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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엘도라도 El Dorado

박인 작가
  • 입력 2020.01.17 14:57
  • 수정 2020.01.1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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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예술가씨. 무척 굶주렸겠군요. 내 방으로 와요.

그 순간 E는 내게 엘도라도였다. 그녀는 황금이었다.

그날 나는 로또복권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E를 만났다. 그 전날 밤 꿈에서 황금 돼지를 보았던 터였다. 농장에 수천 마리 돼지가 우글거렸다. 생활비는 바닥나고 날마다 허기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나는 돼지저금통을 깬 즉시 복권판매소로 뛰어갔다. 꿈속의 돼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폐차 직전인 소형차를 쇼핑센터에 주차했다. 복권이 모두 팔렸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차 문을 여는데 E가 빨간 스포츠카에서 내리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라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박인
내가 카메라라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박인

E의 금색 하이힐이 퍼뜩 눈에 잡혔다.

엄지와 새끼를 제외한 세 개 발가락들이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갈퀴처럼 굽었고, 발등을 가로지르는 장식용 구두끈은 풀려있었다.

이어서 긴 다리와 실한 엉덩이가 실체를 드러냈다. 내 고물차 앞에 멈춘 스포츠카는 그녀를 내려놓고 굉음을 내며 사라졌다. E는 일주일 전 조각 전시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차가 가버린 방향을 가리키며 그녀는 말했다.

-내가 일하는 회사 이사님. 돈은 엄청 많은지 몰라도 그냥 속물.

E는 마침말을 생략하는 독특한 대화체로 말했다.

-예술가들을 경멸하는 사람. 왜 예술가들은 똥차를 끌고 다니며 시간을 죽이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그 시간에 그 좋은 머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E는 웃었다. E는 지역 종합편성 방송국의 연예담당 기자였다. E는 카메라를 사랑했다. 내가 카메라라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이사란 작자도 또한 별수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뭇 사내들의 눈길을 끌 만큼 E의 외모는 빼어났다. 로또복권은 허황한 꿈일 뿐이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그녀는 최근에 만난 유명 연예인 이야기를 했고 나는 여러 날 동안 매달리고 있는 작품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아프리카 이슈를 가지고 설치 미술을 기획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기독교가 전파된 나라와 AIDS가 창궐한 지역의 동일성이랄까.

나는 걸작을 만들기 위한 괴로움에다 예술을 하는 외로움을 양념처럼 뿌렸다. 찡그린 내 얼굴이 E를 도발시켰을까. 커피숍 문을 잡고 서 있을 때 E는 내 왼쪽 엉덩이를 꽉 쥐었다 풀어놓고는 속삭였다.

-아, 가련한 예술가씨. 무척 굶주렸겠군요. 내 방으로 와요.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나는 따라나섰다. 그리고 다급하게 E의 침대로 몸을 던졌다. 흥분이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고 아주 부드럽고 길게 애무했다. E를 가질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돈도, 직장도, 권력도 애초에 없었다. 그 순간 E는 내게 엘도라도였다. 그녀는 황금이었다. 나는 E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도록 기다렸다. 나로서는 오직 섹스를 잘하는 것이 사랑을 증명할 유일한 길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지옥불인들 못 뛰어들겠는가. 열정이 식자 그녀는 말했다.

-귀여운 예술가씨. 내 친구들은 남자친구들이 외국 여행 가라며 항공권을 선물한다는데.

-조금만 기다려봐. 이번 작품들은 팔릴 거야.

-자기는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가. 꼭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릴게.

물론 E는 기다리지 않았다. 내게 그런 날이 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가끔 텔레비전에 E가 나오면 나는 황금을 찾아 서부로 떠나는 사내를 그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뿐이다. E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동안 나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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