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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대한민국) 의 韓(한)은 어디서 시작했나? 마한·진한·변한 三韓(삼한)이 차이나 대륙에 있었다!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79)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7.29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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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 ()서 동이전 ()조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 경 조선왕 준은 ()만의 쿠데타로 쫓겨나 () 지역에 있던 () 으로 들어갔다.

 

1) 將 其 左右宮人 走 入 海居 韓地自號 韓王

준왕은 그의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해 지역으로 들어갔다. 코리아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코리아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2) 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

코리아 한은 차이나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사시사철 조공했다.

 

2. 위 기록에서 다음 사항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조선이 있던 기원전 200년에 코리아 ()나라도 있었다.

코리아 ()() 지역에 있었다. () 지역은 어디인가?

 

3. 삼국지 위서에서 그대로 인용한 위략이란 역사책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요약해 보자. 붉은 글씨는 필자가 단 주석이다.

 

1) 昔 箕子之後 朝鮮侯見 周衰燕 自尊為王欲東略地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나라가 쇠약해지자, 나라가 스스로를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 亦 自稱 為王欲 興兵 逆擊燕 以尊 周室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습하려 했다. 그리하여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려 하였다.

 

其大夫 禮 諫之乃止使禮 西 說燕燕止之不攻

조선의 대부 예가 연나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간하므로 공격을 중지하였다. 대부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여 연나라도 동쪽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2) 後 子孫 稍 驕虐燕 乃 遣 將秦開 攻 其西方取地 二千餘里

至 滿 番汗 為界朝鮮遂弱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져서, 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 한서 지리지 요동군에 번한番汗현이 있다.

 

3) 及 秦 并 天下使 蒙恬 築 長城到 遼東

진시황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 요동이 진나라와 조선의 접경지역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時 朝鮮王 否 立畏 秦襲之略 服屬 秦不肯朝會否死其子 準立

이때에 조선왕 가 왕이 되었는데, 나라의 침공을 경계하면서 정략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는 척 하고, 조공을 하거나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가 죽고 그 아들 이 즉위하였다.

 

5) 二十餘年 而 陳項起天下亂趙民 愁苦稍稍 亡往 準

準乃 置 之 於西方

그 뒤 20여년이 지나 차이나에서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과 초나라의 항우가 일어나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조선의 에게 亡命하므로, ‘은 이들을 조선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 연나라·제나라·조나라··접경지역이 요동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때의 연나라는 최소한 태행산맥 서쪽이나 황하의 남쪽에 있어야 조선과 접경할 수 있다.

 

6) 及 漢以 盧綰 為 燕王朝鮮 與 燕界 於 浿水

차이나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나라 왕燕王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요동지역 안에 패수浿水가 있어야 한다. 한서지리지 요동군 조에 패수浿水현이 있다.

 

7) 及 綰反入匈奴燕人衛滿 亡命為 胡服東 度 浿水詣 準 降

說 準 求 居 西界,()〔中國 亡命 為 朝鮮 藩屏

노관이 차이나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한 뒤, 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호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조선의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中國의 망명자를 거두어 외적으로부터 조선의 병풍지역이 되겠다고 을 설득하였다.

-> 패수의 서쪽에 연나라가 있다. 패수는 여전히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이다. ‘조선이 지금의 천진시 동북쪽 진황도시에 있다고 하면 연나라가 가로 막고 있어 제나라와 조나라의 백성들이 조선에 망명할 수 없다. 조선은 지금의 산서성, 하북성,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을 수 밖에 없다.

 

8) 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

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 ‘天子(천자)의 표시물이다. 조선은 스스로를 천자국임을 분명히 했다.

 

9) 滿誘 亡黨眾 稍 多乃 詐 遣人 告準言 漢兵 十道 至求入 宿衛

遂 還攻準準 與滿 戰不敵也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위만이 왕궁에 들어가서 지키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을 공격하였다.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위만의 쿠데타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10) (준의) 子 及 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을 사용하였다. 원래 조선의 왕족들의 성이 한씨韓氏 라는 의미이다.

 

11) 準王 海 中, 不 與朝鮮 相往來.

해 지역에 있으면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12) 其後絶滅, 今韓人 猶有 奉 其祭祀者.

그 뒤 준의 후손은 끊어졌으나絕滅, 지금 (코리아 () 사람)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4. 위략의 기록에서 다음 사항을 알 수 있다.

조선코리아 ()’은 바로 붙어 있다.

() 가 바다가 아니고 지역임은 [ 準王 海 中, 不 與朝鮮 相往來.]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마천 사기의 다른 나라, 다른 왕조에서 이미 알고 있듯이 ()’ 은 지역이기도 하고, 성씨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의 왕족의 성씨가 ()’ 이다.

 

1) ()만에게 쫓겨난 한 준’ (성이 ()이고 이름이 준) () 지역에서 왕이 되었다. 결국 코리아 () 나라는 조선연방 국가중의 하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2) 삼국지 위서 등은 () 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분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5. 의문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위략에 나오는 코리아 (),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차이나 지역에 있는 코리아 ()’이 같은 민족 혹은 같은 지역인가 하는 점이다.

 

1) ‘코리아 () (마한, 진한, 변한)’사기()과 동족 혹은 같은 국가 혹은 왕조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재까지 필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2)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한세가韓世家를 요약한 것이 위키백과이다.

 

3) ‘사기’ ‘한세가韓世家앞 부분이다.

[ ()나라의 선조는 주() 천자와 같은 성()인 희씨(姬氏)이다.

韓之先 與周 同姓姓 姬氏

 

그 후 후예들은 진()나라를 섬겨 한원(韓原)에서 봉토를 받아 한무자(韓武子)라고 칭했다. 其後 苗裔 事 晉得 封於 韓原曰 韓武子

(이 때 한원(韓原) 은 지금의 섬서성 漢城市한성시 일대의 평원을 말하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한무자의 3대 후손에 한궐(韓厥)이 있었는데, 봉토의 명칭을 좇아 한씨(韓氏)라 했다. 武子後 三世 有 韓厥從 封姓 為 韓氏]

 

4) ‘사기’ ‘한세가韓世家끝 부분이다.

王安 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왕안 5(기원전 234), 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급해져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나라가 한비를 억류시켰다가 죽였다.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 潁川郡韓遂亡。〔

왕안 9(기원전 230), 진나라가 한왕 안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의 땅을 전부 진나라에 귀속시켜 영천군(穎川郡)으로 삼았다. 나라가 마침내 멸망했다.

 

  太史公曰韓厥之感晉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韓氏之功於晉未睹其大者也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태사공은 말한다.

한궐(韓厥)이 진 경공(晉 景公)의 마음을 움직여 조씨 고아(孤兒) 조무(趙武)로 하여금 조씨의 대를 잇게 함으로써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의 의로움이 성취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음덕이다.

한씨의 공은 진()나라에서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후로서 10여 대를 이어간 것은 마땅하도다!”

(번역 swings81 https://m.blog.naver.com/swings81/222150518654 )

 

5) 영천군은 차이나 하남성 허창시 일대이다. 허창시는 정주시 남쪽 100, 낙양시 동남쪽 130지점에 있다.

 

()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 나라가 차이나 대륙에 있는 코리아 () 나라 (마한, 진한, 변한)이라면, 차이나와 코리아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영천군 穎川郡 : 중국 진나라의 행정 구역의 하나. 진시황 17(B.C.230)에 내사 등()()나라를 공격하여 왕을 사로잡고 영토를 몰수한 후 이를 설치하였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허창(許昌) 일대이다.

 

부록1 위키백과 [(전국)]

 

1) 다음은 위키백과의 코리아 () 나라 요약이다.

 

2)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공족이며, 진 목후(晉穆侯)의 아들인 환숙(桓叔)의 아들뻘이 되는 한만(韓萬)이 한원(韓原)이라는 지역에 봉해졌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희성(姫姓)을 가졌던 한무자(韓武子) 한만의 일가들이 한씨(韓氏)를 칭하였고, 성씨와 땅이름에서 따와서 지칭되었다.

 

한원 지역에는 원래 주나라 선왕 때 분봉된 희성 제후 한후(韓侯)가 있었다. 이 한나라는 50여 년 동안 존속했다가 진()에게 멸망했고, 바로 그 지역을 영지로 받은 것이 한만이다.

 

3) 기원전 620년 한만의 고손자 한궐(韓厥)이 사마로 등용되었고, 그 군락이 뛰어났다. 과거에 신세를 지었던 조씨(趙氏) 일족의 재부흥에 힘을 보태었고, 그 여망으로 기원전 573년 한궐이 정경(正卿)과 중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다. 한만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4) 기원전 541년 그의 아들 한기(韓起)도 정경이 되면서, 그는 정치를 관장하는 대신인 육경(六卿)이 되었다.

 

5) 춘추 시대 말기에는 한호(韓虎)가 조씨, 위씨(魏氏) 일족등과 함께 육경 중에 강력한 가문인 지씨(知氏) 일족을 기원전 453년에 멸망을 시켰다.

 

6) 후에 위씨, 조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주나라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아서 비로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7)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을 시켰고, 전국 칠웅 중에 최약체였고. 항상 서쪽에 있는 진나라()의 침공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신불해(申不害)을 재상으로 발탁한 한 희후(韓喜侯)의 치세에는 국내도 안정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즉위한 한 선혜왕은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고, 재상 신불해가 죽은 후에는 다시 진나라의 침공에 시달렸다.

 

8) 한나라의 패망을 우려했던 공자 한비(韓非)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韓非子)이다. 그러나 한비의 주장은 모국인 한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왕 영정(嬴政)이 한비자에 관심이 있었다. 한나라는 역으로 이용해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었다. 진나라가 관개 사업을 하도록 하고, 진나라의 국력을 쇄퇴시키려고 하였지만 이에 발각되었다. 이 공사로 만들어진 수로는 후에 정국거(鄭國渠)로 불리며 중국 고대 3대 수로 시절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진나라를 풍요롭게 하였다.

 

9)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함락되었고, 6국 중에 가장 빨리 멸망하였고, 한나라의 영토 전체가 영천군이라는 새로운 진나라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10) 기원전 226년 한나라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한왕 안(韓王安)이 처형됐다.

 

 

부록 2 ‘사기’ ‘한세가韓世家

https://m.blog.naver.com/swings81/222145570720

 

韓之先與周同姓姓姬氏其後苗裔事晉得封於韓原曰韓武子武子後三世有韓厥從封姓為韓氏

 

韓厥晉景公之三年晉司寇屠岸賈將作亂誅靈公之賊趙盾趙盾已死矣欲誅其子趙朔韓厥止賈賈不聽厥告趙朔令亡朔曰:「子必能不絕趙祀死不恨矣。」韓厥許之及賈誅趙氏厥稱疾不出程嬰公孫杵臼之藏趙孤趙武也厥知之

 

  景公十一年厥與郤克將兵八百乘伐齊敗齊頃公于鞍,〔獲逢丑父於是 晉作六卿而韓厥在一卿之位號為獻子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魏略曰: , 右渠未破時, 朝鮮相 歷谿卿 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조선의 승상 넘버 투 가 예谿의 최고 벼슬 경을 통하여 간언하였으나 우거()이 받아들이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으로 갔다.

 

晉景公十七年卜大業之不遂者為祟韓厥稱趙成季之功今後無祀以感景公景公問曰:「尚有世乎?」厥於是言趙武而復與故趙氏田邑續趙氏祀

 

  晉悼公之)〔韓獻子老獻子卒子宣子代宣字徙居州。〔

 

  晉平公十四年吳季札使晉

晉國之政卒歸於韓趙矣。」

 

晉頃公十二年韓宣子與趙魏共分祁氏羊舌氏十縣

 

晉定公十五年宣子與趙簡子侵伐范中行氏宣子卒子貞子代立貞子徙居平陽。〔

 

  貞子卒子簡子代。〔

簡子卒子莊子代

莊子卒子康子

康子 與 趙襄子魏桓子 共敗 知伯分其地地益大大於諸侯

 

  康子卒子武子

武子二年伐鄭殺其君幽公

十六年武子卒子景侯立。〔

 

  景侯 虔元年伐鄭取雍丘

二年鄭敗我負黍

 

  六年與趙魏俱得列為諸侯

 

  九年鄭圍我陽翟

景侯卒子列侯取立。〔

 列侯三年聶政殺韓相俠累。〔

九年秦伐我宜陽取六邑

十三年列侯卒子文侯立。〔

 

是歲魏文侯卒

 文侯二年伐鄭取陽城

伐宋到彭城執宋君

七年伐齊至桑丘

鄭反晉

九年伐齊至靈丘。〔

十年文侯卒子哀侯立

 

  哀侯元年與趙魏分晉國

二年滅鄭因徙 都 鄭。〔

 

索隱按紀年魏武侯二十一年韓滅鄭哀侯入于鄭

二十二年晉桓公邑哀侯于鄭

是 韓既徙都因 改號 曰 鄭故 戰國策 謂 韓惠王 曰 鄭惠王猶 魏徙 大梁 稱梁王然也

 

  六年韓嚴弒其君哀侯而子懿侯立。〔

 

  懿侯二年魏敗我馬陵。〔

五年與魏惠王會宅陽。〔

九年魏敗我澮。〔

十二年懿侯卒子昭侯立

  昭侯元年秦 敗 我西山

二年宋取我黃池。〔

魏取朱

六年伐 東周,〔取陵觀邢丘

 八年申不害相韓脩術行道國內以治諸侯不來侵伐

  十年韓姬 弒 其君 悼公。〔

十一年昭侯 如秦

二十二年申不害死

二十四年秦來拔我宜陽

  二十五年作高門屈宜臼

昭侯不出此門何也不時吾所謂時者非時日也人固有利不利時昭侯嘗利矣不作高門往年秦拔宜陽今年旱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而顧益奢此謂時絀舉贏』。」〔

 

二十六年高門成昭侯卒,〔果不出此門

 

子宣惠王立

 宣惠王五年張儀相秦

八年魏敗我將韓舉。〔

十一年君號為王

與趙會區鼠

十四秦伐敗我鄢。〔

  十六年秦敗我脩魚,〔虜得韓將貘申差於濁澤。〔

韓氏急公仲謂 韓王曰

與國非可恃也今秦之欲伐楚久矣王不如因張儀為和於秦賂以一名都具甲與之南伐楚此以一易二之計也。」〔

 

韓王曰:「。」乃警公仲之行,〔將西購於秦。〔

 

楚王聞之大恐召陳軫告之陳軫曰

秦之欲伐楚久矣今又得韓之名都一而具甲秦韓并兵而伐楚此秦所禱祀而求也今已得之矣楚國必伐矣王聽臣為之警四境之內起師言救韓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使信王之救己也縱韓不能聽我韓必德王也,〔必不為鴈行以來,〔是秦韓不和也兵雖至楚不大病也為能聽我絕和於秦秦必大怒以厚怨韓韓之南交楚必輕秦輕秦其應秦必不敬是因秦韓之兵而免楚國之患也。」

 

楚王曰:「。」

乃警四境之內興師言救韓

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

謂韓王曰

不穀國雖小已悉發之矣願大國遂肆志於秦不穀將以楚殉韓。」〔

 

韓王聞之大說乃止公仲之行。〔〇〕公仲曰

不可夫以實伐我者秦也以虛名救我者楚也王恃楚之虛名而輕絕彊秦之敵王必為天下大笑且楚韓非兄弟之國也又非素約而謀伐秦也已有伐形因發兵言救韓此必陳軫之謀也且王已使人報於秦矣今不行是欺秦也夫輕欺彊秦而信楚之謀臣恐王必悔之。」

 

韓王不聽遂絕於秦秦因大怒益甲伐韓大戰楚救不至韓

十九年大破我岸門。〔一一太子倉質於秦以和

 

  二十一年,〔與秦共攻楚,〔敗楚將屈丐斬首八萬於丹陽。〔是歲宣惠王卒太子倉立是為襄王。〔

 

  襄王四年與秦武王會臨晉其秋秦使甘茂攻我宜陽

五年秦拔我宜陽,〔斬首六萬秦武王卒

六年秦復與我武遂

九年秦復取我武遂

十年太子嬰朝秦而歸。〔

十一年秦伐我取穰。〔與秦伐楚敗楚將唐眛

 

  十二年太子嬰死公子咎公子蟣蝨爭為太子時蟣蝨質於楚蘇代謂韓咎曰:「蟣蝨亡在楚楚王欲內之甚今楚兵十餘萬在方城之外,〔公何不令楚王築萬室之都雍氏之旁,〔韓必起兵以救之公必將矣公因以韓楚之兵奉蟣蝨而內之其聽公必矣必以楚韓封公也。」韓咎從其計

 

  楚圍雍氏,〔韓求救於秦秦未為發使公孫昧入韓公仲曰

子以秦為且救韓乎?」

對曰:「秦王之言曰請道南鄭藍田,〔出兵於楚以待公』,殆不合矣。」〔

公仲曰:「子以為果乎?」

 

對曰

秦王必祖張儀之故智。〔楚威王攻梁也張儀謂秦王曰

與楚攻魏魏折而入於楚韓固其與國也是秦孤也不如出兵以到之,〔魏楚大戰秦取西河之外以歸。』

 

今其狀陽言與韓其實陰善楚公待秦而到必輕與楚戰楚陰得秦之不用也必易與公相支也。〔公戰而勝楚遂與公乘楚施三川而歸。〔公戰不勝楚楚塞三川守之,〔公不能救也竊為公患之司馬庚三反於郢甘茂與昭魚〇〕遇於商於其言收璽,〔一一實類有約也。」

 

公仲恐:「然則柰何?」:「公必先韓而後秦先身而後張儀。〔一二公不如亟以國合於齊楚齊楚必委國於公公之所惡者張儀也,〔一三其實猶不無秦也。」

 

於是楚解雍氏圍。〔一四

 

  蘇代又謂秦太后弟羋戎:「公叔伯嬰恐秦楚之內蟣蝨也,〔公何不為韓求質子於楚?〔楚王聽入質子於韓,〔則公叔伯嬰知秦楚之不以蟣蝨為事必以韓合於秦楚秦楚挾韓以窘魏魏氏不敢合於齊是齊孤也公又為秦求質子於楚,〔楚不聽怨結於韓韓挾齊魏以圍楚楚必重公。〔公挾秦楚之重以積德於韓公叔伯嬰必以國待公。」

 

於是蟣蝨竟不得歸韓。〔韓立咎為太子魏王來。〔

 

  十四年與齊魏 王共擊秦至函谷而 軍焉

十六年秦與我河外及武遂襄王卒太子咎立是為釐王

 

  釐王三年使公孫喜率周魏攻秦秦敗我二十四萬虜喜伊闕

五年秦拔我宛。〔

六年與秦武遂地二百里。〔

十年秦敗我師于夏山

十二年與秦昭王會西周而佐秦攻齊齊敗湣王出亡

十四年與秦會兩周閒

二十一年使暴救魏為秦所敗走開封

  二十三年魏攻我華陽。〔韓告急於秦秦不救韓相國謂陳筮

 

事急願公雖病為一宿之行。」陳筮見穰侯穰侯曰

 

事急乎故使公來。」陳筮曰

未急也。」穰侯怒曰

是可以為公之主使乎夫冠蓋相望告敝邑甚急公來言未急何也?」陳筮曰:「彼韓急則將變而佗從以未急故復來耳。」穰侯曰

公無見王請今發兵救韓。」

 

八日而至敗趙魏於華陽之下是歲釐王卒子桓惠王立

 

  桓惠王元年伐燕

환혜왕 원년(기원전 272)에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가 어디에 있어야 공격할 수 있는가? ()나라의 북쪽은 위나라와 조나라가 있어 연나라와 ()나라는 국경을 맞댈 수가 없다!

 

九年秦拔我陘城汾旁。〔

환혜왕 9(기원전 263), 진나라가 한나라의 형()을 함락시키고 분수(汾水) 가에 성을 쌓았다.

 

十年秦擊我於太行,〔我上黨郡守以上黨郡降趙

환혜왕 10(기원전 262), 진나라가 한나라를 태행산(太行山)에서 공격하니 한나라의 상당군(上黨郡) 군수가 상당군을 바치며 조나라에 투항했다.

 

十四年秦拔 趙 上黨,〔殺 馬服 子 卒 四十餘萬 於長平

환혜왕 14(기원전 258), 진나라가 상당을 빼앗고, 장평(長平)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 조괄의 병졸 40만여 명을 생매장했다.

 

十七年秦拔我陽城負黍。〔

二十二年秦昭王卒

二十四年秦拔我城皋滎陽(지금의 정주시)

二十六年秦悉拔我上黨二十九年秦拔我十三城

 三十四年桓惠王卒子王安立

 

 王安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潁州郡韓遂亡。〔

 

  太史公曰韓厥之感晉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韓氏之功於晉未睹其大者也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索隱述贊韓氏之先實宗周武事微國小春秋無語後裔事晉韓原是處趙孤克立智伯可取既徙平陽又侵負黍景趙俱侯)〔僭主秦敗脩魚魏會區鼠韓非雖使不禁狼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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