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로맨스에 이어 리얼리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로맨스는 리얼리즘과 만나야 한다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둘 사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성인남녀라면 깊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아직 이십대 초의 풋풋한 청춘들에겐 크게 어필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20대라면 당연히 사랑은 죽고 못 사는 것으로, 사랑을 위해 부모 국경 환경은 물론이고 한 목숨 바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과감히 선언함으로써 절대사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로맨스와 리얼리즘이라는 두 화두를 들고 나왔을 때 고대해는 바로 냄새를 맡았으니, 로맨스 - 남녀, 리얼리티-현장 이런 단어를 저절로 연결지었다. 이 동영상 제작자가 하는 작업은, 남녀가 등장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되 그것을 화면으로 시시각각 정직하게 보여주는 거라고 보면 될 것이었다. 물론 로맨스의 종류와 그 범주 및 구체성의 강도 등에 따라 같은 로맨스물 내에서도 편차가 있을 수 있었다. 고대해는 질문을 하나 하였다. "로맨스라면 여고생 취향의 그런 건가요?" "아, 아닙니다. 성인남녀
고대해가 40대 동영상 제작자에게 동영상이라면 뮤직비디오나 애니메이션도 제작하느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남자는 로맨스와 리얼리즘 관련 쪽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이에 그 로맨스와 리얼리즘이란 거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바, 로맨스란 그 단어에서 풍기는 느낌은 거의 60년 대 풍으로 뭔가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하겠다. 허나 요즘은 ‘로맨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만남, 접촉, 파탄 이러한 세 단계를 밟아, 시작했나 하면 끝나 있고 끝났나 싶으면 다시 새로운 파트너와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40대 동영상 제작자와 천하제일 모델 고대해가 한정식집에서 일금 삼만 오천원 짜리 코스 에이에 소주 두 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잔한 대화를 이어 간 지 어언 한 시간이 지났다. 여기서 잔잔한 대화란, 분위기 자체가 선술집처럼 떠들고 마시는 데가 아니고 음식 하나하나도 결코 막 내온 것이 아니기에 거기에 맞춰 사람들의 대화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국제 항공기에서 흔히 한국인 사업가가 양말을 벗는다든가, 트림을 연속으로 한다든가, 술주정을 하며 큰 소리를 친다든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고함친다거나, 방구
남녀가 만났을 때, 특히 처음 만났을 때, 그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상당히 경직되고 형식적인 태도를 선보이기 마련인데, 음식을 앞에 두었을 경우에도 정신없이 집어먹는 평소의 습관일랑 온데간데없고, 신중히 마치 타자가 공을 고르듯 눈으로 접시 하나하나를 잘 살펴본 다음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뻗어 음식 한 점을 집어 입 안에 고이 넣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동작이 극히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진행되므로 보는 사람마저 숨막힐 듯하며, 저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 이들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오늘의 동영상 40대 제작자와 고대해 모델의 경우
"에이 코스로 해요." 고대해가 한 이 말은 어떤 가격대의 메뉴를 선택할 것인가 사뭇 긴장하며 서 있던 여종업원에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종업원은 좀 더 고가대의 메뉴를 선택하도록 적극 권하지 못한 자괴감이 뒤섞인 얼굴로 "에이 코스요?" 하고 한 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거쳐봐야, 뭘 또 묻느냐는 표정의 고대해의 단호한 얼굴만 확인할 따름이었다. 동영상 제작자인 40대 남자와 위압적인 몸매의 모델 고대해가 유명 한정식집에서 1인 당 35,000원에서 95,000원까지 나열되어 있는 차칸 메뉴를 둘러싸고 서로를 배려하고 있
40대 동영상 제작자가 고대해 모델에게, 한정식집에 마주 보고 앉아 어서 메뉴판을 열어보시라고 함에 따라 고대해는 은박 입힌 그 육중한 메뉴판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혔다. 웬만한 여성이면 심장이 떨려 조심조심 열어보며 가격을 훔쳐보았을 터인데, 그리고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빛이 되었을 터인데, 우리의 고대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은박 메뉴판을 활짝 열어젖혔을 뿐 아니라 메뉴의 내용까지 사시눈으로 거만하게 훑어보았던 것이다. 보통 여성이면 매우 공손한 태도로, 또는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태연한 척 하며 메뉴판을 읽어
고대해가 한정식을 추천하고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이를 받아들여 저녁메뉴는 이 근처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정식으로 결정이 났다. 남녀가 함께 음식을 택할 때 그 주도권은 과거엔 남자가 주로 쥐고 있었으나 차차 여성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게 추세다. 특히 가정주부의 경우 외식 시 남편에게 형식적으로 뭐 먹을까 하고 묻긴 하나, 엄밀히 따져보면 뭘 먹고 싶냐가 아니라 자신이 뭘 먹으면 좋겠느냐는 가벼운 물음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겠다. 이럴 때 눈치 없이 족발이니 순두부찌개니 해가며 의견을 내봤자, 결론이 이미 나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제가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직접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모 프로덕션 대표이자 동영상 제작자인 40대 남자의 제안은 고대해에게 전달은 되었지만 바로 수락되지는 않았다. 고대해는 그저 엷게 웃었을 따름으로 즉답을 하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동영상 제작자에겐 희망이 비치는 일이었다. `됐고` 같은 소리를 내뱉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를 봐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남자의 진진한 제안이나 배려를 `됐고` 같은 싸가지 없는 말투로 무안을 주며 돼도 않은 불순한 쾌감을 얻고 있는가? `됐고`가 뭔가? 우리 고대해 언
40대 동영상 제작자가 국립공원 앞 찻집에서 고대해와 함께 한 시간도 어언 두 시간이 지나가, 거리에 어스름이 깔리고, 두 사람은 모든 할 말을 마친 사람처럼 잠시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 차 한 잔을 마시고 저녁이나 하며 저녁에 반주나 곁들이며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나가고자 했던 사내는, `차나 마저 마시라`는 어쩜 모욕적인 발언을 고대해에게서 들은 이후론 상당히 풀이 죽어 말까지 더듬거리며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만 간간이 끌어가다 그만 우물 같은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 때가 되면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걸치며 살아온 세월 이
40대의 영상전문가와 떠오르는 모델 고대해가 찻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은 지가 말 그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사내가 ‘어디 조용한 곳’을 제의하였으나 고대해는 차나 마시라고 담담하게 응대했다. 어스름이 깔려오기 직전의 도심의 거리는 약간의 기대와 흥분을 안고 술렁이건만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40대 사내는 남자가 아무 조건 없이 또 하나의 미끼도 없이 여자를 유혹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해서 나중에 극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즉 제의라고 할 만 한 것을 좀 일찍 꺼내놓기로
40대의 동영상 감독이 고대해와 찻집에 앉아 첫 남남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저도 지하철을 타고 올 걸 그랬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그 말을 한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다. 즉 술을 한 잔 마시면 좋겠는데 차를 갖고 와서 매우 아쉽다는 건지 `나도 이제 서민들과 함께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겪어나갈 작정이다`라고 선포하는 건지, `사실은 승용차를 타고 왔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차종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달라` 그런 뜻인지 듣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특히 타고 온 차종까지 은근히 암시한다는
40대의, 선글라스를 윗주머니에 꽂은, 동영상 전문 촬영작가가 피사체 고대해와 커피숍에 서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놓고 서로를 알아가려 할 때, 그 때가 석양의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 흔히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일컫는 그러한 때였다. 석양을 배경으로 고대해가 반은 그늘이 진 얼굴로 담배 한 대를 빼 물었을 때 40대 사내는 매우 정중하게 불을 붙여 드렸다. 서양 영화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써먹었던 흔한 장면이나 대한민국에서는 여자상사를 둔 딸랑이의 짓이거나 술집에서 기분 삼아 아가씨에게 한 번 서비스 해 주는 거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모델 고대해의 사진 촬영을 줄곧 지켜본 40대 사내가 피사체 역할을 하고 있는 고대해에게 "동영상에 어울릴 것 같다고" 말을 던진 후 두 사람 간에는 일종의 친밀감과 탐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무슨 말이겠는가? `내가 동영상을 촬영하는데 네가 촐연해라!` 이 한 마디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에는 절차가 있으니 서로를 보다 알아가는 과정이 요구되었다.이렇게 해서 40대의, 선글라스를 양복 윗주머니에 꽂은 사내는 압도하는 눈빛에 당당한 체구의 고대해 모델과 고궁 앞 커피숍에서 가벼운 자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진작
“동영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40대 사내는 고대해가 덤덤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자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발군의 여성은 결코 호들갑을 떨거나 갑자기 고무되어 이성을 잃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고대해는 수많은 남성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만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대해가 모델로 나감으로써 그 남성잡지는 상당한 매출 신장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대해는 지금까지의 어떤 모델과도 그 형태와 느낌과 아우라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남성의 채워지지
40대의 선글라스를 윗주머니에 꽂은 사내가 `동영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고 고대해에게 말했을 때 고대해는 동영상이 영화, 드라마, 광고 그런 걸 의미한다는 걸 캐치하고 있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델로서 모 남성잡지의 화보 12면을 책임지고 있는 주요 모델이자 저명 사진작가의 피사체로서 품위를 깨지 않고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사내는 고대해가 호들갑을 떨지도, 크게 흥분하지도, 쩔쩔매지도 않고 부처의 제자처럼 담담하게 나오자 담대한 여인이라는,
고대해가 다양한 포즈를 취해가며 소위 여체의 신비를 주제로 작품사진을 찍고 있을 때, 늦게 나타나 사죄라도 하듯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작가가 고대해 피사체를 두고 촬영에 여념이 없을 때, 가는 곳마다 조용히 이동하며 주시하는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는 40대 초반 사내였다. 선글라스를 벗어 윗주머니에 꽂은 그는 팔짱을 끼었다 풀었다 하면서 고대해를 예의주시 하였는데 그의 냉철하고 사려깊은 시선에는 고대해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이 아닌 뭔가 확신에 가까운 어떤 암시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이 여인에게서 지금까지의 많은 여성들에게서
고대해에게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가 `누구시냐`는 말을 듣고 이런 사람이라고 `월드 영상문화원 마케팅 이사`라고 적인 명함을 건넸다가, 그 명함이 고대해의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낙엽처럼 팔락이며 떨어지는 장면을 목도한 사나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마치 옛남자처럼 그렇게 서 있고 고대해는 자기 갈 길을- 갈 길이란 그냥 길로 공원의 산책로를 말하는 것이지만-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해가 `차나 한 잔`에 쉽게 응할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명함의 직책에
지난 주에 대낮의 공원에서 고대해에게 다가온 사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짧은 간격을 두고 지껄여나갔다. “저어.....” “ 혹시.... 미영 씨 친구 분 아니신가요?” “아.... 전 미영 씨의 친구 분과 너무 닮으셔서 그만...”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시죠.” “잠깐이면 됩니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이 중에서도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시죠"는 상당히 유명한 대사로 세월을 건너뛰어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그럼 고대해는 어떻게 대답했나? 중간에 한 말들은 모두 생략하고 마지막 대사만 전달하면 아래와 같
남자가 욕실에서 씻고 있는 동안 여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이런 적절한 질문에 대한 답이 구체적으로 나온 적이 있었던가? 그 반대의 경우는 허다한 것이, 사내들이 잘 되었다고 칭하는 모든 소설과 영화는 여자가 샤워하는 동안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이라기보다 상상을 하는지 문자와 영상으로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을 여체에만 한정하는 건 대단히 폭 좁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마돈걸처럼 ‘남녀 70세 부동석’ 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육체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