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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13) - 라이터를 켜라

서석훈
  • 입력 2012.07.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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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모델 고대해의 사진 촬영을 줄곧 지켜본 40대 사내가 피사체 역할을 하고 있는 고대해에게 "동영상에 어울릴 것 같다고" 말을 던진 후 두 사람 간에는 일종의 친밀감과 탐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무슨 말이겠는가? `내가 동영상을 촬영하는데 네가 촐연해라!` 이 한 마디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에는 절차가 있으니 서로를 보다 알아가는 과정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40대의, 선글라스를 양복 윗주머니에 꽂은 사내는 압도하는 눈빛에 당당한 체구의 고대해 모델과 고궁 앞 커피숍에서 가벼운 자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진작 고대해를 촬영하였던 사진작가는 촬영이 끝나자 "그럼 바쁘실 텐데 먼저 가보세요."라는 고대해의 작별인사를 일방적으로 받고 더 이상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집으로 가야 했다. 사실은 모델과 사진작가로서 예술이라는 중요한 작업에 공동 참여하며 누가 주체고 누가 객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었고, 그렇다면 많은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시켰기에 작업 후의 조촐한 자리, 즉 커피 한 잔이라든가 가볍게 와인을 나눈다든가, 허기가 진다면 바로 식사로 들어간다든가 그러한 뒷자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자리에서 예술에 대 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이 오가며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교감을 나누며 밝은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배려라도 하는 듯 그만 가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평상시 같으면 `아 난 시간이 괜찮은데 차라도 한 잔 하죠` 말을 건네고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네, 그러시죠` 하고 대꾸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 낯선 40대 남자가 고대해에게 직업적인 포즈를 취하며 수작을 걸어, 아마도 둘이서 약속을 잡은 것 같으니 기분이 많이 좋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하였던 것이다. 사진 작가는 모델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아본 게 얼마만인가 새삼 허탈했으나, 이 일로 들어올 잡지의 입금액을 생각하며 속을 가라앉히려 얘쓰며 전철역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편 고대해는 40대 사내와 차 한 잔의 시간을 갖기에 이르러, 커피숍의 야외 베란다에 앚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40대 사내는 즉각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는데 그 동작이 신중하면서도 존중심이 적지않이 깃들어 잇었다. 사실 불 하나 붙이는데도 아부끼가 철철 넘치는 놈, 라이터는 왜 안 갖고 다니냐 식으로 막 갖다대는 놈, 이리 와서 불을 붙여보라는 듯 거리를 두고 불을 켜는 놈, 자기 눈썹부터 태워먹는 놈, 별의 별 놈이 다 있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불 하나 붙이는 데서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대해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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