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 윤 한 로울 밑꽈리 누나길섶풀까마중 형오늘도 빨강 코씀바귀 아부지뉘엿뉘엿 해는 지고올갱이 식구들아차차 니저발여고자진한 초록 사발익모초 엄마시작 메모내 인생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로 이 사설시조를 든다. 시골 아낙네 같은데 서방은 병이 들었고 찢어지게 가난해서 약이나 의원은 쓸 수도 없고, 하릴없이 달래 나물 따위나 뜯어 종로 장터에 내다 팔 수 밖이. 시원한 수박 화채나 한 대접 해 먹이려 이것저것 다 샀는데 아차차, 잊어버렸네, 그만 당원 사는 걸 잊어버렸구나. 수박에 숟가락 꽂아 놓고 한숨짓는구려. 어
쑥 윤 한 로다시 또 봄이 와쑥을 보면옥이가 생각난다지지리도 박복한옥이 기집애비 한차례 내리곤하이얗게 설운 목련보다 백배나 고와라언덕바지 쑥시작 메모 시골에서는 이맘때면 논둑이나 밭두렁에 파랗게 쑥이 돋았다. 봄볕 언덕바지 위에 쪼그려 쑥을 캐던 어머니와 누나, 동생, 처자들. 해진 노랑 회장저고리에 때묻은 다홍치마, 하나같이 가난하고 박복하던 평생 땅강아지 그 처자들. 나이가 먹을수록 짓무른 눈에 더욱더 그립다. 이 안양 바닥에서는 어디로 가야 쑥을 보랴.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얼핏, 남부시장 노점상 할매 신문지 위에서나 본다.
종이컵 시인 윤 한 로확 구겨버리지 말자 아주 짧게 한두 줄 별, 꿈, 바람, 벌, 호박, 그리움 그런 한물 간 구닥다리 옛날 시 쓰리 점심 먹고는,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먹고는내 영혼 하냥 종이컵에 머물웨라이제 떠들썩한 곳 싫어 나는야 조용한 종이컵 시인 밑동에는 오늘 날짜도 쓰고 윤◯로, 외로운 내 이름 석 자도 쓰고 아무도 읽지 않네요그리하여 내 영혼 아스라이 별처럼 구름처럼 흘러 끽, 역전 벤치 위 뉘렇고 짠 손한번은 맑게 읽히리 ‘무신 무신 눔’ 소리 들어가며 나는야 종이컵 시인입네시작 메모행정도 잘 하고 사무도 잘 보고
석불 윤 한 로숭숭 얽은무녀리 곰보 석불눈도 선낫코도 선낫입도 선낫웃음은커녕옛다, 떡갈나무 칡넌출 산기슭에 버렸으니떼이고 패이고외려 좋으이시작 메모까뮈의 스승 장그르니에가 쓴 ‘섬’. 는 그 글. 깊은 밤 우리를 아무 목적없이 이끄는 두세 장. 저마다 기발하고, 박식하고, 숨막힐 듯 묵직하고, 재치있는 마침내 경박스러운 요설 시대에 문득 고독한 겨울 나무 문장들을 만난다. 그러나 아직도 기발함을 탐하는 내 시, 쓸수록 아프다.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코 윤 한 로도둑놈 시를 쓰다 말고 물끄러미 딴 생각한다그때 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비록 한 톨 먼지처럼 작은 잘못일지언정진심으로 뉘우치니카아, 얼마나 맑은지 모르겠구나 밤하늘 뚫는 매부리코 실로 간만에 바라보는 별오늘 왠지 장미 시를 쓸 것 같아점점 때갈스러워지는 오십 줄무거운 호박 괸다시작 메모애들한테 ‘너희들은 왜 다른 건 다 시로 쓰면서 너희를 가르치는 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시로 써보지 않냐’ 정말 섭하다고 했더니 끙끙 한편씩 써서 냈는데 개중 절창이 나왔다. 사람은 나이를 들수록 어려진다나, 갓 태어난 아가의 얼굴 같
낮달 윤 한 로물크러진 줴, 엄니 손톱 낮달염생이 우는 산기슭에 오늘따라 뜬금없이 빠졌네새파란 하늘한 소쿠리 그리움이여시작 메모돌에 대해서 끊임없이 긁적거리다가, 왼쪽, 오른쪽 고무신을 짝짝이로 바꿔 신고 사는 안짱다리 산골 마을 중년 농사꾼을 생각하다가, ‘내일은 힘들지 않게 해 주소서’ 가난한 티벳 사람들의 뭉클한 노래 구절 가슴 깊이 품다가, 새벽녘 새우처럼 꼬부리고 끙끙댄 끝에 우리 어머니 손톱 같은 낮달까지 왔다. 새파란 하늘 한 소쿠리 술술 새는 그리움이여.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나무 윤 한 로저녁 어스름흙먼지 뒤집어쓴 채먼 길 걸어왔구나 이제 다 내려놓고구부정, 가진 것 없는옛날 옛적 누더기 친구여찬 바람 속 뽑히울 수염과외려 노래할 희망, 기쁨에 떠는예언자여비록 지팡이는 없을망정동냥자루는 없을망정시작 메모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구약의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서 민족 구원의 희망을 노래했다. 누더기가 되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도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꿋꿋하고도 외려 기뻐했다. 수염 뽑으
우리 셋 윤 한 로동네 싸구려 호프집에우리 셋나와 마누라와 영진이귀때기가 떨어져나갈 듯 추운 밤 나도 한 잔 고생이 많구만 당신도 한 잔자, 학교를 졸업했으니 니놈도 한 잔오리털 파카 속 자꾸만 삐져나오는 깃털 풀풀 날리며대학이 다냐 공부가 최고냐착하게만 살면 되지라구라를 풀며 쨍그랑 쨍그랑우스꽝스런 우리 셋 발동 걸렸다코맹맹이 되고 혀 꼬부라지고드디어 필림이 끊길 때까지얀마, 맥주에 소주 말아 세게 한 잔 쨍그랑 시작 메모식구꺼정 술 마시면 미주알 고주알 맛있다. 트집 잡힐 일 없고, 도망갈 사람 없고, 술값 때문에 머리 안 쓰고
다시 사순 윤 한 로쉽게 살았으니틀림없이 죄가 되리 옷이니 책 나부랭이니 다 치우곤 휑뎅그렁한 방 벽 위에딱 십자고상 한 개나 비록 평신도지만 고됨을 딱딱함을모래알 같은 메마름을 진종일 묵상했으면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않고 짓무른 눈 번쩍 성긴 수염 끝 물방울 맺힐 때까지광신도처럼시작 메모성당 세 채를 지으면 ‘직천당’이라고들 하는데 요셉 신부님은 성당을 세 채도 넘게 지으셨다. 요셉 신부님 방에 가면 벽에 십자고상 한개만 딱 걸렸는데 또 다른 장식이나 꾸밈은 아예 없다. 일상 또한 미사하고 기도하고, 성당 짓는 데 못 줍고 벽
세외고인(世外高人) 윤 한 로말발굽 소리 스러진만리 변방 세외에 눈이 나린다무공을 폐지당한 초절정 고수쑥대머리 들어 빛나는 쓸쓸함 건너다 보는구나한갓 사랑, 그리움 따위들이여싸늘한 웃음 속에 죄다 흘리리 무너진 시절 가슴 한복판 진한 먹 자자 삼으리쓰게 먹고 베두렝이 거칠게 걸치리라나부끼고지저귀고나무하고 물 긷고 밥 짓는 필부의 천한 초식오오, 굵은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짚어 깨치니저무는 멀리 승냥이는 울고하염없이 기쁘다시작 메모고등학교 때 무협지에 미쳤는데 책상 속에 머리를 쳐박고, 이질에 걸려선 요강 단지 타고 와룡생을 읽었다.
바둑 윤 한 로지그시 모자도 씌우고바짝 어깨도 짚고자슥이 애법 둔다붉으락푸르락, 다리 달달 떨며딱 딱 혼자서 두는 바둑이진종일 도끼자루 썩는 줄 몰러라궤짝 같은 집구석무지막지한 골초 삼촌그냥 가자이왕 베린 몸 하나시작 메모국민학교 사학년 때 집에서 놀던 사촌형이 심심풀이 삼아 나한테 바둑을 가르쳐줬다. 늘 소심하고 연약하던 나는 바둑의 깊은 세계에 푹 빠졌다. 곧 누나를 이기고 아버지를 이기고 일 년도 안 가 사촌형도 눌렀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던 내게 바둑은 상당한 자존심이며 긍지이고 심지언 예술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여드
입춘 윤 한 로얼핏 날이 풀리니 을씨년허리 병이 도진다개 키우는 집 지나왕벚나무 돌길비린내 난다거무죽죽한 나뭇가지 가랑이 사이마다채 녹지 않은 흰 눈얹혔다, 애개개아지매들 저저금 개짐 한 줌씩 차듯주책바가지 같은 생각이다만좋은 일 많것구나시작 메모주책바가지들은 진실하다. 주책바가지들은 슬프다. 주책바가지들은 쓸쓸한 게다. 주책바가지들은 아픈 게다. 그래서 주책바가지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주책바가지들은 자유스럽다. 사뭇 즐겁다. 진지한 척, 다소곳한 척, 음전한 척하는 우리들, 주책바가지들 뭐라 말자. 깔깔깔깔 주변 주책바가지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