가 그랬듯이 아버지도 두루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때 서른한 살이었는데 이미 세 아이를 낳았다.내가 다섯 살, 아우는 세살, 그리고 한 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젖먹이였던 여동생까지 세 아이(막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를 길렀던 어머니는 아버지 병원의 유일한 간호사이기도 했다. 물론 간호사 자격증은 없었다.우리 형제는 경쟁이 심하여 놀면서도 싸웠으니 그 행태가 두 마리 강아지 같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었다.
삼촌네 약방 밖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정류장 앞에 길게 이어진 국도는 자갈투성이였고 바람만 조금 불어도 흙먼지가 일었다. 삼촌은 군용 철모에 긴 자루를 단 연장으로 도랑물을 퍼서 흙먼지를 재우려고 애썼다. 종일 도랑물을 뿌려대도 콩고물 같은 흙먼지를 아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물기가 마르면 지프차 한 대만 지나가도 뭉게구름 같은 흙먼지가 기세 좋게 피어올랐다. 시야를 가린 누런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맨 먼저 약방 유리창으로 보이는 것은, 길 건너 극장 건물의 지붕과 처마 밑의 확성기였다. 그리고 극장 간판의 그림들이 보였다. 카우보
삼촌네 약방에서 옆으로 한두 집 건너에 사진관과 다방이 있었다. 그 둘 사이에 좁은 골목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곧장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깊숙이 꺾이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골목이 꺾인 모퉁이에는 늘 오줌이 질펀했으며 가끔 뱀이 똬리 튼 것 같은 똥덩어리들도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골목 끝에 허름한 빈집이 있었다. 우리가 형이라고 불렀던 큰 아이들이 그 집을 ‘본부' 삼아 드나들며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은밀한 장난을 하며 놀았다. 큰 아이들로 이루어진 패거리들은 어른들의 감시를 피해 못된 짓을 할 으슥한 장소를 본부라고 불렀
우리 교실이 떠오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창 너머로 넓은 운동장과 미류 나무들이 보인다. 운동장 밖은 들이고, 들 가운데 큰 개울이 있다. 개울 건너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장마 때면 학교에 오지 못했다. 농번기에는 두세 살 된 동생을 업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업 중에는 동생을 책상 밑에 앉혀 놓았다. 어떤 아이들은 새끼 때까치를 가져와서 교실 유리창에 붙어있는 파리를 잡아 먹이기도 했다. 입술을 교묘하게 오므려 빨면서 새소리 내면 어미가 먹이를 주는 줄 안 새끼 때까치가 노란 주둥이를 벌렸다. 운동장 조회 때 만세를 불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