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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흑백인간

박인 작가
  • 입력 2019.11.01 13:10
  • 수정 2020.02.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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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 방법을 생각했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모두 검은색이 답이었다.
밤이면 내 안에서 검은 짐승이 깨어난다. 불면이라는 짐승.

▲『Healing Tree』 96.5×144㎝,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Healing Tree』 96.5×144㎝,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내 안에는 검은 짐승처럼 생긴 무언가가 산다. 우우, 우울한 그놈이 깨어날까 언제나 두렵다.

그녀가 머리염색을 했다. 금발이 된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한다. 가슴골이 드러난 상의를 입고 가늘고 긴 다리가 드러나게 킬힐을 신는다. 그녀는 백인들 파티에 갔다. 그 날로 나는 좋아하던 바나나를 먹지 않았다. 겉은 노란색이지만 속이 하얀 바나나. 점심 한 끼에 두 개로 충분한 값싸고 맛있는 바나나.

나는 야간 아르바이트 청소일을 가기 전, 잠시 바다를 둘러보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찾는다. 해안절벽에 올라 에메랄드 바다 위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날개가 있다면 좋겠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 누구에게나 돌파구는 필요하다. 나와 동거하는 그녀는 홀어머니와 사는 나를 따라 태평양을 가로질러 왔다. 어머니와 그녀 사이에서 투명인간으로 지내는 나는 나를 둘러싼 원색의 향연이 싫었다. 그녀와 어머니와의 집요한 말싸움과 팽팽한 갈등 사이에서 눈치만 늘어갔다. 그녀와 나를 감싸줄 아늑한 집이 필요했다. 포근한 꿈에서 두꺼비에게 물어보았다. 헌 집 줄게 새집 달라고. 하지만 내게 두꺼비에게 줄 헌 집이라도 있는가. 2주마다 돌아오는 주세를 내기도 벅찬데.

파란 하늘과 바다만 보면 가슴이 시원했다. 푸르른 나무와 초록 풀밭도 눈이 시원했다. 나는 변신에 성공한 것일까? 시드니에 온 지 일 년이 지났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사물이 흑백으로 보이는 우울증에 시달린 나는 원색이 무섭다. 흑백인간이 되어버린 나는 여러 색깔 중 특히 빨간색이 무섭다. 이민자에게 대학진학을 위한 영어를 가르치는 빨강 머리 앤 선생 때문인가. 평소 말이 없고 수동적인 동양인 학생들을 향해 앤 선생은 결국 화를 냈다. 영어는 머리가 아닌 입으로 하는 거라고 몇 번을 말했던가.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거라고. 실수를 두려워 말고 자기 생각을 발표하라고.

언어장애인들인가? 그렇게 힘들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그러니? 야단을 치는데 왜 웃어. 빨간 입술 앤 선생이 말한다.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에 문화적 차이가 있어서 그래요.

내가 끼어든다. 피와 불온한 사상은 왜 붉은색으로 물드는가. 고문과 유혈진압이 떠오르기 때문인가? 억압받고 짓눌린 나라 분위기가 싫어서 이민을 선택한 나에게 한 번의 실수조차 저지르면 안 되는 금기였다. 녹녹하지 않은 새로운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사람들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 방법을 생각했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모두 검은색이 답이었다. 스트레스와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 검정 옷을 선호한다고 했던가.

우리 서울로 돌아갈까?
그녀가 몇 번이나 말했다.
정말 지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여긴 훨씬 자유로운 곳이야. 아침저녁으로 새 울음소리도 들리고. 나는 그냥 돌아갈 수 없어. 그냥 여기서 청소부로 살더라도.

그렇지만 밤이면 내 안에서 검은 짐승이 깨어난다. 불면이라는 짐승. 어두워지면 일을 나가고 새벽이나 한밤중에 돌아왔다. 시드니에 와서 나는 검은색 신봉자가 되었다. 검은색 머리만 보고 자랐던 나는 다양한 인종의 머리 색깔에 주눅이 들었다. 흑색을 신봉하는 종교가 있다면 광신도가 되었을 것이다. 흑사병처럼 치명적인 색. 검은 팬티 검은 러닝 검정 바지 까만 티셔츠 차림을 선호했다. 가끔 흑색 점퍼와 코트를 입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신발로 마무리하면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캄캄한 암흑은 현란한 색과 빛이 제거된 치유의 공간이었다. 동거녀인 그녀의 졸린 목소리와 감각만이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숨고 싶었다. 숨어서 살아남아야 했다. 숨을수록 어둠은 익숙해져서 밝아지고 아침은 집요하게 다시 왔다. 모든 사물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눈이 부시다.

선글라스는 차 안에도 없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는 일은 아시아인이 백인 흉내를 내는 꼴이랄까. 흑인들 폭동이 일어났다. 피부색은 노란데 속은 하얀 과일은 바나나. 겉은 빨갛고 푸른데 속이 하얀 사과. 차라리 속이 붉거나 노란색이어도 겉만 흰색이면 등급이 좋았을까. 거리에서 마주치는 백인들보다 뼛속에 차별을 새긴 이른바 식자들의 눈초리가 두렵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는 왜 쓰는 거야?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사람들 눈을 보기가 싫어.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가 늘 증오와 살의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지.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 잘 할 줄 아는 게 없었지. 늘 못한다는 소릴 들었어, 가정과 학교와 군대와 직장에서 말 잘 듣는 인간으로 살아야 했어. 쥐 죽은 듯이 군소리 말고 조용히 구석에서 지내야 했지. 그것이 몸에 배서 눈에 띄지 않게 말이야. 그들의 눈을 살피고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아야 했어.

눈칫밥이 싫어서 검은 안경을 썼다. 눈치를 많이 봐서 광어처럼 눈이 돌아갈까 봐 검은 안경을 썼다. 그들이 모두 검게 보이니 눈치를 안 봐서 좋고 우선 마음이 편했다. 막힌 숨통이 트인 느낌이랄까.

어머니와 따로 살고 싶어. 자기 어머니는 정말 힘든 사람이야.
그녀가 주장한다.
지금 당장은 곤란해. 제발 조금만 기다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은 나는 야간 근무를 하러 집에서 나간다. 검정 운동화를 신으면서 생각한다. 검정이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검정의 깊고 그윽한 심연에 빠졌다. 검은 젯소를 바른 캔버스에 무광과 유광 흑색을 바르며 꿈을 꾸었다. 검정은 빛의 무덤인데 역설적으로 유광이나 무광이 존재했다. 사물로부터 눈에 반사해 들어오는 빛이 전혀 없는 암흑물질의 우주에서 살고 싶었다.

내가 나를 알 수 없도록 검은 캔버스에 검정아크릴로 붓질과 터치를 한다. 검정에 바다 청색을 조금씩 섞으면서 최대한 깊고 짙은 검정으로 나를 감싸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 나는 드디어 검정에 중독된 것일까. 어둠은 모든 색의 무덤이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혼란한 마음이 조금씩 너울거린다.

오늘 아침 쌀이 떨어졌다고 그녀가 말했다. 가져온 돈도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었다. 천국은 먼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이곳이 바로 백색의 천국이 아닌가. 나는 어쩌자고 두 여자를 데리고 백인의 나라에 와서 흑백인간으로 살아야 하는지. 생각이 깊어지자 가슴이 쿵쾅거리며 터질 것 같았다.

서쪽으로 기우는 은빛 햇볕이 따가울 뿐만 아니라 눈이 부시다. 대낮에 우우. 다시 우울한 짐승이 깨어나서 눈을 뜨기 전에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그렇지만 선글라스가 없다. 가방 속에도 주머니에도 없다. 분명 줄에 묶어 목에 걸었었는데 또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불안한 거리를 헤매던 나는 기념품 상점의 안경 판매대로 갔다. 검은 안경을 골라 쓰고 거울을 본다. 깊은숨을 쉴 사이도 없이 그대로 상점을 나온다. 뒤에서 점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이 흑색 물감처럼 풀려 쌓인 집들을 지나며 나는 이제껏 살면서 가장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어둠과 합체되어 곧 사라질 것이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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