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 구석에 놓여있는 검은색 스웨이드 하이힐 한 짝을 보자 J가 떠올랐다. 그날 밤 그녀의 아버지는 정복을 입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장군은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몹시 위축된 나는 빌려온 차 키를 떨리듯 흔들며 말했다.-저, 장군님. 따님을 모시고 가려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올해 장군 진급 대상자인 대령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다. 특히 막내딸에 대한 사랑과 보호는 지나칠 정도인 장군은 자신의 소신인 금남의 집 원칙을 고수했다. 남자는 그 집에 얼씬거리지 못할뿐더
-자기 마초야?-자기 머저리야?S와 잠자리를 갖는 일은 늘 기분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언제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할지, S에게 마냥 맡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터질지 모를 폭탄을 가지고 놀고 있는 기분이랄까. S는 평소에는 철저한 페미니스트였다.그러나 침대에서만큼은 예쁜 소녀처럼 굴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스트립쇼를 보여주거나 내가 그녀 엉덩이를 세게 때려주기를 원했다. 얌전하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해서 나를 흥분시키고 자극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나는 꽃다발을 사 들고 가서 그녀에게 바쳤다. 전날 황홀한 여운이 채
치열한 예술가의 정신은 매매 대상은 더욱 아니었다.자존감에 내상을 입은 P는 조용히 물러났다.P는 별 다섯 개를 받은 레스토랑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감싸주었다. P의 우아한 손끝에서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성감대가 무릎인 내 하체에 전기가 흘렀고 그녀 역시 볼이 상기되어 달아올라 있었다.P는 내 다리를 파란색 하이힐 앞코로 간질이며 속삭였다.-저희 아빠 전용기가 있어요. 너무 바쁘셔서 그걸 사용할 시간이 없는 게 문제지만.P의 아버지는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녀는 그가 만든 왕국의 외동딸이었다. 항공회사는 물론 식구마다
이탈리아 식당 ‘몽로’에서 친구 소개로 V를 만났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레깅스에 가슴골이 보이도록 파인 브이넥 티셔츠 차림이었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테이블에 놓인 손톱은 인조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V가 신고 있는 흰색 하이힐을 자꾸 내려다보았다. 푸른 실핏줄이 발등으로 흘러내렸다. 하얀색은 야한 그녀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내 눈길이 닿은 무릎을 조금 벌린 그녀는 이왕 볼 거라면 확실히 보라는 눈치였다. V는 부끄러워하는 내가 귀엽다고 했다. 외양은 부드럽지만, 내면이
-아버님, 색깔이 너무 멋져요.사촌 동생 결혼식에 데려간 B는 내 아버지의 넥타이를 만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이지 거저 줘도 안 맬 넥타이를 어디서 주워온 것일까. 나는 아버지 목에 걸린 촌티 나는 총천연색 새끼줄을 다시 바라보았다. 처녀가 남자의 상징처럼 목에 걸린 타이를 가지고 놀다니. 내게는 B의 행동이 남자의 상징을 조몰락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질투가 난 나는 B를 노려보았다. 그날 결혼식 파티에 온 그녀는 엉덩이를 전부 가리기에는 턱없이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다.거기에 빨간색 하이힐이라니.남자들을 한 방에 날려 보낼 핵
I는 거의 미동조차 없이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아무리 팔을 뻗어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질 수가 없었다.I는 15㎝가 넘는 흰색 킬 힐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백화점 명품관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저녁이었다. 기상학자에 따르면 조만간 지구에는 소빙하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과 남극 빙하가 녹기 때문에 해수면이 급상승하고 있다. 그 여파로 극지와 저위도 지역 기후 사이에 불균형이 커지고, 고위도 지역의 기온이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가 이를 증언하였다.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일
가련한 예술가씨. 무척 굶주렸겠군요. 내 방으로 와요.그 순간 E는 내게 엘도라도였다. 그녀는 황금이었다.그날 나는 로또복권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E를 만났다. 그 전날 밤 꿈에서 황금 돼지를 보았던 터였다. 농장에 수천 마리 돼지가 우글거렸다. 생활비는 바닥나고 날마다 허기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나는 돼지저금통을 깬 즉시 복권판매소로 뛰어갔다. 꿈속의 돼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폐차 직전인 소형차를 쇼핑센터에 주차했다. 복권이 모두 팔렸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차 문을 여는데 E가 빨간 스포츠카에서 내리고 있었다.E의 금색 하이
"흔들지 마라. 어지럽다."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 삶을 살아간 왕족, 사도세자가 남긴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 말이다.영조의 둘째 아들로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아버지로부터의 미움, 질책과 압박을 받으며 불안속에 살아야 했다. 결국 심각한 정신질환까지 앓다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다.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갈림길에 선 인물로 표현된다. 아버지와의 관계, 당쟁의 권력 투쟁으로 자신의 설 곳을 찾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마지막 8일' 조성기 장편 역사소설로 등장했다.뒤주에서 8일을 보냈던 사
한 남자가 부산의 여고 앞에서 허름한 분식집을 운영하는 이중생활을 그려낸 판타지 웹소설이다.'마성의 맛'으로 이름을 날리며 손님이 폭주하는 이 분식집, 그 비밀은 마법의 재료에 달려있었다.주인공은 밤에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 '판타지아'를 여행하며 진기한 약초와 과일 등을 채집해 요리 재료로 사용한다. 손님들 역시 이 요리를 먹고 초자연적 체험을 하게 된다.'슬리버'라는 필명으로 쓴 장편소설, 웹소설 플랫폼 '조아라'에 연재 하며 누적 조회수 1천400만을 기록하며 온라인 게임으로도 출시되었다.
늦은 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내리고 집 문밖에 한 여자가 우산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비에 젖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한기 탓인지 어깨를 떨었다. 회색 통굽 하이힐을 신은 그녀 맨발이 젖어 들고 있었다.-제가 지금 갈 곳이 없어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오늘 밤만 당신과 지낼 수 있을까요?그녀의 이름은 C였다. 어처구니없지만 C는 내게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지
H는 노란색 하이힐을 신고 내게로 왔다.교통사고로 다리뼈에 금이 가는 상처를 입어 나는 정형외과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죽음의 문 앞까지는 가 보지 못했지만, 병원 침대에서 오래 살다 보면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떡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나는 깁스를 한 발목으로 절뚝이며 걸었다.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가슴 한구석을 채운 허전함이 발목 통증보다 더 아프고 쑤셨다. 주삿바늘도 진저리나게 싫었지만 외로움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간절히 원한다고 사랑이 찾아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맨몸
겨울의 한 가운데로 봄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의문에 휩싸여 나는 겨우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지냈다. 머리에 든 먹빛처럼 검은 물이 가라앉아 희뿌옇게 느낄 무렵이었다. 사십 년 동안 장복한 술이 사물과 사람에 관한 판단을 흐린 안개 속처럼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겠는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게으른 나는 나에 대한 진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에 대한 진단이라니. 아픈 질병이라면 병원에라도 가 보겠지만 이건 사지가 멀쩡하니 드러누워 망상에 빠
우리 동네 마을버스 정거장 옆에 반의반 평이나 될까 자그마한 구두수선실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름은 모르나 성이 심씨인 그는 흰 수염 주름진 얼굴로 늘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간간이 기침하면서도 온종일 독방 같은 작업실에 앉아 가끔 찾아오는 단골손님을 반겼다. 나는 단골손님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가끔 들렀다. 족부 의학을 전공한 나는 신발에 관심이 많았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서 생긴 사람들의 아픈 발을 치료하는 직업의식이 발동해서일까. 낡은 구두 굽을 갈고 광을 내는 그의 손바닥만 한 작업실
내 안에는 검은 짐승처럼 생긴 무언가가 산다. 우우, 우울한 그놈이 깨어날까 언제나 두렵다.그녀가 머리염색을 했다. 금발이 된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한다. 가슴골이 드러난 상의를 입고 가늘고 긴 다리가 드러나게 킬힐을 신는다. 그녀는 백인들 파티에 갔다. 그 날로 나는 좋아하던 바나나를 먹지 않았다. 겉은 노란색이지만 속이 하얀 바나나. 점심 한 끼에 두 개로 충분한 값싸고 맛있는 바나나.나는 야간 아르바이트 청소일을 가기 전, 잠시 바다를 둘러보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찾는다. 해안절벽에 올라 에메랄드 바다 위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탄핵 정국 속 2년 전 탈고 ‘여자가 대통령이다’ 매주 2회 연재콘텐츠 강화 위해 객원·시민 기자 모집…원고·현장 기사 ‘환영’본지는 1월 23일부터 소설 ‘여자가 대통령이다’를 연재합니다. 타 농축산 전문지처럼 우리 말산업계도 사람과 말과 관련한 이야기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해 콘텐츠 강화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말산업대상 문학상 부문 또는 ‘신춘문예’와 같은 형식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각양각색의 시도가 필요할 때입니다.현재 말산업저널 온라인 홈페이지와 PDF판 그리고 오프라인 에는 김홍관·윤한로 시인의 시가 연재되고 있으며 마사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