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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울보 Crying baby

박인 작가
  • 입력 2020.01.03 09:45
  • 수정 2020.02.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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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가 가슴에 두른 수건을 떨어뜨렸다.
숨을 고르던 C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늦은 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내리고 집 문밖에 한 여자가 우산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비에 젖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한기 탓인지 어깨를 떨었다. 회색 통굽 하이힐을 신은 그녀 맨발이 젖어 들고 있었다.

▲내가 짐승처럼 달려들자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박인
▲내가 짐승처럼 달려들자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박인

-제가 지금 갈 곳이 없어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오늘 밤만 당신과 지낼 수 있을까요?

그녀의 이름은 C였다. 어처구니없지만 C는 내게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였다. 하긴 이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며칠 동안 겪었던 일에 비하면 말이다. 나는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한 사내를 만났다. 그는 타고난 보험 사기꾼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차량접촉 사고였다. 음주운전을 한 내 차에 일부러 부딪힌 그는 사람 죽는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는 치료비랍시고 돈을 요구했다. 그 액수가 터무니없이 고액이었다. 나는 소형차를 팔아 치료비를 지급했다. 음주운전이 문제였다. 나는 전과자가 되거나 교도소에 가기 싫었다. 급기야 대출을 받기에 이른 나에게 그는 후유장해가 남을 수도 있다고 협박을 했다.

-사채라도 끌어다 갚으라니까. 아니면 당신도 발모가질 분질러 줄까? 
사기꾼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돈이 없다고 무릎을 꿇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그렇게 인간적으로 나와야지. 돈이면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니까.

C를 만난 게 그 사기꾼과 헤어진 뒤였다. 소주 한 병을 마신 내게 C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나쁜 새끼. 그런 새끼는 잘라버려야 해. 
바람을 피운 전 남자친구한테 뱉어내는 욕설이었다. 
-그래요. 그런 멍청이 돌대가리 같은 놈은 차여도 싸지.

나는 맞장구를 쳤다. 여러 날 동안 나를 짓눌렀던 우울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가 커피를 끓이는 동안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C가 가슴에 두른 수건을 떨어뜨렸다. 알몸이 드러났다. 초점 없는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던 C는 이내 달려들었다. 다급하게 입맞춤을 하고 입술과 혀를 깨물고 결국은 완력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헤어진 애인을 증오하는 C와 사기꾼을 떨쳐내려는 나는 금방 한 몸이 되어버렸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스스로 놀랄 만큼 C에게 익숙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C의 돌대가리 애인에게 감사라도 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보 C는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게 틀림없었다. 절정에 이르자 극도로 피곤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을 고르던 C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C를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기이한 일이었다. 다른 남자를 위해 울고 있는 여자와 알몸으로 한 침대에 있는 것이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별도리가 없지 않나.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나쁜 새끼. 사내놈들은 다 똑같아. 
그녀는 잠꼬대를 했다. 나의 성기는 다시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짐승처럼 달려들자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밀쳐내고 중얼거렸다. 
-글쎄, 사내놈들은 다 똑같다니까.

내 몸의 피는 이내 식어버렸다. 이후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남자라면 고개를 저으며 넌더리를 냈다고 한다. 그 멍청이 돌대가리 남자친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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