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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거기서 거기

김홍성 시인
  • 입력 2019.11.19 07:45
  • 수정 2020.02.1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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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안부를 나누다가, 그래도 그렇지 우리 사이에 상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변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오. 지. 마.’라는 세 마디였다. 애써 뱉어내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고통과 회한과 각오가 서려 있었다.

ⓒ김홍성

 

소년기부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까지 가장 왕래가 빈번했던 친구들 중에서 셋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시 일어서 걷기는 하지만 거동이 그전 같지는 않다. 우리 나이 쉰을 넘어선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뇌졸중이 왔던 친구는 그의 고향인 동해 바닷가 도시에서 요양 중인데, 초기에는 가까운 친구들조차 만나주지 않았다. 전화로 안부를 나누다가, 그래도 그렇지 우리 사이에 상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변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 . .’라는 세 마디였다. 애써 뱉어내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고통과 회한과 각오가 서려 있었다.

 

삭일 것을 삭이고, 다질 것을 다지는 중이려니 하다가 마침내 그를 상면한 것은 그가 쓰러졌다 걷게된지 몇년 후였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봄날의 풍광이 스치는 차창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할 것인지를 궁리해 두었으나 막상 대면하니 다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은 어눌해졌으나 편안한 표정에 미소가 자주 떠올랐고,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서 그런지 거동이 조심스럽고 진중했다. 이전의 그는 사업이 잘 안 돼서 그랬겠지만 짜증이 많았고, 동작이 다소 경망스러운 편이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그는 그동안 투병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산승들처럼 수행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푸른 바닷가 공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둘 다 말이 없을 때는 파도 소리만 처얼썩 처얼썩 들려왔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내가 가게에 가서 번데기와 소주를 사왔다. 물도 한 병 사왔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는 소주를 마시며 친구들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누구는 명예를 안았고, 누구는 부를 누리고 있으며, 누구는 새장가를 갔다는 이야기. 누구는 기러기 아빠로 살고 있으며, 미국에서 다니러 온 누구는 새벽까지 마시고 진탕 취해서 공항으로 갔다는 이야기, 명퇴한 누구는 불고기 집을 개업했으며, 술 잘 사던 누구는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는 이야기…….

 

다시 처얼썩 처얼썩 하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며 노는 어린애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중에 그가 ...라고 말했다. 왼 쪽 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이라고 보충 설명을 했다. 역시 뇌졸중으로 타계한 그의 부친이 자주 하셨다는 그 일본말(五分五分)어슷비슷하다또는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었다.

 

그가 바둑돌 놓듯 띄엄띄엄 이어놓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우리 친구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잘났든 못났든 있든 없든 죽음이나 병마 앞에서는 같은 처지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를 가엾게 여기고 위로하는 친구들, 특히 폭음이 잦은 친구들에게는 술을 자제하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무렵 여러 친구들이 동해의 그 도시에 찾아가 그를 데리고 사우나에 가서 때도 밀어 주고, 생선회도 먹고, 바닷가 송림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노래방에도 갔던 것은 알고 있는데, 그 친구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온 지 1년이 채 안 됐을 무렵에 또 한 친구가 쓰러졌고, 다시 6개월이 지난 후인 지난겨울에 또 한 친구가 쓰러졌다. 부인들은 우리 친구들이 셋이나 뇌졸중으로 고생하게 된 원인이 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친구들이 워낙 술을 좋아하여 모이기만 하면 술을 마셨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두 번 째로 쓰러졌던 친구가 입원한 재활원으로 문병을 갔던 그 날도 우리는 횟집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는 2차로 생맥주까지 마시고 나서야 헤어졌으며, 세 번 째로 쓰러졌던 미국 사는 친구는 한방 요법을 받아보기 위해 부인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고국에 왔건마는 친구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서 기어이 한 잔 털어 넣었다. 미국 의사가 소주 한두 잔은 괜찮다고 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다.

 

다른 때 같으면 2차로 옮겨 생맥주라도 마시고 헤어졌겠지만 커피숍으로 옮겨 2차를 때웠던 그 날 밤, 지방에 사는 나는 그 중 한 친구가 거처하는 높다란 빌딩의 오피스텔에서 자게 되었다. 부인과 자녀가 유학 중인 그는 혼자 살기에 하룻밤 신세지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거니와 다음날 아침에 내가 문병 가야하는 병원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처 앞의 마트에 이르자 자제했던 술이 설취해 잠이 안 올 것이라며 탁주를 두 통 샀다. 각자 한 통 씩만 마시고 자자는 것이었다. 탁주 두 통은 덧없이 비워졌고, 주로 소주를 마셔온 버릇이 있는 그는 탁주만으로는 성이 안 찬다며 심야에 나가서 소주를 두 병이나 사들고 왔다.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며 그 술을 다시 비우자니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세 친구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너나 할 것 없이 어슷비슷하게 마시면서 살아온 나머지 친구들 중에서 또 누가 쓰러질 것인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실 수 있을 때 마시자며 새 술병을 움켜쥐고 마개를 비트는 친구를 말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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