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지 魏(위)서 동이전 韓(한)조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 경 조선왕 준은 (위)만의 쿠데타로 쫓겨나 海(해) 지역에 있던 韓(한) 으로 들어갔다.
1) 將 其 左右宮人 走 入 海,居 韓地,自號 韓王。
준왕은 그의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海해 지역으로 들어갔다. 코리아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코리아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2) 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
코리아 한韓은 차이나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사시사철 조공했다.
2. 위 기록에서 다음 사항을 알 수 있다.
① 조선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② 조선이 있던 기원전 200년에 코리아 韓(한)나라도 있었다.
③ 코리아 韓(한)은 海(해) 지역에 있었다. 海(해) 지역은 어디인가?
3. 삼국지 위서에서 그대로 인용한 ‘위략’이란 역사책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요약해 보자. 붉은 글씨는 필자가 단 주석이다.
1) 昔 箕子之後 朝鮮侯,見 周衰,燕 自尊為王,欲東略地,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 亦 自稱 為王,欲 興兵 逆擊燕 以尊 周室。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역습하려 했다. 그리하여 주周나라 왕실을 존중하려 하였다.
其大夫 禮 諫之,乃止。使禮 西 說燕,燕止之,不攻。
조선의 대부 예禮가 연나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간하므로 공격을 중지하였다. 대부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燕나라를 설득하여 연燕나라도 동쪽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2) 後 子孫 稍 驕虐,燕 乃 遣 將秦開 攻 其西方,取地 二千餘里,
至 滿 番汗 為界,朝鮮遂弱。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져서, 연燕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 한서 지리지 요동군에 번한番汗현이 있다.
3) 及 秦 并 天下,使 蒙恬 築 長城,到 遼東。
진시황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 요동이 진秦나라와 ‘조선’의 접경지역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時 朝鮮王 否 立,畏 秦襲之,略 服屬 秦,不肯朝會。否死,其子 準立。
이때에 조선왕 ‘부’가 왕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의 침공을 경계하면서 정략적으로 진秦나라에 복속하는 척 하고, 조공을 하거나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5) 二十餘年 而 陳、項起,天下亂, 燕、齊、趙民 愁苦,稍稍 亡往 準,
準乃 置 之 於西方。
그 뒤 20여년이 지나 차이나에서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과 초나라의 ‘항우’가 일어나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나라·제나라·조나라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조선의 ‘준’에게 亡命하므로, ‘준’은 이들을 조선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 연나라·제나라·조나라燕·齊·趙 접경지역이 ‘요동’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때의 연나라는 최소한 태행산맥 서쪽이나 황하의 남쪽에 있어야 ‘조선’과 접경할 수 있다.
6) 及 漢以 盧綰 為 燕王,朝鮮 與 燕界 於 浿水。
차이나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나라 왕燕王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요동지역 안에 패수浿水가 있어야 한다. 한서지리지 요동군 조에 패수浿水현이 있다.
7) 及 綰反,入匈奴,燕人衛滿 亡命,為 胡服,東 度 浿水,詣 準 降,
說 準 求 居 西界,(故)〔收〕中國 亡命 為 朝鮮 藩屏。
‘노관’이 차이나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한 뒤, 연燕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호胡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조선의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中國의 망명자를 거두어 외적으로부터 조선의 병풍지역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 패수의 서쪽에 연나라가 있다. 패수는 여전히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이다. ‘조선’이 지금의 천진시 동북쪽 진황도시에 있다고 하면 연나라가 가로 막고 있어 제나라와 조나라의 백성들이 ‘조선’에 망명할 수 없다. 즉 ‘조선’은 지금의 산서성, 하북성,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을 수 밖에 없다.
8) 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 ‘규圭’ 는 天子(천자)의 표시물이다. 조선은 스스로를 천자국임을 분명히 했다.
9) 滿誘 亡黨,眾 稍 多,乃 詐 遣人 告準,言 漢兵 十道 至,求入 宿衛,
遂 還攻準。準 與滿 戰,不敵也。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위만’이 왕궁에 들어가서 지키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위만’의 쿠데타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10) 其 (준의) 子 及 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준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姓을 사용하였다. 원래 ‘조선’의 왕족들의 성이 한씨韓氏 라는 의미이다.
11) 準王 海 中, 不 與朝鮮 相往來.
준準은 海해 지역에 있으면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12) 其後絶滅, 今韓人 猶有 奉 其祭祀者.
그 뒤 준準의 후손은 끊어졌으나絕滅, 지금 (코리아 韓(한) 사람)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4. 위 ‘위략’의 기록에서 다음 사항을 알 수 있다.
① ‘조선’과 ‘코리아 韓(한)’은 바로 붙어 있다.
② 海(해) 가 바다가 아니고 지역임은 [ 準王 海 中, 不 與朝鮮 相往來.]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③ 사마천 ‘사기’의 다른 나라, 다른 왕조에서 이미 알고 있듯이 ‘韓(한)’ 은 지역이기도 하고, 성씨이기도 한 것이다.
④ ‘조선’의 왕족의 성씨가 ‘韓(한)’ 이다.
1) (위)만에게 쫓겨난 ‘한 준’ (성이 韓(한)이고 이름이 준) 은 韓(한) 지역에서 왕이 되었다. 결국 코리아 韓(한) 나라는 조선연방 국가중의 하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2) 삼국지 위서 등은 韓(한) 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분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5. 의문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위략’에 나오는 코리아 韓(한)과,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차이나 지역에 있는 ‘코리아 韓(한)’이 같은 민족 혹은 같은 지역인가 하는 점이다.
1) ‘코리아 韓(한) (마한, 진한, 변한)’이 ‘사기’의 韓(한)과 동족 혹은 같은 국가 혹은 왕조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재까지 필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2)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한세가韓世家’를 요약한 것이 위키백과이다.
3) ‘사기’ ‘한세가韓世家’ 앞 부분이다.
[ 한(韓)나라의 선조는 주(周) 천자와 같은 성(姓)인 희씨(姬氏)이다.
韓之先 與周 同姓,姓 姬氏。
그 후 후예들은 진(晉)나라를 섬겨 한원(韓原)에서 봉토를 받아 한무자(韓武子)라고 칭했다. 其後 苗裔 事 晉,得 封於 韓原,曰 韓武子。
(이 때 한원(韓原) 은 지금의 섬서성 漢城市한성시 일대의 평원을 말하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한무자의 3대 후손에 한궐(韓厥)이 있었는데, 봉토의 명칭을 좇아 한씨(韓氏)라 했다. 武子後 三世 有 韓厥,從 封姓 為 韓氏。]
4) ‘사기’ ‘한세가韓世家’ 끝 부분이다.
王安 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한韓왕안 5년(기원전 234년),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한韓나라가 급해져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진秦나라가 한비를 억류시켰다가 죽였다.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 潁川郡。韓遂亡。〔一〕
한韓 왕안 9년(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韓왕 안을 포로로 잡고 한韓나라의 땅을 전부 진秦나라에 귀속시켜 영천군(穎川郡)으로 삼았다. 한韓나라가 마침내 멸망했다.
太史公曰:韓厥之感晉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韓氏之功,於晉未睹其大者也。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태사공은 말한다.
“한궐(韓厥)이 진 경공(晉 景公)의 마음을 움직여 조씨 고아(孤兒) 조무(趙武)로 하여금 조씨의 대를 잇게 함으로써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의 의로움이 성취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음덕이다.
한씨의 공은 진(晉)나라에서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후로서 10여 대를 이어간 것은 마땅하도다!”
(번역 swings81 https://m.blog.naver.com/swings81/222150518654 )
5) 영천군은 차이나 하남성 허창시 일대이다. 허창시는 정주시 남쪽 100㎞, 낙양시 동남쪽 130㎞ 지점에 있다.
秦(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韓(한) 나라가 차이나 대륙에 있는 코리아 韓(한) 나라 (마한, 진한, 변한)이라면, 차이나와 코리아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영천군 穎川郡 : 중국 진나라의 행정 구역의 하나. 진시황 17년(B.C.230)에 내사 등(騰)이 韓(한)나라를 공격하여 왕을 사로잡고 영토를 몰수한 후 이를 설치하였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허창(許昌) 일대이다.
부록1 위키백과 [한 (전국)]
1) 다음은 위키백과의 코리아 韓(한) 나라 요약이다.
2)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춘추 시대 진나라(晉)의 공족이며, 진 목후(晉穆侯)의 아들인 환숙(桓叔)의 아들뻘이 되는 한만(韓萬)이 한원(韓原)이라는 지역에 봉해졌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희성(姫姓)을 가졌던 한무자(韓武子) 한만의 일가들이 한씨(韓氏)를 칭하였고, 성씨와 땅이름에서 따와서 지칭되었다.
한원 지역에는 원래 주나라 선왕 때 분봉된 희성 제후 한후(韓侯)가 있었다. 이 한나라는 50여 년 동안 존속했다가 진(晉)에게 멸망했고, 바로 그 지역을 영지로 받은 것이 한만이다.
3) 기원전 620년 한만의 고손자 한궐(韓厥)이 사마로 등용되었고, 그 군락이 뛰어났다. 과거에 신세를 지었던 조씨(趙氏) 일족의 재부흥에 힘을 보태었고, 그 여망으로 기원전 573년 한궐이 정경(正卿)과 중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다. 한만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4) 기원전 541년 그의 아들 한기(韓起)도 정경이 되면서, 그는 정치를 관장하는 대신인 육경(六卿)이 되었다.
5) 춘추 시대 말기에는 한호(韓虎)가 조씨, 위씨(魏氏) 일족등과 함께 육경 중에 강력한 가문인 지씨(知氏) 일족을 기원전 453년에 멸망을 시켰다.
6) 후에 위씨, 조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주나라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아서 비로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7)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을 시켰고, 전국 칠웅 중에 최약체였고. 항상 서쪽에 있는 진나라(秦)의 침공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신불해(申不害)을 재상으로 발탁한 한 희후(韓喜侯)의 치세에는 국내도 안정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즉위한 한 선혜왕은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고, 재상 신불해가 죽은 후에는 다시 진나라의 침공에 시달렸다.
8) 한나라의 패망을 우려했던 공자 한비(韓非)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韓非子)이다. 그러나 한비의 주장은 모국인 한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왕 영정(嬴政)이 한비자에 관심이 있었다. 한나라는 역으로 이용해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었다. 진나라가 관개 사업을 하도록 하고, 진나라의 국력을 쇄퇴시키려고 하였지만 이에 발각되었다. 이 공사로 만들어진 수로는 후에 정국거(鄭國渠)로 불리며 중국 고대 3대 수로 시절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진나라를 풍요롭게 하였다.
9)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함락되었고, 6국 중에 가장 빨리 멸망하였고, 한나라의 영토 전체가 영천군이라는 새로운 진나라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10) 기원전 226년 한나라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한왕 안(韓王安)이 처형됐다.
부록 2 ‘사기’ ‘한세가韓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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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之先與周同姓,姓姬氏。其後苗裔事晉,得封於韓原,曰韓武子。武子後三世有韓厥,從封姓為韓氏。
韓厥,晉景公之三年,晉司寇屠岸賈將作亂,誅靈公之賊趙盾。趙盾已死矣,欲誅其子趙朔。韓厥止賈,賈不聽。厥告趙朔令亡。朔曰:「子必能不絕趙祀,死不恨矣。」韓厥許之。及賈誅趙氏,厥稱疾不出。程嬰、公孫杵臼之藏趙孤趙武也,厥知之。
景公十一年,厥與郤克將兵八百乘伐齊,敗齊頃公于鞍,〔一〕獲逢丑父。於是 晉作六卿,而韓厥在一卿之位,號為獻子。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 歷谿卿 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조선의 승상 넘버 투 가 예谿의 최고 벼슬 卿경을 통하여 간언하였으나 우거(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으로 갔다.
晉景公十七年,病,卜大業之不遂者為祟。韓厥稱趙成季之功,今後無祀,以感景公。景公問曰:「尚有世乎?」厥於是言趙武,而復與故趙氏田邑,續趙氏祀。
晉悼公之(十)〔七〕年,韓獻子老。獻子卒,子宣子代。宣字徙居州。〔一〕
晉平公十四年,吳季札使晉,曰:
「晉國之政卒歸於韓、魏、趙矣。」
晉頃公十二年,韓宣子與趙、魏共分祁氏、羊舌氏十縣。
晉定公十五年,宣子與趙簡子侵伐范、中行氏。宣子卒,子貞子代立。貞子徙居平陽。〔一〕
貞子卒,子簡子代。〔一〕
簡子卒,子莊子代。
莊子卒,子康子〔二〕代。
康子 與 趙襄子、魏桓子 共敗 知伯,分其地,地益大,大於諸侯。
康子卒,子武子〔一〕代。
武子二年,伐鄭,殺其君幽公。
十六年,武子卒,子景侯立。〔二〕
景侯 虔元年,伐鄭,取雍丘。
二年,鄭敗我負黍。
六年,與趙、魏俱得列為諸侯。
九年,鄭圍我陽翟。
景侯卒,子列侯取立。〔一〕
列侯三年,聶政殺韓相俠累。〔一〕
九年,秦伐我宜陽,取六邑。
十三年,列侯卒,子文侯立。〔二〕
是歲魏文侯卒。
文侯二年,伐鄭,取陽城。
伐宋,到彭城,執宋君。
七年,伐齊,至桑丘。
鄭反晉。
九年,伐齊,至靈丘。〔一〕
十年,文侯卒,子哀侯立。
哀侯元年,與趙、魏分晉國。
二年,滅鄭,因徙 都 鄭。〔一〕
〔一〕索隱按:紀年魏武侯二十一年,韓滅鄭,哀侯入于鄭。
二十二年,晉桓公邑哀侯于鄭。
是 韓既徙都,因 改號 曰 鄭,故 戰國策 謂 韓惠王 曰 鄭惠王,猶 魏徙 大梁 稱梁王然也。
六年,韓嚴弒其君哀侯。而子懿侯立。〔一〕
懿侯二年,魏敗我馬陵。〔一〕
五年,與魏惠王會宅陽。〔二〕
九年,魏敗我澮。〔三〕
十二年,懿侯卒,子昭侯立。
昭侯元年,秦 敗 我西山。
二年,宋取我黃池。〔一〕
魏取朱。
六年,伐 東周,〔二〕 取陵觀、邢丘。
八年,申不害相韓,脩術行道,國內以治,諸侯不來侵伐。
十年,韓姬 弒 其君 悼公。〔一〕
十一年,昭侯 如秦。
二十二年,申不害死。
二十四年,秦來拔我宜陽。
二十五年,旱,作高門。屈宜臼〔一〕曰:
「昭侯不出此門。何也?不時。吾所謂時者,非時日也,人固有利不利時。昭侯嘗利矣,不作高門。往年秦拔宜陽,今年旱,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而顧益奢,此謂『時絀舉贏』。」〔二〕
二十六年,高門成,昭侯卒,〔三〕果不出此門。
子宣惠王立。
宣惠王五年,張儀相秦。
八年,魏敗我將韓舉。〔一〕
十一年,君號為王。
與趙會區鼠。
十四,秦伐敗我鄢。〔二〕
十六年,秦敗我脩魚,〔一〕 虜得韓將貘、申差於濁澤。〔二〕
韓氏急,公仲〔三〕謂 韓王曰:
「與國非可恃也。今秦之欲伐楚久矣,王不如因張儀為和於秦,賂以一名都,具甲,與之南伐楚,此以一易二之計也。」〔四〕
韓王曰:「善。」乃警公仲之行,〔五〕將西購於秦。〔六〕
楚王聞之大恐,召陳軫告之。陳軫曰:
「秦之欲伐楚久矣,今又得韓之名都一而具甲,秦韓并兵而伐楚,此秦所禱祀而求也。今已得之矣,楚國必伐矣。王聽臣為之警四境之內,起師言救韓,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使信王之救己也。縱韓不能聽我,韓必德王也,〔七〕必不為鴈行以來,〔八〕是秦韓不和也,兵雖至,楚不大病也。為能聽我絕和於秦,秦必大怒,以厚怨韓。韓之南交楚,必輕秦;輕秦,其應秦必不敬:是因秦、韓之兵而免楚國之患也。」
楚王曰:「善。」
乃警四境之內,興師言救韓。
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
謂韓王曰:
「不穀國雖小,已悉發之矣。願大國遂肆志於秦,不穀將以楚殉韓。」〔九〕
韓王聞之大說,乃止公仲之行。〔一〇〕公仲曰:
「不可。夫以實伐我者秦也,以虛名救我者楚也。王恃楚之虛名,而輕絕彊秦之敵,王必為天下大笑。且楚韓非兄弟之國也,又非素約而謀伐秦也。已有伐形,因發兵言救韓,此必陳軫之謀也。且王已使人報於秦矣,今不行,是欺秦也。夫輕欺彊秦而信楚之謀臣,恐王必悔之。」
韓王不聽,遂絕於秦。秦因大怒,益甲伐韓,大戰,楚救不至韓。
十九年,大破我岸門。〔一一〕 太子倉質於秦以和。
二十一年,〔一〕與秦共攻楚,〔二〕敗楚將屈丐,斬首八萬於丹陽。〔三〕是歲,宣惠王卒,太子倉立,是為襄王。〔四〕
襄王四年,與秦武王會臨晉。其秋,秦使甘茂攻我宜陽。
五年,秦拔我宜陽,〔一〕斬首六萬。秦武王卒。
六年,秦復與我武遂。
九年,秦復取我武遂。
十年,太子嬰朝秦而歸。〔二〕
十一年,秦伐我,取穰。〔三〕與秦伐楚,敗楚將唐眛。
十二年,太子嬰死。公子咎、公子蟣蝨爭為太子。時蟣蝨質於楚。蘇代謂韓咎曰:「蟣蝨亡在楚,楚王欲內之甚。今楚兵十餘萬在方城之外,〔一〕公何不令楚王築萬室之都雍氏之旁,〔二〕韓必起兵以救之,公必將矣。公因以韓楚之兵奉蟣蝨而內之,其聽公必矣,必以楚韓封公也。」韓咎從其計。
楚圍雍氏,〔一〕韓求救於秦。秦未為發,使公孫昧入韓。公仲曰:
「子以秦為且救韓乎?」
對曰:「秦王之言曰『請道南鄭、藍田,〔二〕出兵於楚以待公』,殆不合矣。」〔三〕
公仲曰:「子以為果乎?」
對曰:
「秦王必祖張儀之故智。〔四〕楚威王攻梁也,張儀謂秦王曰:
『與楚攻魏,魏折而入於楚,韓固其與國也,是秦孤也。不如出兵以到之,〔五〕魏楚大戰,秦取西河之外以歸。』
今其狀陽言與韓,其實陰善楚。公待秦而到,必輕與楚戰。楚陰得秦之不用也,必易與公相支也。〔六〕公戰而勝楚,遂與公乘楚,施三川而歸。〔七〕公戰不勝楚,楚塞三川守之,〔八〕公不能救也。竊為公患之。司馬庚〔九〕三反於郢,甘茂與昭魚〔一〇〕遇於商於,其言收璽,〔一一〕實類有約也。」
公仲恐,曰:「然則柰何?」曰:「公必先韓而後秦,先身而後張儀。〔一二〕公不如亟以國合於齊楚,齊楚必委國於公。公之所惡者張儀也,〔一三〕其實猶不無秦也。」
於是楚解雍氏圍。〔一四〕
蘇代又謂秦太后弟羋戎〔一〕曰:「公叔伯嬰恐秦楚之內蟣蝨也,〔二〕公何不為韓求質子於楚?〔三〕楚王聽入質子於韓,〔四〕則公叔伯嬰知秦楚之不以蟣蝨為事,必以韓合於秦楚。秦楚挾韓以窘魏,魏氏不敢合於齊,是齊孤也。公又為秦求質子於楚,〔五〕楚不聽,怨結於韓。韓挾齊魏以圍楚,楚必重公。〔六〕公挾秦楚之重以積德於韓,公叔伯嬰必以國待公。」
於是蟣蝨竟不得歸韓。〔七〕韓立咎為太子。齊、魏王來。〔八〕
十四年,與齊、魏 王共擊秦,至函谷而 軍焉。
十六年,秦與我河外及武遂。襄王卒,太子咎立,是為釐王。
釐王三年,使公孫喜率周、魏攻秦。秦敗我二十四萬,虜喜伊闕。
五年,秦拔我宛。〔一〕
六年,與秦武遂地二百里。〔二〕
十年,秦敗我師于夏山。
十二年,與秦昭王會西周而佐秦攻齊。齊敗,湣王出亡。
十四年,與秦會兩周閒。
二十一年,使暴〔三〕救魏,為秦所敗,走開封。
二十三年,趙、魏攻我華陽。〔一〕韓告急於秦,秦不救。韓相國謂陳筮〔二〕曰:
「事急,願公雖病,為一宿之行。」陳筮見穰侯。穰侯曰:
「事急乎?故使公來。」陳筮曰:
「未急也。」穰侯怒曰:
「是可以為公之主使乎?夫冠蓋相望,告敝邑甚急,公來言未急,何也?」陳筮曰:「彼韓急則將變而佗從,以未急,故復來耳。」穰侯曰:
「公無見王,請今發兵救韓。」
八日而至,敗趙、魏於華陽之下。是歲,釐王卒,子桓惠王立。
桓惠王元年,伐燕。
환혜왕 원년(기원전 272년)에 연(燕)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가 어디에 있어야 공격할 수 있는가? 韓(한)나라의 북쪽은 위나라와 조나라가 있어 연나라와 韓(한)나라는 국경을 맞댈 수가 없다!
九年,秦拔我陘,城汾旁。〔一〕
환혜왕 9년(기원전 263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형(陘)을 함락시키고 분수(汾水) 가에 성을 쌓았다.
十年,秦擊我於太行,〔二〕我上黨郡守以上黨郡降趙。
환혜왕 10년(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태행산(太行山)에서 공격하니 한나라의 상당군(上黨郡) 군수가 상당군을 바치며 조나라에 투항했다.
十四年,秦拔 趙 上黨,〔三〕 殺 馬服 子 卒 四十餘萬 於長平。
환혜왕 14년(기원전 258년), 진나라가 상당을 빼앗고, 장평(長平)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 조괄의 병졸 40만여 명을 생매장했다.
十七年,秦拔我陽城、負黍。〔四〕
二十二年,秦昭王卒。
二十四年,秦拔我城皋、滎陽。(지금의 정주시)
二十六年,秦悉拔我上黨。二十九年,秦拔我十三城。
三十四年,桓惠王卒,子王安立。
王安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潁州郡。韓遂亡。〔一〕
太史公曰:韓厥之感晉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韓氏之功,於晉未睹其大者也。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索隱述贊】韓氏之先,實宗周武。事微國小,春秋無語。後裔事晉,韓原是處。趙孤克立,智伯可取。既徙平陽,又侵負黍。景趙俱侯,惠(文)〔又〕僭主。秦敗脩魚,魏會區鼠。韓非雖使,不禁狼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