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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06) - 명함이 도로 건네 올 수도 있나?

서석훈
  • 입력 2012.05.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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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지난 주에 대낮의 공원에서 고대해에게 다가온 사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짧은 간격을 두고 지껄여나갔다.
“저어.....” “ 혹시.... 미영 씨 친구 분 아니신가요?” “아.... 전 미영 씨의 친구 분과 너무 닮으셔서 그만...”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시죠.” “잠깐이면 됩니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이 중에서도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시죠"는 상당히 유명한 대사로 세월을 건너뛰어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그럼 고대해는 어떻게 대답했나? 중간에 한 말들은 모두 생략하고 마지막 대사만 전달하면 아래와 같다.
"누구신데요?" 이것은 사내가 그다지 예상 못했던 대답이었다. 누구시냐니? 지나가는 과객 아닌가? `지나가는`는 뻬고라도 `과객` 아닌가? 도대체 누구이길 바라는가?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낡은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빼내 들었다. 이럴 때 명함보다 확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내가 그걸 정중하게 건네자 고대해는 명함을 받아들고 그 깨알 같은 글씨를 멀리서도 잘도 읽어내려갔다. 직함에 시이오라는 영자는 없었지만 마케팅 이사라고 쓰여 있고 중앙에는 커다랗게 `월드 영상문화연구원`이라고 영어로는 world picture 어쩌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여의도 무슨 오피스텔 703호가 적혀 있고 지역번호가 있는 유선 전화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셀 폰은 없고 대신 메일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고대해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이런 명함이 집에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버려야 하는데 귀찮아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명함들로, 대개 주소가 어느 오피스텔로 되어 있고 유선 전화가 있고 상장 회사 비슷한 이름 또는 유명연구소 비슷한 이름을 내걸고 이사니 전무니 그런 명칭을 박아 갖고 있었다.

고대해는 명함을 도로 건네주었다. 사내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지금까지, 건너간 명함을 도로 건네 오는 이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명함을 도로 건네 오는 그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 웨이터나 삐끼가 건넨 명함도, 신장개업 음식점 명함도 지나가다 몰래 버릴지언정 도로 건너오지는 않잖은가? 이게 어떻게 교육을 받은 여자이기에 그 어미며 친구들이 어떤 자들이기에 이런 무례를 범하나 이런 눈빛으로 망연히 남자는 명함을 받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는데 마침내 고대해는 그것을 공중에서 놓아버렸다. 그러니까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던 명함이 깃털처럼 가볍게 팔락이며 떨어지게 뇌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고대해는 말없이 걸어갔고 사내는 명함을 줍지도 못한 채 넋이 나가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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